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측정 실험을 하고 있는 로버트 밀리컨과 하비 플레처
“당신의 편지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여성과학자들이 큰 업적을 내고 생물학과 화학, 조금 더 너그럽게 봐줘서 천문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는 있습니다만, 우리나라(미국)에서는 물리학 분야에서 아직 그런 수준에 도달한 여성이 없습니다.” “독일의 리제 마이트너와 프랑스의 퀴리부인을 예로 들 수 있겠지만, 그건 유럽의 얘기일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귀 대학의 신임 교수 자리에 여성물리학자를 초빙하는 것보다,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남성 물리학자 한두 명을 충원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논란의 과학자, 로버트 밀리컨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추천서를 썼다가는 아마 곧바로 법정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실제 1936년 듀크 대학의 총장이 당대 최고 권위의 물리학자였던 로버트 앤드류 밀리컨으로부터 받았던 편지에 담겨 있다.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듀크 대학의 물리학과에서는 여성교수의 임용을 고려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외부 의견을 밀리컨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밀리컨은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의 실질적인 총장이었고, 미국의 두 번째 노벨물리학상(1923년) 수상자였으며, 미국물리학회 회장도 역임했음을 고려하면 그의 추천의 글은 꽤 영향력이 있었을 것이다.
밀리컨은 1921년부터 1945년까지 칼텍의 최고 책임자로 있었고, 이때 칼텍이 세계 정상급 연구중심 대학으로 도약했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재직했던 시절에 단 한명의 여성도 교수로 임용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오늘날 여성운동가들로부터 받는 비난은 어느 정도 마땅하지 않나 싶다.
여성편견 말고도 밀리컨에게는 반유대주의자, 대학원생의 업적을 가로챈 파렴치한 등의 낙인도 찍혀져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에게 있어 가장 큰 논란거리는 데이터 조작에 얽힌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에게 밀리컨은 전하의 최소 단위를 측정한 최초의 물리학자로 알려져 있다. 소위 ‘밀리컨의 기름방울실험’은 대학교 학부과정 물리학 실험으로 종종 다뤄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실험을 실제 수행한 학생들이 전하의 최소단위를 제대로 측정했다는 얘기는 좀처럼 듣기 힘들다. 반대로 이 실험이 웬만해서는 재현이 안 된다는 주장이 더 많다. 행여나 실험에 성공하여 올바른 측정값을 가져오더라도, 그 학생은 오히려 실험데이터를 조작해 가짜 리포트를 낸 것 아닌가 의심받기도 한다.
밀리컨은 정말 데이터 조작을 했을까? 100년 전 밀리컨이 실험을 했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1 로버트 앤드류 밀리컨. 전하의 최소단위를 측정한 기름방울 실험으로 미국의 두 번째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된다. 2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로버트 밀리컨 기념도서관 <출처: Canon.vs.nikon at wikimedia.org> | |
늦깎이 연구자
정식 지도교수는 아니었지만 밀리컨은 마이컬슨-몰리 실험으로 유명한 앨버트 마이컬슨으로부터 실험을 배웠다고 한다. 1895년 컬럼비아 대학의 1호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밀리컨은 지금으로 말하면 박사후연구원(포스트닥터)을 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난다. 세기말의 유럽은 현대물리학이 탄생하기 직전인 폭풍전야와 같은 시기였다. 베크렐이 방사선을 찾아냈고, 뢴트겐은 엑스선을 발견하였다. 또 마이컬슨-몰리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로렌츠-피츠제랄드의 길이 수축 가정이 나와 특수상대성이론의 등장을 알리는 복선이 깔리던 시기였다. 밀리컨은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물리학의 발견들을 쫓아가기에 바빴다. 그러나 밀리컨이 현대물리학의 혁명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유럽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마이컬슨이 이듬해에 그를 시카고대학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었다.
밀리컨은 시카고 대학에서 연구보다는 물리교육에 힘썼다. 그러는 동안에 세상은 엄청나게 바뀌고 있었다. 톰슨은 전자를 발견하였고,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만들었고, 막스플랑크는 플랑크상수를 도입하여 양자혁명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이런 혁명과도 같은 시절에 현대물리학 건설에는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하고 중년의 나이를 맞게 된 밀리컨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히트곡이 없어 괴로워하는 가수와 마찬가지로 뭔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만들지 못한 물리학자가 느끼는 자괴감은 의외로 컸다. 밀리컨은 무엇인가 획기적인 연구주제를 잡고자 했고 그래서 그는 당시 물리학계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인 전자의 전하량 측정에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대전된 물방울의 낙하
전자의 전하는 전자를 발견한 톰슨의 연구진에 의해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안개상자 속의 대전된 물방울이 중력에 의해 낙하하는 것을 전기장으로 적당히 조절하여 전자의 전하값을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질량이 m인 물방울이 q만큼의 전기로 대전되어 있다고 하자. 이 물방울은 mg만큼의 중력을 아래 방향으로 받게 되는데, 이때 적당한 세기의 전기장 E를 걸어 qE 만큼의 힘을 위 방향으로 걸어 물방울의 낙하를 조절해 줄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전기력이 중력의 크기와 딱 맞아 떨어지면 물방울은 공중에 정지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mg=qE가 되어, q=mg/E란 식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즉, 물방울의 질량과 중력가속도, 그리고 전기장의 크기를 알면 전하량을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전기장 속에 대전된 물방울이 떠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물방울의 질량을 알려면 물방울의 크기를 알아야 하는데, 물방울의 크기는 제각기이고, 작은 물방울의 크기를 측정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물방울이 공기 중에 떠 있는 것이므로 부력에 의한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작은 물방울의 경우에는 공기분자에 의해 끊임없이 부딪혀 브라운 운동을 하게 되므로 사실상 정지해 있는 물방울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안개상자에 의한 방법으로는 근본적으로 정밀한 전하 측정이 불가능했다. 어쨌든 1903년에 발표된 전자의 전하량은 대략 (0.7~1.4)×10-19C 사이의 값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자의 전하량 1.6×10-19C과 비교하면 조금 작은 값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측정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오차는 물론 매우 큰 편이었다.
