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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묵상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라(마태복음 18:21~35)

작성자주의 은혜|작성시간26.06.13|조회수34 목록 댓글 0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랍비들은 세 번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세 번 용서해 주신 것도 대단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랍비의 표준인 세 번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합니다. 3×2+1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해석하거늘 숫자는 세라는 것이 아니고 한없이 무한정 용서하는 거라고 합니다. 물론 주님이 숫자를 세면서 90번 용서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 쉽게 무한정, 끝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해석하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왜입니까?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이구나! 그러나 실제로는 불가능한 거야! 라고 치부하고 고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끝없이 용서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왜 사용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용한 숫자 일흔 번씩 일곱 번을 구약과 신약 전체 문맥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창세기 4:24절에 나오는 라멕의 노래를 주님이 염두에 두신 것이 분명합니다. “가인을 위하여서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서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가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고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일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손인 라멕은 자기의 아내들에게 가인을 죽이면은 일곱 배 보복을 당하지만, 나는 상처만 당해도 77번 보복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살인이 아닌 상처만 내도 77배로 복수하려는 라멕의 후손이 사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77배나 복수하려는 미움과 증오의 노예가 된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유대교 랍비처럼 세 번 용서하면 되는가? 베드로가 제안한 대로 일곱 번 용서하면 77배로 복수하려는 세상의 광기를 용서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세상 복수의 수준을 압도적으로 상회하지 않고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한 일흔일곱 번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점층법이 있습니다. 가인의 7, 라멕의 77, 예수님의 일흔 번씩 일곱 배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을 죽이면은 벌이 7배이지만, 라멕은 상처만 내도 77배나 더 갚겠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7770+7로서 770이라는 숫자를 사용해서 덧셈법으로 보복하겠다고 라멕이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이런 라멕 보복의 법칙을 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은 덧셈으로는 라멕의 법칙을 이길 수 없고, 그래서 곱셈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70+7이 아니라 70×7이어야 합니다. 77번 보복하면 몇 번 더해서 몇 번 용서하는 것은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확실히 이기는 것은 곱셈입니다. 곱셈의 용서만이 덧셈의 보복을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한 최상의 표준 일흔 번씩 일곱 번 표준을 낮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목표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대결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라 누가 많이 용서하는가? 라는 용서의 대결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왜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기 위해 비유를 하나 듭니다. 비유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탕감해 주었는데,그 종이 백 데나리온 빚 진 동료의 빚을 탕감하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일 달란트가 육천 데나리온인데, 일만 달란트니까 육천만 데나리온입니다. 일 데나리온은 예수님 당시 성인 노동자의 하루 일당입니다. 일당을 십만 원으로 본다면 육 조원입니다. 육천만 데나리온을 일당으로 갚으려면 164,384년을 일해야 합니다. 왕이 네 몸과 네 처와 네 자식과 네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빚을 지었기에 아무리 일하고 팔아봤자 못 갚습니다. 예수님 당시 노예 시장에서 노예 한 명의 몸값이 500~2.000데나리온입니다. 현대로 계산하면 5,000~2억 원 됩니다.

 

  이 종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엎드려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종이 엎드려서 긍휼을 구했는데,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서 놓아 보내며 자유롭게 해 주며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밖으로 나가서 동료 하나를 만났는데, 일백 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인데, 빚을 갚으라고 목을 조르고 끝내는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100일 간의 일당이니까 오늘날 3개월 치의 봉급이 되기 때문에 물론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일만 달란트에 비해 보면 1/60만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이것의 1/60만 밖에 되지 않는 다른 사람의 작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현실 세계에서 가능한 일인가? 우리 주위에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이 과격한 비유를 들었을까? 이런 과격함이 주님의 의도입니다. 그러니까 용서와 관련해서는 너희들이 하는 모습이 60만의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60만밖에 안 되는 작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 예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16 만 년의 일당을 탕감받은 자가 100일 치 일당을 탕감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용서와 관련한 자화상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용서는 너무 힘든 것이고, 어떻게 보면 용서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일흔 번씩 나에게 한 형제가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죄를 지어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는 이 수행과 훈련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온전한 용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님은 강조한 것입니다.

