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익산에 보석 가공단지가 세워지게 된 이유
1970년대 전북 익산(이리시)에 대한민국 유일의 국가지정 귀금속·보석 가공단지인 ‘이리귀금속보석수출공업단지’가 세워진 데에는 당시 정부의 정책적 방향과 지역적 여건이 맞물린 몇 가지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정부의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수출 특화 산업 육성)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경제 성장을 위해 수출 중심의 중화학공업과 경공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보고 중 “벨기에는 작은 박스 하나에 다이아몬드를 넣어 1억 달러를 수출하는데, 우리나라는 고무신과 김을 아무리 팔아도 1억 달러가 안 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보석 가공업이 부하가치가 매우 높은 산업임을 알아챈 정부는 이를 수출 특화 산업으로 지정하고, 원석을 수입해 가공한 뒤 전량 수출하는 수출 전용 보세공단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2. 풍부하고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
보석 연마와 귀금속 세공은 기계화가 어렵고 사람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대표적인 노동집약적 정밀 산업입니다. 당시 호남 지역, 특히 익산 주변은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하면서도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은 젊은 노동력이 매우 풍부했습니다. 정부와 기업 입장에서 저렴한 임금으로 고부가가치 제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입니다.
3. 호남선의 요충지이자 뛰어난 교통 인프라
이리(익산)는 예로부터 호남선과 전라선, 군산선이 갈라지는 철도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공단 특성상 원석 수입과 가공품 수출을 위한 물류 수송이 원활해야 했는데, 이리는 전국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최고의 교통 허브였습니다. 또한 인근 군산항과의 접근성도 좋아 원자재 수입과 해외 수출에 매우 유리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 1976년 문을 연 익산 보석공단은 1980년대 말까지 세계 큐빅 지르코니아(인조 다이아몬드) 시장을 장악하는 등 대한민국 수출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며 익산을 ‘보석의 도시’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9년 이후 왕궁리유적에서 발굴된 ‘공방’으로 백제유적지구(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와 연관하여 익산에 보석박물관이 세워졌음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익산에 보석가공공단이 세워지게 될 때는 백제유적지구와 크게 연관할 수 없었음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