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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 권태--이상

작성자동선|작성시간11.07.31|조회수687 목록 댓글 1

권태 - 이상 
  


  어서 -차라리- 어두워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僻村)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東)에 팔봉산(八峯山),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고?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농가(農家)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댑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검둥이.
해는 백도(百度)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 쪼인다. 아침이나 저녁녘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서(炎暑)가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記事)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나는 최 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 보다. 최서방의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 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시나 지난 후니까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최서방네 조카를 깨워 가지고 장기를 한 판 벌이기로 한다.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강기 두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지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나았지 - 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이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최 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 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思想)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는 그저 얼른 끝을 내어 져 줄 만큼 져 주면 상승 장군(常勝將軍)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재물에 가 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 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이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 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 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자세한 승부(勝負)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 이욕(人間利慾)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神經)마져 버리고 완전히 허탈(虛脫)해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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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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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주 | 작성시간 11.08.01 일어나는 마음은 천마요
    일어나지 않는 마음은 음마이며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않는 마음은 번뇌마이다..
    우리 正法중엔 이런 일이 없다..대주 혜해스님()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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