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향 가득한 제주 치유농장 ‘이레숲 협동조합’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 돌담 두른감귤밭 사이에 조용한 치유의 공간이자리하고 있다. 작은 텃밭 정원과 화가의작업실, 소박한 식당이 감귤나무 사이에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치유농장‘이레숲 협동조합’이다. 제주의 햇살과바람을 머금은 감귤이 천천히 익어가듯,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도 잠시속도를 늦추고 제 빛깔을 되찾는다.
화가 농부, 요리사 농부가 오감으로 여는 치유농업
박소영 이레숲 협동조합(이하 이레숲) 대표(49)와 남편 송용혁 씨(48)는 2011년 제주 제주시에서 지금의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 감귤밭으로 귀촌했다. 화가 아내와 요리사 남편에게는 경기 파주의 프로방스마을이나 서울 종로구 인사동처럼, 그곳만이 가진 정취 속에서 사람들이 머물며 쉬어갈 수 있는 예쁜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송씨가 나고 자란 덕수리 감귤밭에서 그 꿈을 움 틔워보기로 했다.
“사실 농사를 짓겠다는 계획은 없었는데, 귤밭이 터전이잖아요. 귤이 익어가니 자연스럽게 농장 일을 하고, 귤을 수확해 팔고, 체험객을 맞이하는 일을 하게 됐어요.” 부부는 무농약으로 감귤나무를 가꾸며 농장 안에 필요한 공간을 하나씩 더해갔다. 2013년에는 농촌교육농장을 시작했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방문 미술 교육업체를 운영했던 박 대표는 감귤밭이라는 농업자원과 교과 내용을 접목한 자연미술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그러나 제주에서 농촌교육농장을 ?영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육지와 달리 제주의 농촌교육농장은 관광지와 경쟁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더욱이 제주에서 감귤밭은 흔하다 보니 꼭 저희 농장에 와야 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부부는 남편 송씨의 요리사 역량을 살려 ‘팜파티’를 고급화하는 전략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농장 체험에 음식과 이벤트, 환대의 요소를 더한 이 시도로 이레숲은 학교 울타리를 넘어 기업·기관까지 품게 됐고, 2016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농촌교육농장에서 치유농장으로 방향 전환] 이레숲은 ‘지친 어깨를 두 팔 벌려 안아주는 풍성한 숲’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기독교 찬양 노래(CCM) 가사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박 대표는 이 이름이 버겁게 느껴졌다. 사람들을 안아주려 만든 공간인데, 정작 먼저 지친 사람은 농장주 자신이었다. 여기에 출산과 가족의 병환, 코로나19 전후의 상황까지 겹치며 이레숲은 몇 해 동안 운영을 쉬었다.
멈춰 있던 이레숲이 다시 움직인 것은 2024년이다. 서부농업기술센터가 ‘수요자 맞춤형 치유농장 대표모델 육성 시범사업’ 소식을 알려오며 참여를 권했다. 심사과정을 거쳐 사업 대상지로 선정된 이레숲은 방과후아카데미 아이들 15명과 8회차 프로그램을 함께했다.
프로그램은 ‘감귤밭 보물찾기’를 주제로 진행됐다. 아이들이 감귤밭에서 귤나무가 잘 자라게 해주는 자원을 찾고, 이어 ‘나를 잘 자라게 해주는 것’을 알아차리는 흐름이었다. 취약계층 가정 아이들은 귤나무를 잘 자라게 하는 요소는 줄줄이 나열했지만, 자신을 잘 자라게 하는 것에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선생님, 그냥 단점 쓰면 안 돼요?”라고 묻는 아이도 있었다.
회차가 거듭되며 아이들은 조금씩 달라졌다. 어떤 아이들은 자신을 잘 자라게 해주는 자원으로 이레숲을 꼽고, 이곳에 오는 시간이 좋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그런 아이들로부터 오히려 치유를 받았다. 치유농업이 단순 체험, 농촌교육농장과는 분명 다른 필요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박 대표는 치유농업을 통해 비로소 이레숲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됐다고 고백했다.
