CAFE

* 뿌리, 오늘의 우리는 과거역사의 작품이다.

작성자아리아리|작성시간15.04.19|조회수183 목록 댓글 8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말하기를 풍류라 한다.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 三敎 接化群生
종교를 일으킨 연원은 선사[仙家史書]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유 불 선 삼교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한다.

 

且如 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 즉 나라에 충성하니, 그것은 노사구(공자)의 교지(敎旨)와 같다.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주주사(노자)의 교지와 같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불교,유교,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 우리 민족의 고유 종교와 사상은 바로 신교(神敎)이다. 신교(神敎)는 본래 우리민족의 국교였다. 신교(神敎)는 이신설교(以神說敎)의 준말로써 신의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으로 신교(神敎)문화는 한마디로 신(神)과의 교감과 제사문화이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우주의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바로 신교(神敎)이다. 이 신교(神敎)가 왜 중요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바로 이 신교(神敎)가 유불선(儒佛仙)의 모체종교라는 점이다. 유불선이라는 종교가 신교(神敎)에서 가지를 쳐 뻗어나갔던 것이다.
 
신교(神敎)의 기원은 초대 환인(桓仁)께서 천산(天山)에서 삼신상제께 천제(天祭)를 지내면서부터 비롯한다. 그 때는 제정일치(祭政一治) 시대로서 환인(桓仁) 자신이 정치적인 군장이면서 프리스트(Priest-성직자)의 역할을 동시에 했다. 환인(桓仁)께서는 전 백성들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아 통치를 했는데, 그 구심점이 바로 삼신상제(三神上帝)님께 드리는 천제(天祭)였다. 천제(天祭)는 3월 16일과 10월 3일 두번에 걸쳐서 지냈다.

 

옛 부터 삼신상제께 천제를 지내던 장소는 아사달(阿斯達)이었다. 아사달에서 '아사'라는 말은 최초라는 뜻과 최고라는 뜻이 있다. 또 '달'이란 땅을 뜻한다. 흔히 양달 응달이란 말을 많이 쓴다. 양달과 응달은 양지 바른 땅과 그늘 진 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사달 하면 최고의 땅, 최초의 땅을 가리킨다. 또 아사달은 최초, 최고의 땅으로 수도(首都)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수도가 위치했던 하얼삔, 백두산, 장당경 모두를 아사달이라고 했던 점을 생각하면 된다. 이 아사달에 소도(蘇塗)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 천제를 지내는 곳이다. 그래서 아사달은 후세에는 소도(蘇塗)라고도 불렸다. 소도에서 지내는 제사의 대상은 우주의 절대자인 삼신상제였다. 부여에서는 이것을 영고(迎鼓)라고 했다.

 

 

마니산은 원래는 마니산이 아니라 마리산이다. 마리는 머리(首)를 뜻한다. 초대 단군이 여든여덟살 되던'무오 51년(B.C.2283)에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을 강화도에 보내서 삼랑성을 짓고 마리산에 제천단(祭天檀)을 쌓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강화도 마리산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제천단이다.

 

[단군세기]를 보면 단군성조께서 천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굉장히 많다. 몇가지 예를 들면, 5세 구을단군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계해 2년(B.C.2098) 5월 황충(蝗蟲:메뚜기)의 떼가 크게 일어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단제께선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밭과 들을 둘러보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6세 달문단군 때에는 '임자 35년(B.C.2049) 모든 한(汗:지방 통치자)들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九月山)에 제사케 하고'라는 기록이 나온다. 또 11세 도해단군 때에는'경인 원년(B.C.1891) 단제께서는 오가(五加)에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國仙)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하늘에는 조화신(造化神)·교화신(敎化神)·치화신(治化神)의 삼신(三神)이 있고, 땅에는 진한 · 번한 · 마한의 삼한三韓이 있고 그리고 삼신의 생명이 인간 몸에 들어와 이루어진 것이 성·명·정(性命精)의 삼진三眞이다. 하늘에는 삼신(三神), 땅에는 삼한(三韓), 인간에게는 삼진(三眞)이 있다! 이것이 신교(神敎)문화의 핵심 주제이다.
 
성명정(性命精)이라는 것은 하늘의 조화신,교화신,치화신, 삼신(三神)이 그대로 내몸속에 들어와 화(化)한 것이고, 그것이 우리 몸에서 작동이 될 때는 심기신(心氣身)이다. 즉 체용(體用) 관계로 해서, 본성(性)이 작동을 하면 그게 마음이고, 우리의 목숨, 명(命)이라는 것, 라이프, 생명이라는 것은 기(氣)에 의해서 발현되는 것이고, 정(精)이라는 것은 우리 몸(身)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주라는 것은 곧 정(精)을 생산하는 과정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내 몸에서 정(精)이라는 것은 신장(腎腸)의 수기(水氣)를 중심으로 얘기를 하지만 실제로는 온 몸에 정精(진액)이 다 들어있다. 머리에 있는 골수도 정(精)이고, 오장육부에 정(精)이 다 들어있다. 이런 피, 우리가 삼키는 침도 그게 다 정精(진액)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精)이라는 것은 굉장히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심기신(心氣身)이 구체적으로 작동을 해서 용(用)하는 것이 감식촉(感息觸)이다. 감(感)이라는 것은 느끼는 것, 식(息)이라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다. 기(氣)라는 것은 호흡을 통해서 작동이 된다. 그 다음에 우리 몸이라는 것은 촉감을 통해서 실지 느낀다. 그래서 성명정, 심기신, 감식촉의 이 아홉 개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면 인성론(人性論)에 대한 모든 개념이 다 정리된다. 

