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이나영
무엇도 말도 남지 않은
파도가 소리를 삼킨 곳에 나를 두었다
한 방울 말도 남지 않은
나의 폐허
나의 새벽
천천히 무너지는 내일을 바라보면
나를 향해 열린 문은 하나도 없었다
몇 겹의 침묵이 쌓이면
물결도 숨을 고를까
무릎을 접은 채로 내가 나를 껴안는다
검은 새가 어깨에 그림자를 두고 간다
낮보다 긴 저녁들이
나를 지키고 있다
축축이 젖은 나를 달빛이 일으킨다
불러도 대답 않고 등 돌린 건 너였다고
침묵의 날들을 태워
폐허를 한 겹씩 벗겨낸다
경청
이나영
당신을 만나기 전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한 사람을 믿는 것은
두 귀를 내어주는 일
온몸이 귀가 되어서
서로에게 번지는 일
약속도 필요 없는 우리가 되고 싶어
귓속말도 짚어가며 서로를 읽었더니
눈으로 들은 당신이
입속에 파고든다
이 봄이 우리에게 대답할 땐 함께 있자
어깨에 속삭이며 당신께 안겼을 때
손끝엔 벚꽃이 피었다
영영 여기 살자는 듯
파도의 효능
이나영
공백이 없는 말은
천천히 죽어가요
혼자라야 들리는 말
죽어봐야 살아나는 말
감췄던 말들을 모아
바다에 내던져요
입술을 비웠더니
속삭임이 들립니다
파도가 필 때마다
질문도 피어나요
독백이 한창입니다
한 뼘씩 자라나는
비밀을 즐기는 사이
가도 가도 바다예요
백지를 걷는 듯이
매일 더 솔직해져요
물결이 만든 착각을
기적이라 불러도 될까요
유속의 허기
이나영
가슴을 열어보니 소금이 가득 찼다
아무도 숨 가쁘게 살라한 적 없었는데
불행이 몰려올까봐
한없이 헤엄쳤다
오늘을 베어 물면 내일이 차올랐다
평면의 아침들이 밀어내는 물결 속에
잘 하고 싶던 마음들이
자진하며 흩어진다
너절한 아가미로 말랑한 꿈을 꾼다
꼬리를 흔들수록 영롱해진 물음들을
더 깊고 캄캄한 곳에
은밀하게 묻어두려고
세월
이나영
심장을 매만지며 세상을 알아간다
무너진 순간마다 주워서 두들기면
한층 더 거세진 박동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떠나고 없는 것은 그늘로 남아 있다
길어진 그늘들이 심장을 감싸안으며
굳세게, 또 굴러간다
모서리가 둥글어진다
- 객 동인지 4집『거울 속 히치하이킹』(2026, 고요아침)
ㅡ이나영ㅡ
1992년 대구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매일신문》신춘문예 등단. 문학나눔 도서 선정. 시집 『언제나 스탠바이』,『나의 파수꾼에게』. 산문집 『나를 향한 구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