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이정환
당신의 고요
당신의 평화
당신의 모든 것이 이냥 제 것이기에
서에서
동이 멀수록
금세 가까워집니다
꽃등
이종문
한나절 비운 사이 누가 나를 찾아왔나?
진분홍 꽃등 하나 처마 밑에 걸려 있다
꽃말이 '사랑'이라는 피튜니아 꽃등이다
꽃등 속 하얀 쪽지 글씨들이 깨알 같다
첩첩 산 첩첩 골로 나비 따라 찾아와서
못 뵙고 돌아갑니다, 다시 못 올 길입니다
누군지 궁금해도 알려고는 마시고요
제일로 기다린 그녀, 왔다 갔다 여기세요
첫사랑 그녀일 거라 착각해도 좋겠고요,
깨고 보니 한여름 밤 한바탕 꿈이었다
처마 밑엔 아내가 건 꽃등이 흔들렸다
그녀가 걸고 갔다고 막 우기고 싶은 꽃등!
빙폭
이토록
외발의 스승께서 지팡이로 후려친다
물비늘 활활 털고
뛰어내린 그 아래
제자는,
무릎을 꿇고 목청을 우려낸다
대명창 일대기가 흰 뼈로 들어찬다
맑은 피 토해내며
득음하는 물줄기들
그 문하,
얼음기둥이 절벽을 일으킨다
오카방고 델타*
- 때로는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이현정
1.
세상 모든 강물의 최종 꿈은 바다라지
바다에 닿지 못한 강은 죽음을 맞는다지
저기 저, 죽는 줄도 모르고
흘러가는 강이 있지
2.
바다로 가는 줄 알았어 막힌 줄도 모르고
이렇게 흐르다 보면 누구나 가는 줄 알았어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
이 길 끝에 바다는 없다고
3.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늪이었어
꿈도 뭣도 다 잃었지 겨우 눈을 떴을까
거기서 너를 만났어
어쩌면 죽어도 못 봤을!
* 아프리카 보츠나와에 있는 세계 최대 내륙 삼각주. 강물(오카방고강)이 대양으로 흐르지 못해 생긴 극히 희귀한 습지로, 세계적 멸종 위기 포유류의 고향이자 생명의 보고.
-《오늘의 시조》(2025 .하반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