 

 

또한 여기에서 유,불,선 삼교일체(三敎一體) 사상이 성립된다. 즉 모든 육체적 감각(욕망)을 극복하여(禁觸) 행실을 닦고(修身) 정기(정력)를 성실하게 함으로써(精誠) 대인(大人)군자를 추구하는 사상이 유교로, 모든 느낌을 끊어 버리고(止感) 마음을 맑게 하여(明心) 본래의 성품을 깨달아(覺性) 성불을 추구하는 사상이 불교로, 숨을 고르게 쉬고(調息), 원기를 길러(養氣), 불로장생(長命)하는 신선을 추구하는 사상이 도교가 되었다.

 

국통맥을 보면, 고조선은 나라를 삼한으로 다스렸다. 이것을 보는 것이 우리 한민족 역사의 뿌리와 깨달음의 근본 문제다. 동방은 조물주를 삼신(三神)이라고 한다. 삼신(三神)의 본성은 첫째, 조물주의 창조의 덕성인 조화신(造化神, 父: 만물을 내시고), 교화신(敎化神  師: 以神設敎,가르치시고), 치화신(治化神  君: 다스리시고)의 창조의 본성을 가지고 삼신(三神)이라 하는 것이다.   

 

동방의 이 삼신(三神)의 문명을 열어서 제도화 시키는 과정이 바로 한민족의 뿌리 역사인 환국-배달-조선의 역사다. 즉 우리 민족의 시원 국가인 환국, 배달, 조선은 삼신三神의 삼수(三數) 법칙으로, 삼신三神의 세 가지 창조 덕성을 생활 문화로 뿌리내린 것이다.

 

조물주 삼신 상제(三神 上帝)의 첫 번째 본성인 조화신(造化神)의 특성을 몸으로 체득한 것이 조화시대(造化時代) 환국(桓國)이다. 그 때는 모든 백성이 광명으로 살았다(white shaman). 밝아서 아주 거짓없이 진실하게 살았다. 서양의 고대문명 연구가들은 인류 역사의 초기를 ‘황금 시대(the golden age)’라 부른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고대의 황금 시대를 규명해 온 그들은, ‘금속 무기가 없이 오직 석기만을 쓰던 그 시대 인간들은 전쟁을 꾀하지도 않고, 사람을 대규모로 살상하지도 않고, 하늘과 땅에 애정을 듬뿍 쏟으며 살았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원시 샤머니즘을 연구한 독일인 칼바이트H.Kalweit는, “먼 옛날은 인간이 행복과 평화 속에 살면서 초자연적인 힘을 쓰던 황금 시대로, 그때 사람들은 별 어려움 없이 신과 소통할 수 있었고, 죽음을 모르고 질병과 고통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서 살았다”(Shamans,healers, and medicine men)라고 말한다. 당시의 인간은 삼신의 신성을 그대로 발현하며 천지와 같이 환하게 빛나는 존재들이었다. 환(桓)은 ‘밝을 환桓’ 자로 광명을 상징한다.

 

특히‘하늘에서 내려오는 환하게 빛난 광명’, 천광명(天光明)을 상징한다. 환국(桓國) 사람들은 태양을 광명이 모이고 삼신이 머무는 곳으로 여겼다. 광명은 곧 삼신상제의 신성과 지혜를 상징한다(태백일사). 환(桓)은 단지 나라 이름으로 그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환桓’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모든 환桓을 다스리는 사람을 인(仁)이라 불렀다(인류문명의 기원과 한, 314~323쪽) 그래서 환국의 통치자를 환인(桓仁)이라 했다.

 

‘어질 인(仁)’을 써서 환인桓仁이라 부른 것은 사람을 구제하고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 반드시 어진 마음으로 하였기 때문이었다(행촌 이암선생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환인천제를 ‘만물에게 삼신(三神)의 광명과 덕을 베풀며 함께 즐거워하였던, 인류의 가장 근원이 되는 ’조상(主祖)’이며‘감정(感)과 호흡(息)과 만물과의 접촉(觸)이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한결같으셨던 선仙의 위대한 조상’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 교화신(敎化神),의 기운으로 문명을 열어 나간 나라가 배달국이다. 갈홍(葛弘) {포박자(抱朴子)}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昔有黃帝 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以劾召萬神
황제가 청구에 와서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문을 받아 만신을 부렸다.
 
부연하자면 일찍이 황제는 14대 자오지 천황(치우천황;BC 2707 ~ BC 2599) 때, 배달국의 수도인 청구(靑邱: 오늘날의 요령성)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삼청궁(三淸宮)에 들러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선사(紫府仙師)를 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음부경(陰符經)이라 불리우는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전수받았다. 이것은 중국의 도교문화의 맥 자체가 동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배달국(倍達國,B.C3,898~ B.C2,333년)은 신시배달(神市,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지는데, 신시(神市)배달은 초대 배달(倍達) 환웅(桓雄)께서 B.C 3,898년에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건국이념을 가지고서 토착족인 웅족, 호족을 융합하여 백두산 신시(神市)에 개국한 것을 말한다.

 

청구(靑丘)배달은 제14대 치우(蚩尤) 천황께서 B.C.2,707년에 재위에 오른 후, 청구(靑丘) 즉 지금의 만주 산동반도 태산(泰山)아래로 도읍을 옮긴 것을 말한다. 이 배달국은 제1대 배달 환웅으로부터 제18대 거불단 환웅까지 1565년간(B.C 3898~ B.C 2333년) 지속되었다.

 

신시(神市)는 서불로도 불리다가 서라벌(서불의 사투리)로 바뀌다가 오늘날의 서울이란 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이 우리나라를 예로부터 청구(靑丘)라고 불렀는데, 배달국의 청구(靑丘) 시대의 영향 때문이다. 


