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붓다의 깨달음과 양자물리학, 서로 통하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 자리에서 바로 일어서지 않았다.
궁리의 시간을 가졌다.
자신이 어떻게 깨달았으며, 무엇을 깨달았는지 다시 돌아보았다.
바둑으로 치자면 일종의 복기(復棋)다.
아름드리 보리수 근처에 있던
일곱 그루의 나무 아래로 가서 각각 7일씩을 보냈다.
그렇게 49일간
자신이 문을 열고 들어선 깨달음의 세계에서 다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았다.
#양자물리학의 이치, 붓다의 깨달음과 통해
그렇게 돌아보아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깨달음 말이다.
『반야심경』에서는 붓다의 깨달음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눈에 빤히 보이고,
손으로 분명히 만져지고,
마음으로 뚜렷이 느껴지는 것들이 비어 있다고 말한다.
그게 ‘색즉시공’이다.
그러니 쉽지 않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구축된 눈.
그 눈이 뒤집어진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란 세계가 뒤집어 진다.
색(色)이 공(空)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거기가 끝이 아니다.
그렇게 비어버린 공(空)이 색(色)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이 세상은 있으면서, 동시에 비어 있다.
뒤집어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비어 있으면서, 동시에 드러난다.
붓다가 성취한 깨달음의 이치가 오묘하기 짝이 없다.
처음 이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당황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혹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현대물리학에서도
최첨단을 달리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과학적 이치와 2600년 전에 붓다가 설한 이치가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양자물리학의 이치와 불교의 이치는 서로 통한다.
이 세상과 우주의 본질을 찾아가는 길이 과학이다.
불교에는 그런 과학적 이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양자물리학이
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결정적 화두는 이렇다.
“입자인가, 아니면 파동인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구성하는 온갖 것들의 본질이
과연 손에 만져지는 덩어리인 입자인가, 아니면 에너지만 출렁이는 파동인가.
이런 물음을 던진다.
이 물음에 대한 답에 따라서 우주의 본질이 달라진다.
#비어 있음과 드러남의 오묘한 이치
그런데 붓다는 2600년 전에 이미 답을 내놓았다.
붓다는 오히려 양자물리학의 화두보다 더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왜 그럴까.
붓다의 눈에는
양자물리학의 입자도 색(色)이지만,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파동 역시 하나의 색(色)일 뿐이다.
붓다는 그러한 입자와 파동,
그러한 색(色)의 본질적 바탕이
다름 아닌 ‘비어 있음(空)’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온통 비어 있을 뿐인가.
아무 것도 없고, 의미도 없고, 몸통도 없고, 그저 허하기만 한 세상인가.
그게 아니다.
그러한 ‘텅 빔’이 입자로도 작용하고, 파동으로도 작용한다.
그래서 묘(妙)하다.
있음과 없음,
둘 중 하나만 볼 줄 알던 우리에게 붓다는 “둘을 동시에 보라!”고 말한다.
<보드가야 사원의 모습이다.
대탑 왼쪽에 아름드리 보리수가 보인다.
2600년 전 붓다가 그 아래 앉아서 깨달음을 성취했다.> 백성호 기자
왜 그럴까.
그럴 때 세상의 이치를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이다.
인도 사람들은 그걸 팔리어로
‘야탕부탕자나티(yathabhutamjanati)’라고 부른다.
이걸 동아시아의 한자어로 옮기면 ‘여실지견’이 된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안다는 뜻이다.
이치를, 진실된 이치를, 진리(眞理)를 말이다.
#깨달음의 이치…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
깨달음을 이룬 붓다는 고민했다.
“이 법은 깊고 미묘하다.
사람들에게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터이다.
오직 지혜 있는 사람만 알 수 있지, 어리석은 범부는 알기가 어렵다.
중생은 다들 자신의 소견에 매달린다.
그걸 고집한다.
그래서 이 깊고 묘한 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깨달음의 법을 말해주어도 오히려 번거롭게 생각할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의 이치를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
브라흐마 신이 나타났다고 경전에 기록돼 있다.
물론 비유적 표현이다.
붓다 내면의 생각을 비유로 설명한 대목이다.
브라흐마 신은 이렇게 말했다.
“아, 이제 세상은 망했다.
아! 이 세상은 무너지고 만다.
타타가타(여래)께서 침묵을 지키고 법을 설하지 않으시니,
세상이 망하고 마는구나.”
깨달음을 설할 생각이 없다는 붓다에게 브라흐마는 간청했다.
“중생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기는 어려우나,
과거 생에 선지식을 가까이해 덕을 쌓은 인연으로
큰 법을 알아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법을 내려 주십시오.”
결국 붓다는 마음을 돌렸다.
세상에는 어리석은 이도 있으나 지혜로운 이도 있다.
가르치기 어려운 이도 있으나 가르치기 쉬운 이도 있다.
붓다는 말했다.
“나는 이제 기꺼이 믿고 듣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법을 설할 것이다.”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