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순례문학관 4
박희정
독백이 늘어났다, 낯선 곳이 정들기까지
아침부터 밤늦도록 소리를 재워놓고
감각은 모서리마다 물음표를 달았다
책들은 여름 내내 새 옷을 갈아입고
빈 땅은 젖었다 마르기를 자주 했다
온밤을 쓸고 닦던 생각, 비처럼 쏟아졌다
초록이 무성해지자 약속이나 한 듯이
스쳐간 생각들이 다투어 자라나고
한동안 놓쳐버린 실마리
꿈틀대며 내게 왔다
고요를 닮은
- 도솔암
박희정
침묵이 귀를 닫고 동안거에 들었을까
암자에 자라는 돌, 하늘과 맞닿아서
그대로 눈감아도 좋을 품속의 안식처 같은,
새소리 바람소리 동자童子로 지키고서
사방에 흩어진 생각 주렴처럼 펼친 곳
처마 밑 하늘이 물려 고요가 한 뼘 자란,
꽃의 완성
이경임
조화들, 덮개 없는 트럭에 실려간다
창백한 낯빛으로 흔들흔들 멀미한다
한평생 흔들리거나 떠밀리며 살았는데,
숨 멎어야 받아보는 한 다발 꽃무더기
그 오는 길조차도 요철을 견뎌야 한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 문턱 넘어야 한다
한 계절 붉디붉은 꽃으로도 피고 싶어
간곡한 저녁 빛에 민낯을 물들여봐도
굴곡진 어느 생애는 덜컹이며 지고 있다
표류하는 저녁
이경임
퉁퉁 불은 어둠이 식탁에 놓여 있다
한덩이 식은 마음 밀물에 적셔두면
저 창밖 항로를 끄는 달빛 잔해 내린다
속이 텅 빈 그림자 식탁 앞에 우두커니
더딘 수저질에 먼 길 가는 새의 울음
아무도 보내지 못하는 통증이 고여 있다
찬물에 말아놓은 저녁빛 혼자 남아
꿈속까지 밀려드는 기척을 울먹인다
현관에 벗어둔 슬픔 오래도록 한 켤레
-《정형시학》(2025 .겨울호), 5인의 에스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