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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교 문화]석굴암불상 백호(보석)에 대해...

작성자혜일심(135기)|작성시간09.05.26|조회수240 목록 댓글 15

 

 

 

석굴암불상 백호(보석)에 대해...

 

석굴암은 원래 석불사(石佛寺)라는 이름의 독립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암 대신 석굴암(石窟庵)으로 불렀다.

 

일본인 한학자 오쿠다 테이가 1920년에 펴낸 '신라구도 경주지'에는 석굴암 불상의 백호에 관해 짤막하나마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석존의 백호는 지금은 탈락되어 없으나 오래도록 매몰되어 땅속에 있었던 것을 최근의 수선 때에 토사 중에서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총독부의 박물관에 있다고도 하고 혹은 전혀 행방불명이라고도 이르는데, 원래는 동해의 떠오르는 햇살이 새벽의 운무를 떨치고 만경창파에서 떠올라 훤하고 또렷하게 광명이 훨훨 타오르면 곧바로 굴내에 들어와서는 석존의 이마 위 백호에 반사되어 참으로 있기 어려운 대금광명을 발사하며 수정(水晶)의 이면(裏面)에는 황금을 붙여놓았다고 이르는데, 애써 수선을 하면서 예전과 같이 되지 못함이 애석하다.”

여기에서 ‘수선’이라고 하는 것은 1913년부터 1915년까지 조선총독부가 벌인 석굴암해체수리공사를 말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백호의 행방은 잘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그 정체만은 ‘수정’이었다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불상의 백호는 보석으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대개 수정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던가 짐작할 수 있다. 가령, 충남 논산에 있는 은진미륵의 경우에도 애당초 수정 백호를 사용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현대식의 불상제작에 있어서는 수정뿐만 아니라 형편에 따라서 고급유리 또는 청동판을 사용하기도 하며, 그냥 그 자리에 오목하게 둥근 자리만 남기거나 볼록하게 조각하는 것으로 백호의 흔적을 만드는 수도 있다고 알려진다.

아무튼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로도 한동안 석굴암 불상의 백호가 있던 자리는 그냥 비어있는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이 자리에 백호가 복원된 것은 1966년 8월의 일이었다. 그 당시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지름 4㎝와 두께 0.7㎝ 크기로 국내산 수정을 깎아 뒷면에 순금판을 받쳐 만든 것을 재설치하였으니, 이것이 곧 현존하는 석굴암 본존불상의 백호이다.

 

 

다른기사)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본존불의 이마 한가운데를 둥글게 파내고 백호(白虎 : 성인의 32가지 상호 중 하나)를 박았는데 이것을 다면체로 깎아 햇빛을 반사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존 카터 코벨은 "제일 앞에 있는 좌우 첫번째 감실 두 곳에 놓여진 불상도 본존불처럼 이마에 백호 구슬을 지니고 있었다.(일본인이 반출한 것을 뜻함) 동트는 새벽의 첫번째 빛이 석굴암 입구와 그 위에 달린 광창을 통해 본존불 이마의 백호에 와 닿고 반사된 빛은 두 보살상의 백호를 향해 내쏘고 거기서 다시 한번 굴절되어 나온 빛은 본존불 후변에 있는 11면 관세음상의 이마에 비쳐진다. 한마디로 새벽의 짧은 한순간에 석굴암 내부의 조명 효과를 극적으로 제고한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일본인들이 반출한 감실 내의 두 보살상과 본존불 이마의 백호가 다시 원위치에 선다면 이런 효과를 재현할 수 있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석굴암에는 다음과 같은 불상이 있었다.

본존불(本尊佛) : 1구
인왕상(仁王像) : 2구
천부상(天部像) : 2구
나한상(羅漢像) : 10구
팔부신장(八部神將) : 8구
사천왕상(四天王像) : 4구
보살상(菩薩像) : 3구
감실 좌상(龕室坐像) : 10구

석굴암에는 본존불을 포함하여 모두 40구의 불상이 있었지만 제일 앞에 있는 좌우 첫번째 감실 두 곳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반출되었기 때문에 불상이 놓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현재 석굴암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은 도합 38구이다.