 

배달국 5대 태우의(BC 3511 ~ BC 3419) 환웅천황의 12번째 막내아들 “태호복희(BC3528∼BC3413)씨는 지금의 행정관에 해당하는 우사(雨師)의 직책을 맡았으며, 처음으로 시획팔괘(始劃八卦)를 하시고, 우주의 이법인 주역을 처음 그려 내놓았다.” 

 

아인슈타인이 자기의 학설에 붙일 명칭을 고심하다가 동양의 팔괘의 효를 구성하는 음양(陰陽)개념에서 힌트를 얻어 ‘Relativity’(상대성) 이라는 단어를 가려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그가 동료에게 보낸 한 편지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유럽 과학의 발전은 두 가지의 위대한 성과를 기초로 하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의 철학자가 형식논리의 체계를 발명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실험을 통해서 인과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한 동양의 현철들은 비록 이 두 가지 길을 거치지 않았으나, 놀랍게도 동양에서는 그러한 것의 발견이 모두 이루어져 있었다.”(참조:『역으로 본 현대과학』)

 

또 양자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닐스 보어는 음양의 이치를 담은 태극문양에서 힌트를 얻어 양성자(+)와 전자(-)로 이루어진 원자모델을 발견하는 업적을 세웠으며, 후에 태극마크를 가문의 문장(紋章)으로 삼기도 했다. 동양의 지혜에서 발명의 힌트를 얻은 서양문명사의 또 다른 인물로 라이프니쯔 이다. 서양에서 이진법은 17세기초에 고안되어 나왔는데, 이원론에 심취해 있던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주역 이론에 이진법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체계를 정립시켰다. 

 

그는 1709년에 복희팔괘와 함께 이진수를 나타낸 분석표를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면서,“주역은 모든 과학의 열쇠이다.” 나의 불가사의한 이진법의 새로운 발견은 5천 7백 여 년 전 고대 동양의 태호복희왕이 발견한 철학서이며 문학서인 주역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

 

 

배달국의 교화신(敎化神)시대에 문자를 만들고 농경문화를 열고, 시장문화를 열어 교역을 하고, 약재를 만들어 병을 고치는 등 실제로 문명을 열었던 시대였다. 초대 환웅천황(BCE3897~BCE3804)이 신지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을 창제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문자로 알려진 BCE3000년 경의 쐐기문자(수메르)와 상형문자(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세계 최초의 문자이다. 고조선 3세 가륵단군은 이 문자를 수정 보완하여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다.

 

 
 
왼쪽부터 낭하리 고각, 영변지에 실린 녹도문, 창힐문자,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고조선 토기의 문자, 은나라의 갑골문(신지 전자의 초기모습)이다.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배달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사를 삼신께 드렸다"고 했다. 이 문자는 5세 환웅이신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께서 육서(六書)의 원리로서 개량, 이것을 용서(龍書)라고 하며 이것이 널리 통용되던 신지문자이다. 주로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태호복희씨의 신하 창힐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배워 중국에 널리 보급했다. 그 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는데 결승문자는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 통용된 것이다.
 
창힐이 중원에 유통시킨 신지문자는 훗날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들에 의해 한문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로 개량되었다. 한글과 한자를 만든 민족이 우리 선조들 이었다. 이 녹도문자(鹿圖文字)는 이집트 상형문자(B.C 3,000년경), 수메르 설형문자(楔形文字, B.C 3,000년경)보다 몇 세기 앞서는 세계최초의 문자이다. 배달국의 녹도문자는 고조선에 이르러 가림토 문자로 계승 발전되고, 고조선 시대의 가림토 문자는 조선 시대의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한글)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단군세기』의 기록에 고조선 시대 3세 단군이신 가륵(嘉勒)단군 2년(B.C 2,181년) 때의 일이다. 아직 풍속은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전하는 녹도문자(鹿圖文字)가 있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100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하인 삼랑(三郞, 삼신상제께 천제 지내는 관직)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字)를 만들고 이를 가림토(加臨土) 문자라고 하니 그 글자는 다음과 같다.”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자음과 모음을 합하여 38개를 가지고 운용하였다. 우리민족의 활동무대였던 만주에는 지금도 가림토 문자 비석이 우뚝 서 있다. 
 
 
고시례(高氏禮)란 말의 유래
강감금단(綱鑑金丹)에 따르면 고시씨(高矢氏)는 초대 거발환(BCE 3897~ BCE 3804)환웅 때의 주곡관(主穀官)으로 농업을 주관하였다. 그후 고조선 시대에도 고시라는 분이 농사일을 주관하였다. 이후 수천 년 동안 들에서 농사짓고 산에서 나무하던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는 항상 음식을 던지며 "고시례" 또는 "고수레" 하고 고시씨高矢氏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하여 형성된 풍습이 면면히 전해 내려온 것이다.

