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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성경속의 숫자에 관한 이야기(10, 7, 3, 1, 4, 12)

작성자박알베르또|작성시간10.03.02|조회수438 목록 댓글 0

[ 십(10) ]

십(10)은 만족, 충만의 숫자다. 최고나 정상, 그리고 충족을 의미한다. 십이란 숫자는 소위 전체적 수다. 십이란 숫자는 일괄해서 정리한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 가르침에는 세속의 신자에게 주는 오계와 승려에게 주는 오계 등을 합한 십계가 존재한다. 원시인은 자기 손가락으로 물건의 수를 헤아렸다. 옛날부터 숫자 십은 십진법의 기본이었다. 또한 절대성, 이해력 등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를 수학적 수치보다는 상징적 의미에 중점을 뒀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십계명일 것이다. 십계명,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숫자 십은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로 우선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한 후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열 번째 재앙인 이집트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을 경험했다(탈출 12,37-42). 그 후에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다(탈출 20,1-17).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인 살렘왕 멜키체덱에게 드렸다.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창세 14,20). 또 레위기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수확한 것의 십분의 일은, 그것이 곡식이든 과일이든 가축이든, 주님께 바친다는 규정이 적혀 있다(레위 27,30). 십이란 숫자에는 구원의 성취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포괄적이고도 완전한 요구가 결부돼 있다.
 십(10)이라는 숫자는 신약에도 등장한다. 열 달란트나 열 처녀의 비유 등이다(마태 25,1-13). 나병을 앓고 있는 열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 치유됐다(루카 17,12-19). 하느님을 거스르는 힘과의 관계에서도 십의 숫자가 등장한다. 불길한 의미로 열 개의 뿔이 나온다. 그것은 사탄의 세력을 표현한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묵시 12,3).


 

[ 칠(7) ]

사람들은 '행운' 하면 제일 먼저 숫자 7을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육체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지는 데는 일곱 단계의 시간 단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7일 단위로 모두 일곱 번 제사를 지냈다.
 7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수였다. 아폴로가 세상에 나온 날은 7일이었다. 로마인들에게 7은 길한 수였고 행운의 수여서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에서 많이 쓰였다. 또한 중국에서 7은 여자의 수로 일컬어지는데, 중국인은 칠삭둥이는 살 수 있어도 팔삭둥이는 살지 못한다고 믿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속죄의식을 치를 때 피를 일곱 번 뿌렸다. 결혼식도 7일, 추모기간이나 큰 축제도 7일간이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는 7년 동안 구도의 고행을 했으며, 명상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보리수 나무를 일곱 바퀴 돌았다. 극락은 일곱 천계로 돼 있으며, 현세에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곱 가지 종교적 품행이 요구됐다.
 유다인들에게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하다. 1주일 중에 7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또한 7년째 해에는 밭을 갈지 않고 묵혀 쉬게 한다. 그리고 49년째 되는 해는 대단히 경사스런 해로 희년(禧年)이라고도 표현한다. 구약성경에서도 노아의 방주에 짐승들이 들어간 7일 후 홍수가 땅을 덮었으며, 노아는 땅에 물이 걷히고 나서도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창세 8,10).
 그러나 7이 반드시 희망과 행운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숫자 7이 인간의 일곱 가지 죄악을 가리키기도 한다.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마르 7,22).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숫자 7은 완전수이다. 예를 들면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에 대한 설명에서 7이란 숫자가 자주 나온다(레위 23,6-8). 또한 7이란 숫자는 순결한 신앙(로마 11,4)이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히브 4,4).
 칠 년째 되는 해는 땅에 안식을 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나 일곱째 해는 안식년으로, 땅을 위한 안식의 해, 곧 주님의 안식년이다. 너희는 밭에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포도원을 가꾸어서도 안 된다"(레위 25,4). 따라서 칠 년마다 농사짓던 밭을 묵히는 규칙이 있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요한묵시록에는 거의 각 장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의 칠은과 7성사 등 일곱은 매우 중요한 숫자로 돼 있다. 이처럼 일곱은 '완성'을 나타낸다.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는 곧 교회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삼(3) ]

