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꽃이 피어
정혜숙
희미한 허밍처럼, 먼 곳의 너처럼
저물녘에 번지는 그리웠던 꽃의 기억
새소리 문득 사라지고 사위가 고요하다
날개 상한 나비는 안식에 들었을까
위로처럼 다녀가는 다정한 바람 몇 올
하늘엔 시늉하는 눈썹달
한 줄 푸른 유언 같은…
고개를 갸웃한 채 꽃의 말 따라간다
꽃들의 읊조림은 나지막하고 맑아서
천천히 들키지 않게
잠행하는 밤이다
참새가 보리수를 떠나지 못한 것은
정황수
피죽바람 저 솔봉이
보리누름 오기 전에
구름길로 들고나던 꿈은 그예 흩어지고
얼떨결 움킨 달콤도
엉거주춤 떨궈버려
볼록거린 오목가슴
생게망게 맥을 놓아
자발없이 옮겨 앉은 가지마다 주름지고
빈 하늘 품은 바람도
부질없이 흘러버려
구아노
정희경
새들이 뱉어놓은
말들이 굳어 있다
시퍼란 바다에서
물고 온 섬의 체온
하얗게 멍이 든 파도
내려놓는 중이다
책꽂이를 옮기다
조경선
사람 사이 사람을 꽂고
사람 위에 사람을 놓아
비집고 들어간 곳 자리다툼 하는데
키 작은 무명 하나가 그렇게 견딘 계절
옮길 때마다 바뀐 자리
돋보이는 이름값들
그 틈새에 끼어서 살아남은 시집 한 권
내 손에 잡히지 않아 꿈으로만 꽂혀있다
두꺼운 사람이
맨 밑으로 가는 일과
흔해서 버려지는 위인을 떠올리며
나 먼저 비워야 한다 오래된 전설처럼
-《오늘의 시조》(2025 .하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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