 

 

배달국은 신교의 삼신오제(三神五帝) 사상을 통치원리로 삼아 삼백三伯(풍백, 우사, 운사) 제도와 오사五事(주곡,주명,주형,주병,주선악) 제도를 만들어 국가를 경영하였다. 삼백은 조선 시대의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근현대의 삼권분립(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제도와 완전히 정합한다. 풍백,우사, 운사는 흔히 말하듯 바람신, 비신, 구름신이라는 신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원형인 것이다. 배달의 오사는 고조선과 북부여, 고구려, 백제 등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태백일사]기록에 따르면, 대웅전(大雄殿)은 원래 불교 용어가 아니라 바로 대인 환웅(大人 桓雄)을 일컫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라고 [고려팔관잡기]를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다. "불상이 처음 들어 오자 절을 세우고 이를 '대웅(大雄)'이라 칭했다. 이는 승도들이 옛 풍속을 세습하여 부르는 칭호이며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니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 땅에 환인,환웅,단군 등을 모셔 놓은 신전혹은 신당이 있었는데 이를 대인당, 환웅전, 삼성전 등으로 불렀다. 그 뒤 불교가 들어오면서 한민족 고유문화인 신교의 전통적인 성전인 "환웅전(桓雄殿)"이라는 이름에서 "환(桓)" 자를 "대(大)"자로 고쳐서 "대웅전(大雄殿)"이라 하고, 석가모니 부처를 모셨다.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삼성각(三聖閣)도 마찬가지다. 대웅전이 원래 석가모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대인 환웅"에서 나온 이름인 것처럼 ,삼성각(三聖閣)도 환인,환웅.단군, 세 성조를 받들던 민족 고유 신앙의 잔영이다. 오늘까지도 사찰마다 삼성각三聖閣이라는 이름으로 당우를 두고 있는 연유를 아는 불교인들이 몇이나 될까?

 

 

불교는 해처럼 환한 불성(佛性)으로 밝은 세상을 실현하겠다는 광명사상은 신시배달국을 세운 커발환(BC 3897 ~ BC 3804) 환웅천황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할 것이다. '커발환'이라는 이름 자체가 "크게 빛나는 해(태양)"라는 의미로 대광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커발환 환웅천황의 광명사상을 가지고 배달족의 갈래인 코리족이 초원길을 따라 인도로 들어가 코리족을 형성했다. 석가는 바로 코리족 출신이다.

 

 

‘우리의 시원역사와 문화가 얼마나 왜곡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 역사 왜곡의 깊은 상처가 지금 우리의 가슴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 문화를 찾는 상징적인 언어! 그것은 동방 역사와 문화의 실제 창조자를 기려 부르는 두 글자다.’ 그 상징 언어가 중국 문헌인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저 숙신(肅愼)의 나라에 백민, 백의민족이 살고 있는데, 큰 나무를 모시고 있어 웅상(雄常)이라 한다.”

 

‘숙신肅愼은 동북방에 거주하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중국은 동방 한국의 옛 이름인 배달국과 조선(고조선,단군조선)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그들의 역사서를 보면 우리민족의 나라 이름을 폄하하여 동이東夷(동방 오랑캐), 숙신肅愼(동북방 오랑캐), 또는 구이九夷(아홉 오랑캐)라고 했다.

 

웅상(雄常), 이 속에 동방의 역사 문화를 찾는 비밀이 다 들어 있다. 웅상(雄常)이란 무엇인가? 얼핏 보면 영웅 웅雄 자, 항상 상常 자. 영웅은 살아 있다, 영웅은 영원하다는 뜻인 것 같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 우리 민족의 나라 이름이 배달이다. 그래서 한민족은 배달민족이라는 것이다. 바로 6천년 전에 배달국을 건국하신 분,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우신 최초의 건국자가 거발환(BC 3897 ~ BC 3804) 환웅(桓雄)이다. 이 환웅천황의 웅雄 자와 항상 상常 자를 써서 웅상(雄常)이라 한다.

 

 

한민족은 거대한 공정심(公正心)을 유발하는 거룩한 성산(聖山)이 있으면 그것을 산상山像, 환웅님이 임재하시는 산이라 하였고, 거대한 나무가 있으면 신단수(神檀樹)로 삼아 웅상雄常으로 모셨다. 『환단고기』를 보면 우리 한민족에게는 수천년 전부터 산상(山像)과 웅상(雄常)의 풍속이 전해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다. 웅상雄常은 ‘환웅천황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명언이다.

 

일본에 가 보면 실제 환웅천황을 모시는 신사가 있다. 구주(九州) 히꼬산(日子山, 지금의 영언산英彦山) 단군굴에 환웅상(桓雄像)이 있다. 동방에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불상처럼 옛 어른을 모시는 문화가 있었다. 몽골이나 시베리아에 전역에서도 산을 넘을 때 과거 우리 한국의 서낭당처럼 돌을 쌓아놓고 세 바퀴를 돌면서 기도를 드린다.‘나는 지금 신을 잃어버렸나? 나는 신과 지금 한마음으로 살고 있는가?’하는 것을 각성하면서 그 고개를 넘어간 것이다.

 

 

인류 창세 역사 문화의 성지라 하는 바이칼 호, 바로 그 위에 샤먼 바위가 있는데, 거기 보면 세르게이라고 열세 개의 큰 기둥을 세워 놓았다. 신단수의 변형인데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면 거기에도 오벨리스크라고 해서 두 개의 기둥을 세워 놓았다. 이것도 신단수의 변형이라고 서양 학자들이 해석하고 있다. 일본에는 모든 신사가 거대한 숲속의 나무를 중심으로 해서 세워져 있다. 모든 종교에는 그것이 부처님이 됐든, 마리아가 됐든, 성상을 모시는 문화가 있다. 몽골의 오워라든지, 세르게이라든지, 이런 솟대문화와 성상 문화의 근원이 바로 웅상雄常이다.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들어가서 보면 이시타르 문이 있는데, 유명한 독일의 학자가 바빌론 천상의 정원, 하늘정원을 뜯어온 것이다. 거기에 들어서면 동방 원형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조각이 너무도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단을 올라가 제단 있는 곳을 보니 그 위에 태양 같은 둥근 원이 있고 바로 아래에 직사각형이 있고 그 아래에 할아버지가 계신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상像이 옆에 똑같은 한 면이 있고 반대편에 한 면이 있다. 3수로 돼 있는 것이다.

