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살 먹은 아이
임영석
반계리 은행나무* 천 살 먹은 아이처럼
천년 전 하던 짓을 아직도 못 버리고
가슴 속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위로는 하늘이고 아래로는 땅이지만
천년을 살다보니 사는 법을 배웠는지
노오란 은행잎들이 나비떼로 변한다
수많은 나비떼가 날아가는 그 모습은
황포돛대 펼치고서 떠가는 돛배처럼
해마다 가을이 되면 가을강을 건넌다
*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에 있는 천년기념물.
작은 구멍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다
- 굴댕이*
임영숙
굴속에서 신은 더욱 가까이 느껴진다
바람이 드나드는 어두운 텅 빈 동굴
틈틈이 쏟아낸 말들이
젖은 벽에 새겨있다
생명줄 완성해 낸 성벽의 푸른빛에
마주한 눈빛의 묵직한 존재들 틈
물방울 자란 종유석을
굴댕이가 물고 있다
숨과 바람 사이 쳐놓은 울타리
그 생 가득 안은 채 잠들지 않는
고요의 하늘 아래서
너에게로 닿는다
* 굴속에서 태어난 아이
선자령
임채성
겨울의 한복판에 서 보면 알게 되지
회리 치는 눈보라가 얼마나 칼날인지
햇살의 시린 온기도 알고 보면 상처란 걸
철없이 일떠서던 억새풀은 주저앉고
허풍선이 풍차도 벌벌 떠는 바람 언덕
구름도 이쯤에 와선 낯빛이 흐려진다
능선을 톺아 오르는 숨소리는 거칠어도
잎파랑이 색을 지운 천구의 축을 잡고
하얗게 꽃을 피우는 나무들의 비손 행렬
저 산맥은 어디쯤에서 걸음발을 멈출까
남북으로 길게 뻗은 조붓한 길을 따라
얼붙은 백두대간에 봄을 새로 그리고 싶다
고래 아내
임태진
술 취해 고래고래 소리친 적 많았었네
한 치 앞도 안 보여 막막했던 젊은 날
그 무슨 해방구인냥
불렀던 ‘고래사냥’
그렇게 잡고 싶던 어여쁜 고래 하나
오래전 어느 겨울 서귀포에서 잡았네
하늘이 나에게 주신
귀하디귀한 선물
평생 남편이지만 항상 내 편인 사람
나에게 잡혀 왔지만 이제는 나를 잡는
작지만 듬직한 여인
고래 같은 내 아내
-《오늘의 시조》(2025 .하반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