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 예고(마태복음 16:21~28)를 알려 주신 후 6일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2절에 보면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옷은 빛처럼 하얗게 되었습니다.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은 하늘에 있는 천사처럼 하늘의 존재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최후 심판 이후 하늘의 존재로 변형될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납니다. 마태복음 13:43절을 보면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말씀합니다. 마테복음 28:3절을 보면 천사는 번개처럼 빛났고 천사의 옷은 눈처럼 희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 직전에 수난을 예고하셨는데, 천상의 존재로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은 파루시아의 영광(마태복음 16:27)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3절에 보면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구약과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대표적으로 하늘에 거주하는 자들입니다. 유대 전통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죽음을 맛보지 않은 자들로 믿어졌습니다. 모세는 하늘의 존재로 생각되었고, 엘리야는 하늘에 승천한 인물입니다.
결국 천상(하늘)의 존재인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하늘에 속한 예수님의 지위를 알려 줄 뿐만 아니라 메시아로서 해야 할 역할을 암시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자기 백성에게 배척(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서 고난을 받아 죽임까지 당하지만 부활과 승천으로 신원 받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의 모습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미래에 얻을 모습, 곧 하늘의 상입니다.
4절을 보면 이 모습을 다 지켜본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세 개의 천막(스케테)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이 텐트는 산에서 임시로 만들 수 있는 시설물로 태양을 막아 주는 정도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스케네”(천막)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가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베드로의 의도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베드로의 제안을 무시하고 음성을 보냅니다. 5절을 보면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또한 빛난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쉐키나)을 보여주는 매체입니다(에스겔 1:4). 그러므로 구름 속에서 들린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며, 이 음성은 초자연적인 계시로서 하늘의 뜻을 알립니다.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하늘의 음성은 예수님의 정체를 계시합니다. 변모된 예수님은 천상의 존재이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늘의 음성은 제자들에게 “그를 들어라”라고 명령합니다. 무엇을 들으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고난과 부활의 인자-종이십니다.
6절을 보면 제자들은 하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려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십니다. 7절을 보면 제자들이 봤던 천상의 영광스런 모습의 예수님이 지금 그들과 함께합니다. 결국 하늘의 존재인 예수님은 지금 그들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입니다.
8절을 보면 제자들이 위를 쳐다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고 구름도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마태는 예수님이 홀로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왜 예수님은 홀로 그대로 있습니까? 천상의 존재인 모세도 엘리야도 떠났는데, 그래서 보이지 않는데, 왜 예수님은 홀로 남았습니까? 왜냐하면 하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얻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일이 예수님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변형된 모습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가는 인자-종으로서 제자들과 함께하십니다.
변화산 사건, 즉 변모 사건은 예수님의 정체와 운명을 계시함으로써 제자들(교회)이 아들의 말에 순종할 것을 강조합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한 예수님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예견합니다. 영광스럽게 변형된 예수님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자기의 백성에게 배척을 당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서 하늘에 올라가는 영광을 얻었듯이, 인자이신 예수님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궁극적인 운명도 그렇게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동시에 아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길도 자신들의 삶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난의 삶은 누구나 회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철저하게 고난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럴 때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승리하시고 영광을 취한 것처럼, 우리 역시 그 고난의 길, 아들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고난을 지나서 영광이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영광이요 복되고 은혜로운 길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고난을 영광의 사건으로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 고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과 구원의 계획을 드러내는 “영광의 사건”으로 제시됩니다. 특히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예수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으실 때”라고 말씀하시며, 고난이 영광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2:28~29절을 보면 예수님은 죽음을 “영광”으로 보시며, 죽음이 영광을 가져온다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고난은 영광의 시작이며 계속입니다. 고난의 길은 홀로의 길입니다. 하지만 영광 받으신 예수님이같이 하는 길이요 동행하는 길입니다. 아들의 길이 우리의 길이요 교회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