본존불과 상부 멍에돌이 있는 궁륭 모습.

 

일본 위키피디아 설명 :

 

석굴암(한글:, 속크람, 일본 읽기:석굴 팥고물)은, 대한민국 경주시의 교외에 있는 불교 유적.한국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걸작품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세계 유산(문화유산)에 등록.또 대한민국의 국보 제 24호로서 지정되어 있다.

 

토함산의 산기슭에 있다.

바위굴은, 화강암을 조합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있다.내부 구조는, 입구에서 전실·비도·주실의 3개로 나누어져 있다.전실은 본존이 동쪽향을 향하도록(듯이) 설계되고 있다.(동지에 일이 오를 방향과 일치) 가장 안쪽의 주실에 본존인 여래좌상(본존의 그림모양은, 항마 시게미치의 석가 여래를 기원으로 하지만, 통일 신라에서는 아미타 여래로서 신앙되는 예가 많다)이 설치되어 있다.주실은 돔형의 형상, 전실·비도는 직방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화강암을 쌓아 올린 후, 흙을 씌울 수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화강암의 벽에는, 보살상이나 사천왕상등의 돌부처가 파고.비도의 입구 양측으로 히토시왕상이 조각해지고 있다.전실의 팔부중 및 히토시왕상은 증축 시에 추가된 것이다.

본존은, 높이 3.4 m의 여래좌상이다.여래좌상의 액에는, 유리가 파묻히고 있다.동쪽에서 오르는 태양에 의해 바위굴내에 햇볕이 들어 오면, 액의 유리가 빛나는 설계가 되어 있다

 

신라의 경덕왕의 시대, 재상 금 오오시로(킴데손)에 의해 751년경, 건립되었다.「삼국유사」에는 금 오오시로가 전생에서의 부모를 위해서 건립했다고 기술되고 있지만, 실제는 김씨 왕족에 의한 국가적인 축조인 가능성이 높다.당시는, 바위굴절로 불리고 있던 것 같다.

유교가 침투해, 불교가 쓸모없게 되어 오면 방폐된 것 같다.

1909년, 비를 피하는 장소를 찾고 있던 우편배달인에 의해서 우연히 재발견되었다. 1913년부터 3회에 건너, 일본이 대규모 수복 공사를 한다.그러나 무계획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건립 당시의 석상의 배치를 모르게 되어 버렸다.바위굴의 주위에는, 배치하는 장소가 모르게 되어 버린 석재가 방치된 채로 있다.또 콘크리트로 보수되었기 때문에 바위굴 내부에 증기가 깃들이게 되어 버렸다.

2004년 현재, 입구가 유리판으로 덮여 실내의 습도가 항상 컨트롤 되고 있다.이 때문에 일반의 견학자는, 바위굴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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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석불암을 석굴암으로 일본이 붙인 이름인줄은...ㄷㄷㄷ

증언에따르면...석굴암백호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있을것으로 추정하는듯하네여...고로 지금은 일본에 있겠군여~

일본애들이 석굴암 통채로 가져가려고 해체작업하다가,,,

결국 오늘날 과학적인 석굴암이 틀어져서 습기차서 제가 오래전가보니까...유리관으로 막혀있던데...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군요...

암튼 일본애들은 우리의 일생일대의 주적이 확실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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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법운(112) | 작성시간 09.05.30 관세음보살()()()
  • 답댓글 작성자반야심(칠4) | 작성시간 09.07.17 관세음보살()()()
  • 작성자화심(97) | 작성시간 09.05.30 관세음보살()()()
  • 답댓글 작성자반야심(칠4) | 작성시간 09.07.17 관세음보살()()()
  • 작성자반야심(칠4) | 작성시간 09.07.17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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