 

  용서는 한 번의 결단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게 죄지은 사람을 지속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긴 과정입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심지어 정서적으로 용서에 이른다 해도 몸 자체가 용서에 이르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무엇보다 가까운 사람이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오늘 주님이 천국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나라 통치 방식은 용서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한 마디로 용서받는 죄인들의 모임이고, 그래서 용서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서로 용서하지 못하면 생명력을 잃고 질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문제가 무엇인가? 이 종은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 주었습니다. 풀어준 것입니다. 자유와 해방과 기쁨과 생명을 맛볼 수 있었지만, 1/60만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빚을 진 자의 빚을 탕감하지 못함으로 이 자유와 해방과 기쁨과 생명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28절을 보면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라고 합니다. “목을 잡다라는 단어는 원어가 푸니고인데 숨 막히게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목을 잡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에 세 번 쓰였는데 숨 막히다라는 의미인데,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 떨기나무에 뿌려진 씨앗이 가시가 자라면서 기운을 막았다고 표현하는데, 가시 때문에 이 씨앗이 자라는 기운을 막았다는 의미에서 한 번 쓰입니다. 다른 한 번은 더러운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가 돼지 떼가 비탈길로 내리 달려 바다에 빠져서 숨이 막혀 익사했다는 모습을 묘사할 때 쓰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단순히 목을 잡은 것이 아니라 목을 확 세게 잡아 거의 질식하게 만드는 상태로 난리를 친 것입니다. 빚진 동료를 붙잡고 목을 졸라 숨 막히게 하면서 빚을 갚으라고 아우성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았으면 자유와 해방과 기쁨과 생명을 누려야 하는데, 1/60만 빚을 갚은 자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음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몸에 열이 나고 소화가 안 되고 분노가 쌓여서 상대방의 목을 잡아서 기운을 막아 버리고 질식시킵니다. 다른 사람의 기운을 막으면 안 됩니다. 숨 막히게 하면 안 됩니다. 주변 동료들을 죽이면 안 됩니다.

 

  주변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는 딱하게 여겨라고 했는데, “딱하게 여기다라는 말은 심각한 고통을 느끼다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주변 동료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기 때문에 그 주님이 주신 죄 용서함에 자유와 해방과 기쁨과 생명력을 가지고 용서의 정신을 가지고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삶의 용기를 북돋워 주고 영적인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합니다.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 전제 조건으로 보이는가? 그렇지만 본문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시각과 종말론적인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함으로 빚을 탕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빚 탕감을 받았습니다.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이미 무조건적인 긍휼로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고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받은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작은 빚을 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목을 잡고 질식하게 하고 옥에 가둔다면 그 사람은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에게 이와 같이 행하리라라는 말은 미래의 시제입니다. 마지막 종말의 일만 달란트 빚 탕감받고 살면서 1/60만의 일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이 오시는 마지막 날에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6:27절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라고 합니다. 마지막 심판의 특징은 용서가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의 특징은 공정한 응보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 앞 19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풀리리라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뤼오라는 단어인데, 좀 전에 종의 주인이 빚을 탕감하고 놓아 보내주었다고 하는데, “아포뤼오단어를 사용하는데, 하나는 뤼오”+“아포가 붙은 아포뤼오로서 같은 어근의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면 풀린 상태에서 다른 사람도 풀어주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고 매어 놓으니까, 하늘에서도 매이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합니다.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모진 십자가의 고통, 죽음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용서해 달라고, 아니 용서해 줌으로 풀면, 하나님께 하늘에서도 풀어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우리를 화해자로, 공동체를 용서의 공동체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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