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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1) 인도인은 붓다를 왜 ‘여래’라고 부르나

작성자나비(교찬)|작성시간26.06.09|조회수3 목록 댓글 0

(21) 인도인은 붓다를 왜 ‘여래’라고 부르나

마침내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성취했다. 

그는 29세 때 카필라 왕궁을 떠나 출가했다.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6년간 고행도 했다. 

죽음 직전까지도 갔으나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다. 

나와 진리. 

그 사이를 가로막는 담벼락을 허물고, 

그는 우주와 하나가 됐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됐다. 

그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인도에서는 깨달은 이를

 ‘붓다’ 혹은 ‘타타가타(Tathagata)’라고 부른다. 

‘타타가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진리로 간 분’ 혹은 ‘진리에서 온 분’이란 뜻이다. 

한자로 옮기면 ‘여래(如來)’다. 

‘여거(如去)’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이와 같이 오고, 이와 같이 간 사람이다. 

기독교 신약성경인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표현한다. 

불교의 ‘타타가타’에도 그런 뉘앙스가 강하게 담겨 있다.

불교는 말한다. 

“2500년 전에 인도에서 태어난 싯다르타는 붓다가 됐다. 

그런 깨달음은 비단 싯다르타에게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세상은 이미 진리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의 내면도 마찬가지다. 

다만 나의 에고가 강한 담벼락이 되어, 

나와 진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담벼락만 허물면 된다. 

그럼 깨닫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본래 부처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불교는 긍정한다. 

모든 이가 부처가 될 수 있고, 모든 이가 여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힘을 내라고 건네는 위로가 아니다. 

깨달은 눈으로 봤더니 실제 그렇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스스로 붓다임을 깨칠 수 있는 온전한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은 50%도, 80%도, 90%도 아니다. 100%다. 

그런 완벽한 가능성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이미 깃들어 있다.


<날이 갈수록 인도 불교 성지에 대한 인도 정부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인도 학생들의 불교 성지 견학도 부쩍 늘었다.> 백성호 기자

그런데 왜 쉽지 않을까. 

숱한 출가자들이 선방에서 두문불출하며 치열하게 수행하는데도, 

왜 깨달음의 소식은 드물기만 한 걸까. 

모두가 부처라고 말하는데, 

왜 부처가 된 이를 만나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 걸까. 

붓다는 그게 ‘착(着)’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게 좋아, 이게 옳아, 저건 틀렸어, 저건 싫어라고 단정짓는 잣대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그 잣대를 강하게 틀어쥔다. 

그게 착(着)이다. 고집이고, 집착이고, 아집이다.

우리는 왜 그걸 내려놓지 못하는 걸까. 

이유가 있다. 

그걸 내려놓는 순간,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런 착(着)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에고’라는 큰 성(城)을 만든다. 

그 성이 굳건하면 굳건할수록 내가 잘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착을 내려놓는 일은, 그 성에서 벽돌을 하나씩 빼는 일이다.

그래서 두려워한다. 

그렇게 벽돌을 빼고, 빼고, 또 빼다가 

에고의 성(城)이 우르르 무너질까 봐 겁을 낸다. 

불교는 바로 그 지점에서 달리 말한다. 

“한 발 더 나아가라!” 

백척 높이의 장대 끝에서 허공을 향해 한 발 더 내디디라고 말한다. 

에고의 성이 무너지게끔 한 발 더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게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다.

그럼 불교의 수행은 실제 벽돌을 하나씩 빼는 일일까. 

아니다. 

그건 하나의 비유다. 

불교의 깨달음은 그 벽돌이 본래 비어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눈에 빤히 보이고, 

손으로 분명히 만져지는 그 벽돌이 허공의 벽돌임을 깨닫는 일이다. 

그걸 아는 순간, 성은 스스로 몸을 비운다. 

그걸 “에고의 성이 무너진다”고 표현할 뿐이다.

기독교에도 그런 표현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 

 

불교의 수도자도 깨달음의 문턱을 넘어갈 때 깨닫는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우주가 산다는 걸 말이다. 

불교 역사에서 많은 선지식이 그렇게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을 노래했다. 

그게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다.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

 

 



짧은 명상

인도의 달마 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
선(禪)불교를
처음 전했습니다.

달마가 초조(初祖),
달마의 제자인
혜가 선사가 이조(二祖),
혜가의 제자인
승찬 선사가 삼조(三祖)입니다.


삼조 승찬 선사가 남긴
유명한 선시집(禪詩集)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신심명(信心銘)』입니다.
불교 시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책입니다.

『신심명』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우리말로 풀면
이런 뜻입니다.

  ‘다만 미움과 사랑을 그치면
   명백하고 당연히 통하리라.’

승찬 선사가
노래한
깨달음의 게송도
붓다의 가르침,
예수의 메시지와
그대로 통합니다.

에고가 세운
고집의 잣대로 인해
이쪽은 밉고,
저쪽은 사랑하게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딱 이랬습니다.

승찬 선사는
이걸
그치라고 말합니다.

미움만 그치고
사랑은 그냥 두라고
하지 않습니다.
미움과 사랑을
모두 그치라고
말합니다.


그걸 그치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둘을 나누는
잣대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걸 “양변을 여읜다”고
표현합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걸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하나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 있는
고집의 잣대가 무너질 때
진리가 드러납니다.

승찬 선사는
그렇게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을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통할 통,
그러할 연.

그렇게
이치와 통하고 통해서
자연스레
명쾌하고 밝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불교와 기독교는
종교가 다르고,
표현 양식도 다르고,
종교적 문법도 다르지만
인류를 향한
가르침의 뼈대는
서로 통합니다.

다만,
내 종교를 모르는 만큼
상대방 종교도 몰라서
오해와 편견이
커지는 것이지요.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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