모든 종교에서 3이란 숫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에서 쓰는 삼세인과(三世因果)라는 심오한 관념을 보더라도 3이란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구체적 효과가 무엇이든지 삼중 반복 형식은 모든 문화를 초월해서 민속 문학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고대신화 속에서도 여신들은 대체로 세 명이 한조로 나온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세 가지 속성을 나타내거나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3차원의 세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점술을 위해 주사위를 던졌을 때도 세 번 연속으로 같은 수가 나오는 것을 길조로 여겼다. 따라서 대부분 문화권에서 3이란 숫자는 행운의 숫자이자, 시작과 중간과 끝을 의미하는 수로 사용했다.
 3은 일련의 사건들의 형태가 이뤄지는 데 필요한 최소 숫자이다. 어떤 사건이 한 번이나 두 번 발생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연속으로 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신호가 된다.
 성경에서도 3이란 숫자는 완성과 완전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3이란 숫자는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 예는 삼위일체 하느님이다. 그래서 숫자 3은 '하느님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하느님이 사제의 축복에 관해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장면에서도 축복을 세 번에 걸쳐서 하라고 당부하신다(민수 6,22-27).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차례 유혹을 받으신다(마태 4,1-11). 또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도 3일이다. 여기서 3이란 숫자는 최종적 목적과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9-22).
 또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발생한다면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완전히 부인했음을 의미한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의 운명에 관해 물어본다. 세 번이나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러한 반복은 그들의 거절이 매우 단호한 것임을 의미한다(루카 23,13-25).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는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 예사로 돼 있다. 미사 때 참회예식에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고 세 번 반복하는데, 이는 잘못을 완전하게 참회한다는 뜻이다. 또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 노래하는데, 이 역시 하느님이 가장 거룩하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 일(1) ]

일반적으로 전체성을 의미하는 숫자 일(1)태양이나 빛, 생명과 자연의 기원을 나타낸다. 일(1)은 창조와 시작을 뜻하는 유일한 수로 권위와 리더십을 상징하기도 한다. 서구 전통에서 1은 그 자체로서 남성적이고 공격적이며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 피타고라스학파에게 1은 점, 모든 계산의 공통적 기초였다. 따라서 숫자 일(1)은 시초와 자아, 고독의 상징이다. 이집트에서 1은 위대한 태양신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일신교에서 신을 나타내는 숫자인 1은 원초적 통일성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인들은 일(1)이란 수를 불행의 수로 여겼다.
 성경에서 '하나'라는 수는 특히 한 분이신 하느님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사실 구약시대 근동지방에 있던 종교들은 신들의 활동 영역에 제한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당시 그들은 유일신에 관해서는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
 유일신 신앙은 유다인의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 우선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으로 다른 신들 위에 존재하기에 다른 신들에게는 예배를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6).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는 전체와 첫째이자 으뜸을 가리키며 모든 것의 근원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 성경에서 숫자 일은 절대 불가분의 기본적 수로서 시작을 상징한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또 하느님의 유일성(마태 19,17)이나 신앙의 유일성(에페 4,5-6)과 같은 것을 나타내는 데도 숫자 일을 잘 사용했다.
 하나라는 숫자는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에 대해 유다인들은 신성모독이라 하여 돌로 쳐서 죽이려 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요한 10,30-31).
 사도 바오로도 모든 인류의 단일성과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치를 주장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에페 4,4-5).
 예수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 뜻을 완전하게 계시하셨다. 그리스도 희생으로 우리 신자들은 그분과 한 몸이 되는 영광을 지닌다(1코린 10,16-17).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과 돌봄, 자비, 일치된 마음, 겸손 등을 가능하게 한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인간의 독특함을 보여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가르침은 잃어버린 양과 동전의 비유에서 잘 표현했다(루카 15,1-l0).
 특히 예수님은 병자들,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임을 더욱 분명하게 강조했다.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 넷(4) ]