 

신전에 있는 흰 수염을 한 노인이 누구인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 문화의 원형은 6천년 전, 인류 최초의 문명권에서 동방으로 오신 환웅(桓雄)이다. 웅상雄常! 우리는 언제나 교화신(敎化神),의 기운으로 문명을 연 환웅(桓雄)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웅상雄常! 이게 중국 사람의 기록에 나온다. 그리고 세 번째 치화신(治化神)시대가 고조선이다. 신교의 삼신문화가 국가 경영 원리로 정착된 가장 결정적인 제도는 바로 고조선의 삼한관경제(三韓菅境制)이다. 고조선은 삼한관경제의 성쇠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고조선은 신교문화(神敎文化)의 삼신사상(三神思想)을 바탕으로 조화신(造化神), 교화신(敎化神), 치화신(治化神)의 원리에 따라 단군조선(BC 2333~ BC 238)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것이 바로 단군조선의 국가 경영 제도인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이다.

 

단군왕검은 대단군으로서 요동과 만주 지역에 걸쳐 있던 진한(辰韓, 홍산 적봉 일대)을 통치하고, 요서지역의 번한(番韓, 산동반도 일대)과 한반도의 마한(馬韓, 한반도 일대)은 각각 부단군이 통치하였다.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인 진한의 수도는 하얼빈(소밀랑), 부단군이 통치했던 마한의 수도는 평양(백아강), 번한의 수도는 탕지보(안덕향)로 삼한(三韓)을 22대 색불루(索弗婁,BC 1285~ BC 1238) 단군 때 삼조선 즉, 막조선, 진조선, 번조선으로 변경하였다.

 

마한은 하늘의 정신[天一]을, 번한은 땅의 정신[地一]을, 진한은 천지의 주인인 인간의 정신[太一]을 상징한다.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이었던 진한(辰韓)의 수도는 처음에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그리고 장당경 아사달로 3번을 옮기게 된다.

 


 

20세기 후반 요서 지역에서 중요한 고고학 발굴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하가점문화이다.

 

하가점夏家店은 내몽골 자치구 적봉시의 한 촌락으로, 건조한 기후 때문에 유적과 유물이 빗물에 유실되지 않고 시대별로 층층이 잘 보존된 곳이다. 그 상층에서 유목민 문화가 나타났고, 하층에서 BCE 2400∼ BCE 1500년에 걸친 농경집단의 청동기 문화가 나타났다.

 

하층에서 출토된 비파형 청동검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서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한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다. 이처럼 문헌 기록으로 보나 유물로 보나,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요서에 이르는 드넓은 땅을 차지한 동북아시아의 대국이었다.

 

고조선 삼한관경(三韓管境)이 와해되는 과정
고조선은 21세 소태단군(BC1337~BC1286) 말기 무렵, 개국 이후 첫 번째 국가 위기상황을 맞이하였다. 국가 운영의 근간인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조선 제2왕조 시대, 22세 색불루(索弗婁) 단군(BC1285~BC1238)
상商나라 정벌에 공을 세운 개사원 지역의 욕살褥薩(지방장관) 고등高登과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의 권력투쟁이 그 발단이었다. 순행 길에 옥좌 이양 의사를 밝힌 진한의 21세 소태(蘇台)단군(BC1337 ~BC1286)은 서우여에게 제위를 넘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등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보위에 오르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색불루에게 국새를 넘겨주었다.

 

이에 서우여徐于餘가 마한, 번한의 군대와 연합하여 색불루索弗婁에게 강력히 저항하면서 삼한의 군대가 서로 싸우는 내전이 발발하였다. 다행이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져서 내전은 가까스로 종결되었지만, 자칫 삼한관경제가 붕괴될 수 있는 위기를 겪었다. 그 후 진조선의 색불루단군은 서우여(徐于餘)를 번조선의 부단군 30대 왕(BC 1285 ~ BC 1225)으로 임명한다. 정권을 탈취한 22세 색불루(索弗婁) 단군(BC1285~BC1238)은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하여 고조선의 제2왕조 시대를 열고 국정쇄신을 위해 삼한(진한, 번한, 마한)을 삼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꾸었다.


삼조선 체제에서도 여전히 진조선만 병권을 가졌지만, 이미 예전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아니었다. 22세 색불루 단군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다. 8조금법은 여덟 가지 죄의 종류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三聖祖(환인,환웅,단군) 시대 최초의 성문법이다.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조선의 사회 분위기와 경제 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낸다.

 

당시 고조선은 신교神敎 문화의 성소인 소도(蘇塗)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약해지고 빈부 격차와 계급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고조선 제3왕조 시대, 44세 구물丘勿 단군(BC425~BC397)
43세 물리단군(BC461~ BC426) 때에 이르러 삼한관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BC 426년 사냥꾼 우화충(于和?)의 역모 사건이다. 장군을 자칭한 우화충이 무리를 이끌고 도성까지 공격해 오자, 피난에 나선 물리(勿理) 단군은 도중에 붕어하고 말았다. 이때 반란군을 평정하기 위해 욕살 구물丘勿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구물 단군은 도성에 큰 물이 들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평정하고 44세 단군(BC425~BC397)으로 즉위하였다.

 

장당경 아사달에서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구물단군은 국력 회복을 위해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다. 그리고 제도를 고치고, 아홉 가지의 맹세(九誓之盟)를 정하여 백성들의 화합과 교화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대부여大夫餘는 예전의 진한 또는 진조선과 같은 막강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부단군이 다스리는 두 조선(번조선,막조선)도 병권을 가지게 되어, 쇠약해진 진조선과 대등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약 2천년 동안 고조선을 지탱하던 삼한관경제는 거의 와해 직전에 이르렀다.