[치유농장에서 발견하는 자기 긍정의 메시지] 현재 이레숲의 프로그램은 식물치유·미술치유·요리치유·팜파티 등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레숲에서는 무엇을 만들고 가져가는 체험 자체보다 참가자가 농장 안을 걸으며 자신과 닮은 식물을 찾고, 그 ?유를 말하는 과정처럼 자기 안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감귤밭 보물찾기’ 프로그램을 예로 들면, 회차별로 보물이 달라지는데 농장 곳곳에 숨겨둔 보물 중에는 ‘나는 행복해’ ‘나는 특별해’ ‘나는 소중해’와 같은 문장을 적은 쪽지가 있다. 쪽지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그 문장을 외쳐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미션이 주어진다. 최근 수필가협회와 함께한 프로그램에서 “나는 특별해”를 외치며 자기도 모르게 감격한 한 회원은 이 문구를 캘리그래피 액자로 만들어 자기 자신에게 선물했다.
“별것 아닌 말처럼 보이지만 이 문장들을 소리 내 읽는 동안 잊고 있던 자기 긍정의 메시지가 되살아나는 거예요.”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대상자에 따라 변화를 준다. 세종특별자치시교육청과 함께한 프로그램은 가족 단위로 보물을 찾아 문장을 완성하는 형태로 진행했다. 완성된 문장은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메시지로 준비됐고, 이 미션은 자연물을 활용해 ‘우리 집’을 함께 꾸며보는 단계로 이어졌다. 박 대표는 아빠와 아들 둘, 서먹한 분위기가 역력했던 한 가족이 그날 저녁 캠프파이어를 겸한 팜파티에서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뭉클해졌다.
여기서 치유농장주가 놓쳐선 안 될 치유 요소는 바로 ‘농장주’다. 박 대표는 참가자들이 이레숲의 공간과 프로그램을 좋아하지만, 결국 농장주와 맺는 관계 속에서 마음을 연다고 했다.
박 대표 부부는 팜파티와 요리치유 프로그램도 단순 ‘먹거리 제공’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수저 하나, 접시 하나, 테이블 위에 놓이는 작은 장식까지 참가자들이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한다. 음식이 나오기 전, 정성 가득한 차림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렇듯 이레숲에서 치유는 활동의 결과물보다 자신이 온전히 환대받고 있다는 감각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감각을 만드는 데 중요한 것은 치유농장주의 마음가짐과 태도다.
[외부 전문가 협업으로 지속 가능한 운영 꾀해] 이레숲은 예방형과 특수목적형 치유농업이 함께 이뤄지는 공간이다. 최근에는 특수목적형 수요가 늘고 있는데, 올해는 발달장애인·미혼모·취약계층 아동과 다회차 프로그램을 함께한다.
박 대표는 치유농업을 넘어 사회적농업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치유농업이 농장에서의 회복 경험에 초점을 둔다면, 사회적농업은 농업을 기반으로 대상자의 자립과 사회 참여까지 더 깊이 연결하는 방식이다. 농장에서 함께 일하고, 재배와 가공·서비스 과정에 참여하며자립의 기회를 찾을 수 있다면 더 실질적인 치유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 박 대표는 상담 전문가, 치유농업사, 사회복지 영역의 전문가와 협업을 도모하고 있다. 각기 다른 대상자에 대한 이해와 접근은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치유농업을 하면서 멘트 하나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느껴요. 멘트 하나가 사람 마음을 살리기도 하고 가라앉히기도 하거든요. 때문에 각 분야 전문가들과 촘촘한협력 구조를 만들어가야 지속 가능한 치유농업을 구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치유농업은 소규모로 깊이 있게 진행될수록 효과가 크지만, 그만큼 수익 구조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박 대표는 농업자원을 활용한 상품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한편, 치유가 필요한 대상자와 농장을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지원체계도 필요하다고 본다.치유농장주로서 풀어야 할 과제는 적지 않지만, 박 대표가 이레숲을 찾는 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무언가를 하려고 애쓰기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머물다가는 것. 치유는 거창한 처방이 아니라 가만히 자신을들여다보는 순간들 속에 있다. 지친 어깨를 두 팔 벌려안아주는 숲이 되고 싶다는 처음의 바람은, 이제 감귤밭 사이에서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다.
출처 농민신문 글 서진영 | 사진 남윤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