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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 동인]]유속의 허기 외 4편 / 이나영

작성자안해나|작성시간26.06.06|조회수80 목록 댓글 0

 

이나영

 

 

무엇도 말도 남지 않은

파도가 소리를 삼킨 곳에 나를 두었다

 

한 방울 말도 남지 않은

나의 폐허

나의 새벽

 

천천히 무너지는 내일을 바라보면

나를 향해 열린 문은 하나도 없었다

 

몇 겹의 침묵이 쌓이면

물결도 숨을 고를까

 

무릎을 접은 채로 내가 나를 껴안는다

검은 새가 어깨에 그림자를 두고 간다

 

낮보다 긴 저녁들이

나를 지키고 있다

 

축축이 젖은 나를 달빛이 일으킨다

불러도 대답 않고 등 돌린 건 너였다고

 

침묵의 날들을 태워

폐허를 한 겹씩 벗겨낸다

 

 

 

경청

 

이나영

 

 

당신을 만나기 전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한 사람을 믿는 것은

두 귀를 내어주는 일

 

온몸이 귀가 되어서

서로에게 번지는 일

 

약속도 필요 없는 우리가 되고 싶어

 

귓속말도 짚어가며 서로를 읽었더니

 

눈으로 들은 당신이

입속에 파고든다

 

이 봄이 우리에게 대답할 땐 함께 있자

 

어깨에 속삭이며 당신께 안겼을 때

 

손끝엔 벚꽃이 피었다

영영 여기 살자는 듯

 

 

 

파도의 효능

 

이나영

 

 

공백이 없는 말은

천천히 죽어가요

 

혼자라야 들리는 말

죽어봐야 살아나는 말

 

감췄던 말들을 모아

바다에 내던져요

 

입술을 비웠더니

속삭임이 들립니다

 

파도가 필 때마다

질문도 피어나요

 

독백이 한창입니다

한 뼘씩 자라나는

 

비밀을 즐기는 사이

가도 가도 바다예요

 

백지를 걷는 듯이

매일 더 솔직해져요

 

물결이 만든 착각을

기적이라 불러도 될까요

 

 

 

유속의 허기

 

이나영

 

 

가슴을 열어보니 소금이 가득 찼다

아무도 숨 가쁘게 살라한 적 없었는데

불행이 몰려올까봐

한없이 헤엄쳤다

 

오늘을 베어 물면 내일이 차올랐다

평면의 아침들이 밀어내는 물결 속에

잘 하고 싶던 마음들이

자진하며 흩어진다

 

너절한 아가미로 말랑한 꿈을 꾼다

꼬리를 흔들수록 영롱해진 물음들을

더 깊고 캄캄한 곳에

은밀하게 묻어두려고

 

 

 

세월

 

이나영

 

 

심장을 매만지며 세상을 알아간다

 

무너진 순간마다 주워서 두들기면

 

한층 더 거세진 박동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떠나고 없는 것은 그늘로 남아 있다

 

길어진 그늘들이 심장을 감싸안으며

 

굳세게, 또 굴러간다

모서리가 둥글어진다

 

- 객 동인지 4집『거울 속 히치하이킹』(2026, 고요아침)

 

 

 

 

 

 

 

 

ㅡ이나영ㅡ
 1992년 대구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매일신문》신춘문예 등단. 문학나눔 도서 선정. 시집 『언제나 스탠바이』,『나의 파수꾼에게』. 산문집 『나를 향한 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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