 

고조선말기의 혼란상황
이때부터 고조선은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45세 여루(余婁)단군(BC 396 ~ BC 342) 이후 고조선과 국경을 접한 연나라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46세 보을(普乙)단군때는 번조선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를 당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보을단군(BC 341 ~ BC 296)의 보위를 탐하는 내란까지 발생하였다.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점령,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때 장군 고열가(高列加)가 내란을 진압하고 추대를 받아 즉위하니, 이분이 바로 진조선의 마지막 왕 47세 고열가(高列加)단군(BC 295~ BC 238)이다. 하지만 고열가(高列加) 단군은 우유부단하였고, 장수들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BCE 238년, 마침내 고열가高列加 단군이 오가(五加)에게 새로운 단군을 천거할 것을 부탁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니, 고조선은 2,096년으로 그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고조선 역사 2,096년은 고조선의 중심 세력인 진조선의 역사라는 것이다. 고열가단군은 퇴위하였지만, 고조선 전체가 한꺼번에 문을 닫은 것이 아니다. 번조선은 그 이후 40여 년을 더 존속하였다. 삼조선 중, 막조선은 마지막 왕 맹남孟男(재위 BCE 366~?) 이후 역사 기록이 이어지지 않는다.

 

고열가단군 이전에 이미 왕통계승이 단절되고 각 부족 단위의 자치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막조선의 무주공산 시절은 BCE195년 최숭의 낙랑국 건설로 끝이 난다. 고조선 망국의 과정은 삼신(三神) 문화에 바탕을 둔 고조선의 국가경영체제,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모르면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해모수(解慕漱)의 북부여北夫餘(BCE 239~ BCE 195) 건국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를 개창한 분이 바로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解慕漱) 단군이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BCE 239년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두하였다.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오가五加 부족장들의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BCE 232).

 

‘북부여(北夫餘)’는‘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인 대부여의 북녘 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대’자를‘북’자로 바꾸어 북부여라 한 것이다. 그것은 망해 가던 대부여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해모수단군의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렇게 북부여가 고조선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을 때, 고조선의 양팔인 번조선과 막조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조선 개국 이래로 서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외부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수호하는 방파제 구실을 하던 번조선 땅은 이 무렵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을 피해 넘어온 한족(漢族) 난민으로 넘쳐났다. 그 난민 중에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ㆍBC 247~BC 195)의 죽마고우이자 연나라 왕이었던 노관(盧?)의 부하 위만(衛滿)이란 자가 있었다. 위만은 한 고조의 숙청을 피하여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번조선의 준왕에게 투항하였다(BCE 195).

 

번조선의 75세 단군 준왕(箕準,BCE 221~ BCE 195)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쪽 변방인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그곳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이듬해에 왕검성을 쳐서 한순간에 준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번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 한 모퉁이 번조선을 잠깐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한사군漢四郡’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의 우리역사가 중국의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조작한 역사말살의 학설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사군漢四郡 대동강설’이다. 일제가 대동강 유역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4 개의 식민 구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어떠한가?
 
BC 108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 우거를 멸하려고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다. 전쟁 초기에는 우거왕의 일방적인 승리가 이어졌지만, 장기전으로 가면서 내부의 반란에 의해 결국 왕검성은 무너지게 된다. 우거의 정권은 조선의 왕위를 찬탈해서 만든 한족 정권이기 때문에, 니계尼谿에서 상相이라는 벼슬을 하던 참參이 주동이 되어 우거를 죽여 버렸다. 그러고서 조선의 유민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나라 군에 대항하여 피 터지는 조선족의 독립전쟁을 한 것이다.
 
 
당시 조선족의 독립운동이 워낙 강력하게 일어나서 그곳에 자기네들의 사군四郡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런데 『삼성기三聖記』上篇상에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있다. 한 무제가 우거의 왕검성만 정벌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옛 고조선 지역인 만주의 북부여(BC 239 ~ BC 58)까지 완전히 먹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동방 한민족사에 최대의 위기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때 군사를 일으켜 의연히 일어난 구국의 인물이 서압록 위에 살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왕대나무에 왕대가 난다고, 진조선(眞朝鮮)의 47대 고열가 단군(BCE 295 ~ BCE 238)의 직계 후손인 고두막한이 나서서 한 무제를 물리쳤다.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한 사마천의『사기』의 내용을 보면 한 무제는 단군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에게 5만7000명의 대군을 주었다. 두 장군은 1년이 넘는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귀국했다. 그러자 한 무제는 좌장군 순체는 사형시킨 후 시신을 조리돌리는 기시(棄市)형(棄市刑, 목을 자르고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형)을 내렸고, 누선장군 양복도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막대한 속전(贖錢)을 바치자 목숨은 살려주되 귀족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위산(衛山)은 고조선과 강화협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이미 사형 당했으며, 제남(濟南)태수 공손수(公孫遂)도 마음대로 군사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형 당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마천의 이 기록을 보더라도, 결코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닌 패전인 것이다. 사마천(BCE 145년~ BCE 86년)은 이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내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이 있었다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쳤고 한국인은 이것을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다녔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BC 156년~ BC 87년)의 사관史官 사마천의 불의
한중 고대사를 날조한 기록상의 첫 인물은 2,100년 전 한나라 때의 사관史官인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동북아의 한민족 강토로 쳐들어간 한무제가 전쟁에 참패하고 돌아온 시기에, <사기史記>를 저술하였다.
 
