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지팡이
윤정란
눈 내리는 산마을 바람이 슬렁이고
허리 굽은 어미가 비탈에서 만났다는
길 잃은 어린 고라니 동구 밖에 서 있다
무너지는 하늘을 발목에다 매달고
어미를 찾고 있는 고라니 붉은 울음
강 건너 산으로 가는 골목길 다 젖는다
한줄기 햇살로나 먼 하늘 바라보던
어미는 환청 따라 비탈 밭에 가셨나
피맺힌 늙은 지팡이 문설주에 외롭다
소나기
이광
잊은 듯 살아가다 문득문득 너는 온다
우산 없이 나서던 길 비를 피해 선 처마 밑
까짓것 흠뻑 젖은 채 가던 길 마저 갈까
퍼붓는 빗속에서 젊은 날의 내가 있다
너에게 가려다가 걸음 멈춘 내가 있다
우산이 되어주지 못해 돌아서던 내가 있다
그 섬에 남아
이나영
천천히 무너지는 내일을 바라보며
파도에 소리를 묻어두고 남아있다
한 모금 햇살조차 없이
더 선명해진 새벽녘
나에게 열린 문은 하나도 없었다며
문간에 묵은 편지 걸어두고 삼킨 말들
한때는 나도 파도였다
누구에게 닿으려 했던
잠잠한 하루들이 달빛에 씻겨 잠들고
긴 밤은 배 두 척을 포구에 묶어 둔다
바다도 외로워질까
파도를 안고 산다
오리온자리
이남순
신기루를 꿈꿨기에 낙타는 출렁였다
갈수록 발자국이 멀어지는 오아시스
끝내는 무릎도 꺾고 악다구니 뱉었다
아무리 잡으려도 바람 손은 미끄러지고
지푸라기 한 가닥도 닿지 않는 사막길엔
가쁘게 뛰는 심장만 무서운 타전이다
어쩌면 싸락눈에 고요히 묻혔으리
곤고한 생의 기억 눈물로 씻기어서
가여운 등짐에 걸린 겨울 하늘 별자리
-《오늘의 시조》(2025 .하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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