숫자 넷(4)은 한자의 죽을 사(死)와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동양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는 숫자다. 실제로 우리나라 병원 건물 중에는 3층 다음이 5층인 곳도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4층을 표시하는 버튼은 대부분 F로 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4는 완전함을 의미한다. 인도와 중국에서 숫자 4는 땅의 상징이어서 지리학에서도 중요한 요소였다. 보편성을 상징하는 4는 힌두교 사회에서 카스트 계급의 숫자이기도 했다. 피타고라스 체계에서 4는 최초의 입방체, 즉 밑면과 세 변을 가지는 사면체를 이루는 숫자이다.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종교의 힘을 상징하는 사각형은 전 세계 수많은 신성한 건축물의 기초가 됐다. 이집트에서는 미이라를 만들 때 항아리 네 개에 죽은 자의 내장을 담아뒀다. 고대 서구 전통에서는 물, 불, 흙, 공기 등 네 가지 원소가 있었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동ㆍ서ㆍ남ㆍ북에서 알 수 있듯이, 넷은 시간 전체, 공간 전체를 나타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4는 견고함, 포괄성, 조직성, 힘, 지성, 정의, 전능을 상징하는 수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숫자 4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 전체를 나타낸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그곳에서 갈라져 네 줄기를 이루었다"(창세 2,10). 이처럼 성경 안에서 넷(4)이라는 수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전 우주, 전 세계를 표시한다. 또한 하늘의 하느님 옥좌 둘레에는 네 마리 생물 모습이 있어 전 자연, 전 세계의 힘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에제 1,4-14 ; 묵시 4,6). 네 생물 모습은 복음사가 각자의 상징을 이루고 있다. 그 상징은 각 복음서의 시작과 관계가 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묵시 4,7).
 주님 발현에서 나타나듯이 숫자 4는 신적 요소를 상징하고 있다. "저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도 저마다 넷이었다. 그들의 날개 밑에는 사방으로 사람 손이 보였고, 네 생물이 다 얼굴과 날개가 따로 있었다. 그들의 얼굴 형상은 사람의 얼굴인데, 넷이 저마다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고 왼쪽은 황소의 얼굴이었으며 독수리의 얼굴도 있었다"(에제 1,4-10 참조).
 신약성경에서도 4는 깊은 뜻을 지닌다. 복음서가 네 편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기쁜 소식, 곧 구원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가는 것, 그래서 구원의 완성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12부족은 인간, 사자, 황소, 독수리 등 네 가지 상징으로 분류됐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네 명의 복음사가인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상징이 됐다.
 마태오 복음의 상징은 인간 얼굴로,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임을 의미한다. 마르코 복음의 상징은 사자이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설교로 시작하기 때문에 광야의 왕이라 할 사자가 상징이 됐다. 루카 복음은 사제 즈카리야가 지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루카 복음은 번제물의 상징인 황소가 상징이다. 요한 복음의 상징은 독수리이다. 마치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듯이 드높은 하늘의 하느님 곁에까지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네 복음서는 전 세계에 선포되는 복음이며, 구원의 상징이 된다.

 

[ 열 둘(12) ]

"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조석을 굶는다"는 속담이 있다. 재주가 무척 많은데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12라는 숫자를 가장 크고 많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집이 크면 열두 대문, 산이 커서 1만2000봉, 발이 길어 열두 발 상모라 불러왔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숫자 12를 행운의 수로 생각했다. 그런데 반대로 바빌로니아에서 12는 불운을 나타내는 숫자다.
 성경에서도 열둘(12)이라는 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가장 중요한 숫자들 중 하나이다. 성경에서 이 숫자의 중요성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왔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삼으셨는데, 온 인류의 전체 구원을 위해서였다. 성경에서 열둘이라는 숫자도 일곱이나 열처럼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일 년이 열두 달로 이뤄져 있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모세는 이집트 탈출 후에 열두 지파 수를 따라 시나이 산 위에 열두 개 기둥을 세웠다.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웠다"(탈출 24,4).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돌 열두 개로 기념비를 세웠다. "여호수아는 요르단 강 한복판,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의 발이 서 있던 곳에 돌 열두 개를 세워 놓았다. 그것들은 오늘날까지 거기에 있다"(여호 4,9).
 대사제 예복 가슴받이에는 열 두개 보석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각 지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에 따라, 곧 그들의 이름 수대로 열둘이 되었다. 인장 반지를 새기듯 각자의 이름을 새겨 열두 지파가 되게 하였다"(탈출 39,14). 솔로몬은 이스라엘에 열두 지방관을 두었고, 솔로몬의 여러 건축 사업에는 열둘이라는 숫자와 치수들이 항상 포함됐다(1열왕 4,7).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와 싸울 때도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다(1열왕 18,31).
 열둘이라는 숫자의 중요성은 신약성경에도 나타난다. 우선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신 데서 잘 나타난다(마르 3,13-19). 여기서 12의 의미는 이스라엘 전체 구원을 상징한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열둘의 상징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르 6,43).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언젠가는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열둘이라는 상징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곳은 역시 요한묵시록이다. 하늘에 큰 표징과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다(묵시 12,1). 또 열두 성문의 열두 천사, 도성 성벽의 열두 초석, 어린 양의 열두 사도 이름 등이 등장한다(묵시 21,14). 그 밖에도 12라는 숫자가 수없이 나타난다.

   [평화신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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