 
 
중국인들의 역사 기록법
공자가 노나라 24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여 <춘추春秋>로 이름 지었는데, 이 책은 주나라 왕실을 종주로 삼는 대일통大一統 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그 후 중국 사서들은 이 <춘추>를 역사 서술의 표준으로 삼게 되었는데, 중국 사서의 편찬 원칙은 다음 세 가지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요약된다.
 
첫째, 중국에 영광스런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런 일은 감추고(爲國諱恥)
둘째,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尊華攘夷)
셋째,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祥內略外)
 
춘추필법은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필법이다.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들의 잘못된 춘추필법을 지적한 것은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그는 [조선사연구초]<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에서 중국 역사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사마천을 “공자 춘추의 존화양이, 상내약외, 위국휘치 등의 주의를 굳게 지키던 완유頑儒”라고 혹평하였다.
 
 
 
사마천이 조작한 기자조선(箕子朝鮮)
중국 역사서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예濊, 맥貊, 발發, 숙신肅愼, 우이嵎夷, 내이箂夷, 견이畎夷, 서이徐夷, 고죽孤竹, 고이高夷 등과 같은 고조선의 제후국 이름들이 등장한다. 다른 호칭을 써서 조선이라는 국가 이름 자체를 철저하게 제거한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본기本紀>에서 조선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제후국의 역사를 다룬 <세가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 이라 하여 갑자기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썼다.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중국 사가들은 조선 역사가 약 3,100년 전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것으로 정의한다.
 
《상서대전(尙書大典)》과 <사기史記> 등에서 전하는 기자조선의 내력은 이러하다. 주나라의 건국자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 주었다. 이때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떠나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무왕이 그를 조선 왕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제후로 봉해진 이후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상서대전>은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나라를 찾아가 무왕에게 홍범구주에 대해 설명하였다고 한다.
 
반면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았지만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而不臣也)’라고 기록하였다. ‘기자를 제후로 임명했다’는 말 바로 다음에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인데도 그와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기자가 무왕의 신하였던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사마천이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진실을 고백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자箕子라는 인물이 조선 왕으로 봉해진 역사적 사실은 전혀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떠나버렸다(走之朝鮮)’는 구절이다. 이것은 동방 땅에 그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천명하는 내용이다.
 
기자가 망해 버린 고국을 떠나 이웃나라 단군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내세워 단군조선을 숨기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기자조선은 한민족사를 그 출발부터 중국사에 예속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자箕子비간比干, 미자微子와 더불어 당시 상나라의 삼현三賢이었다. 비간은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에게 정치를 간하다가 사형되었고, 미자는 비간의 죽음을 보고 멀리 도망쳤다.
 
기자箕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 감금되었다.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중국이 날조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한민족사의 뿌리로 여기고 기자箕子를 은인恩人으로 받들었다. 기자는 고조선 서쪽 변두리를 맴돌았을 뿐 한반도 지역으로 넘어 온 적이 없건만,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그대 나라에 기자箕子의 묘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箕子墓)와 기자 사당을 만들었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들을 기자(箕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기자 정전터와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다.
 
기자 정전터는 고구려시대 도시 구획 흔적이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조각만 나왔다. 기자箕子에 대한 진실은 그는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단군조선(번조선)의 국경지역인 산서성 太原으로 이주하였다. 망명지 단군조선 땅에서 6년 정도 살다가가 고향 서화(지금의 하남성 서화현)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 당나라 때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은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고 썼다.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연결 고리 북부여北扶餘
단군조선(BC 2333~ BC 238)을 북부여(BC 239~ BC 58)가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 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삼성기」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北扶餘記」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北扶餘記)」상에 해모수 단군에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BCE 108 ~ BCE 60)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이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고대사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날조한 기록상의 첫 번째 인물인 2100년 전, 한나라 무제(BCE 141~BCE 87) 때의 사관, 사마천(司馬 遷, BC 145년~ BC 86년)은 중국 25사의 첫머리인 [사기(史記)]를 편찬했다.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전에 방영했던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BC 239 ~ BC195)와 주몽(BC58 ~ BC19)은 무려 13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BC59~BC58)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BC 239~ BC 58)는 47세 고열가 단군조선(BC 295~ BC 238)과 고구려(BC 58 ~ AD 668)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한무제를 물리친 후 고두막한高豆莫汗은 졸본에 나라를 열어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고 칭하였다. 이는 ‘동방 신교의 대광명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졸본부여를 동명부여라고도 한다. 바로 동명왕이 고두막한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 다 왜곡되어 지금은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가르치고 있다.
 
북부여의 4세 단군 고우루(해우루, BC120~ BC87)가 돌아가시고 아우 해부루가 즉위하자 고두막한은 해부루를 동쪽으로 보내고 5세 단군(BCE 108~ BCE 60)으로 등극을 했다. 이로써 북부여의 후기 시대[後北夫餘]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6세 고무서 단군(BCE 59 ~ BCE 58) 때에 이르러 북부여는 막을 내린다. 한편 왕위에서 밀려난 해부루 단군은 국상 아란불과 함께 우수리강 지역의 가섭원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을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라고 하며, 금와와 대소로 왕통이 이어졌다.
 
 
 
그러면 세상에서 동명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고주몽은 어떤 인물인가? 그분은 고구려의 창업 시조이다. 원래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고무서(BCE 59 ~ BCE 58)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북부여의 BCE 58년에 7세 단군이 되었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변경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668년에 망했다고 배워왔다. 그러니 고구려 역사는 기껏해야 700년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신라의 고운 최치원의 글을 보면, ‘중국에서도 고구려 역사를 900년으로 알고 있더라’고 했다. 광개토태황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還至十七世孫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17세世를 내려와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십팔 세(391년)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이라 하셨다. 고구려왕 계보에 따르면, 1세 고주몽 이래 광개토열제는 19세인데 왜 비문에는 17세손이라고 나오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를 봐야 한다.
 
至癸亥春正月하야 高鄒牟가 亦以天帝之子로 繼北夫餘而興하사 復檀君舊章하시고 祠解慕漱하爲太祖하시고 始建元하사 爲多勿하시니... 계해(BCD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주몽이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시니... <삼성기 상>
 
 
고주몽은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를 올리며 고구려를 건국한다. 따라서 고구려인들은 고구려의 기원을 해모수로부터 잡고 있는 것이다. 북부여 해모수의 건국(BCE 239년)을 고구려의 기원으로 잡으면, 멸망 때(668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역년은 907년이 된다. 고구려가 해모수를 태조로 삼고 있기 때문에, ‘17세손’ 의 문제도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된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열제가 형제 상속 등을 빼고나면 고주몽의 13세손이라고 한다. 그럼 4세는 어디에서 찾는가? 4세는 해모수 단군과 고주몽의 관계에 있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 단군의 현손玄孫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해모수에서 고주몽까지 4세, 고주몽에서 광개토열제까지 13세, 이렇게 하여 해모수에서 광개토열제까지 17세를 전한 것이다. 고구려 역년 900년이나 광개토경평안호태황비문의 ‘17세손’으로 볼 때, 고구려인들은 북부여 창업자 해모수단군으로부터 그 기원을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신교의 삼신오제 사상은 한민족의역사와 문화를 움직여온 사상적 기반이었다. 신교가 밝히는 우주관의 핵심인 삼신오제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면 한민족의 국통 맥은 전혀 바로 잡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뿌리 문화를 취합하여 삼신 상제의 가르침을 통치 역사로 제도화시켰다. 이것이 중요하다. 먼저 교화시대인 배달국을 연 거발환 환웅이 백두산 신시에 나라를 처음 건설할 때 환국으로부터 받아내린 가르침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濟世理化), 광명이세(光明以世)다.
 
백성들을 다스려 진정한 하늘 백성으로 만드는 통치 이념을 배달국 환웅천황께서 처음으로 열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삼신의 질서, 삼신 상제의 창조 코드인 삼수(三數)를 통치원리로 하여 나라를 삼한으로 나눠 다스린 것이 조선, 정확히 말해서 단군조선이다. 이 조선을 후대의 한양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옛 조선, 고조선이라고 한다. 국통을 안다는 것은 우리 한민족사의 국통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요순시대의 중국천지가 9년 간 계속된 대홍수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동방 고조선의 천자 단군성조는 105세 되시던 갑술(BC 2267)년에 태자 부루를 중국 양자강 남방에 위치한 도산(塗山)에 보내 도산 회의를 주재하도록 하고 단군조선(古朝鮮)의 제후였던 순이 특파한 우(禹)에게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비법”을 전수케 하셨다.『吳越春秋』,『歷代神仙通鑑』

우禹가 세운 하나라(BCE 2205~BCE 1766)도 고조선에 예속되었다. 우는 아버지 곤이 치수에 실패하여 순임금에게 처형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치수사업을 맡아보던 관리(司空)였다. 순을 대신하여 참석한 도산회의에서 우는 고조선의 태자 부루에게서 오행치수법이 적힌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았다. 이 비법으로 홍수를 해결하고 인심을 얻어 나중에 순의 왕위를 물려받아 하나라를 열었다. 하나라는 마지막 군주 걸桀에 이르기까지 내내 고조선을 상국으로 모셨다.

 

환국 시대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천부경(天符經), 여기에는 우주론을 바탕에 깔고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일체관계에 대한 인성론의 문제가 담겨있고, 환국 다음에 배달국의 개창자 배달환웅이 열어주신 우리 한민족의 신관, 신학의 원전 삼일신고(三一神誥)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 재상 을파소를 통해 내려온 366가지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덕목을 기록한 참전계경(參佺戒經) 이것이 우리민족의 3대 소의경전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4천년, 5천년 전 용 상징 문화유물이 발굴 됐는데, 만리장성 북쪽 밖에서 자기들 용문화의 원형보다 몇천년 전에 그런 유물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놀라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할거냐? 이게 자신들 문명이 아닌데, 이걸 어떻게 해석할거냐? 이런 고민에 빠져서 결국 중국화하자 해서 바로 이것이 동북공정, 우리 민족 시원역사를 완전히 중국화 역사속으로 편입하는 것이다. 남의 나라 문화 역사 강탈 그 거대한 프로젝트가 바로 한 세대 전부터 시작된 동북공정이다.

 

중국의 현지 역사 유물로 들어가 보면 중국은 남부가 보통 신석기 8천년까지 나오는데, 북부는 9천년 전 우리 옛 조상들이 살았던 환국 배달국의 문화 유적이 나오고 있다. 지금 소하서 유적지를 보면 최초의 신석기 문화 유적지가 나오는데 여기는 9천년 전에서 8천5백년 전 유적지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흥륭와 문화를 보면 8천2백년에서 7천2백년 시간대인데 여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옥결이 나오고 있다. 또 집단 거주지가 나오고 이것이 우리나라 강원도 고성이라던지 바로 한반도 남부 여수 안도리 신석기 유적지까지 연결이 되어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아리아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4.20 감사합니다.
  • 작성자신심도(信心道) 147 | 작성시간 15.04.20 관세음보살 ()()()
  • 답댓글 작성자아리아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4.20 감사합니다.
  • 작성자도행(147-3큰절소식방지기) | 작성시간 15.04.20 감사합니다~~~참 좋은 인연에 감사드립니다~~~관세음보살()()()
  • 답댓글 작성자아리아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4.20 고맙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