밀리컨이 만든 혁신
1907년에 들어서야 밀리컨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전자의 전하량 측정에 몰입하였고, 톰슨 그룹의 결과와 비슷한 값들을 얻기 시작하였다. 톰슨 그룹과 같은 안개상자 방법으로 전하량을 측정하던 밀리컨은 어떻게 하면 실험오차를 줄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이런 저런 실험 중에 우연히 그가 시도한 한 아이디어는 기존의 실험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더 센 전기장을 걸어보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시도는 뜻하지 않은 성공을 가져왔다. 강한 전기장에 의해서 많은 물방울들이 위아래로 휙 날아가 버리고, 전기력과 중력이 상쇄되는 적은 수의 물방울들만 공중에 붕 떠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순간 밀리컨은 각 물방울의 움직임을 독립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기존에 하던 전체 물방울들의 평균운동을 측정하는 것보다 더 정밀한 결과를 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불행히도 개별 물방울의 운동을 측정하는 방법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관측을 좀 하려다 보면 물방울이 금세 증발하여 사라지는 것이었다. 밀리컨은 물방울 말고 증발하지 않는 다른 액체를 사용하여 실험을 계속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일을 그의 학생인 하비 플레처(Harvey Fletcher)에게 맡기게 된다. 밀리컨에게 행운의 여신이 따라다녔던 것일까? 어려울 것만 같았던 이 문제를 플레처는 너무나도 간단히 해결해 버렸던 것이다. 플레처는 동네 상점에 가서 분무기가 달려 있는 향수를 사온 뒤 물방울 대신 향수를 뿌려 본 것이었다. 물방울과 달리 향수 기름방울은 증발하지 않고 공중에 둥둥 이리저리 떠다녔다. 플레처는 이 사실을 밀리컨에게 보고했고, 밀리컨은 곧바로 물방울 실험을 그만 두고, 기름방울 실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밀리컨의 은밀한 거래
전자의 전하량 측정에 관한 밀리컨의 논문
기름방울 실험을 통해 플레처와 밀리컨은 두 편의 멋진 논문을 제출한다. 첫 번째 논문은 전자의 전하량(e)을 측정한 것이었고, 두 번째 논문은 기름방울의 브라운 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이상한 것은 실험은 같이 했는데 두 논문의 저자가 각기 한명씩이라는 것이다. 당시 플레처는 박사학위를 받아야 해서 단독저자 논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점을 알고 있던 밀리컨은 플레처에게 은밀한 제안을 한다. 즉, 두 논문을 나누어 각기 단독저자로 한편씩 제출하자고 한 것이다. 당연히 밀리컨은 전자의 전하량을 측정한 논문에 이름을 올리고, 플레처는 브라운 운동에 관한 논문의 저자가 된다. 전자의 전하량 측정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고 있던 지도교수가 제자와 가위 바위 보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플레처는 억울했지만 박사학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플레처는 이 이야기를 오랜 기간 숨겨왔고, 밀리컨이 죽고 난 다음에야 세상에 공개했다. 그래서 밀리컨은 사후에 제자의 업적을 빼앗아간 과학자로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밀리컨은 데이터를 조작했는가?
밀리컨이 죽고 나서 그의 실험 결과가 논란이 된 이유는 엄밀히 말해 매우 악의적인 데이터 조작 때문은 아니었다. 악의적인 데이터 조작이라 함은 실험으로 얻은 값을 임의로 바꾸어 전혀 다른 결과, 보통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초창기 밀리컨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밀리컨이 한 행위를 데이터 쿠킹(cooking)이라 놀려댔다. 쿠킹이란 데이터를 적당히 조리를 했다는 얘기이니 따지고 보면 데이터 조작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기름방울 실험을 계속한 밀리컨은 1913년에 58개의 기름방울을 관측하여 모든 전하량이 최소 전하량(e)의 정수배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문을 하나 발표한다. 이는 전하량의 값이 연속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논문이었고, 이 논문은 그가 훗날 노벨상을 받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그런데 칼텍의 도서관에 보관 중이던 밀리컨의 연구노트를 살펴본 후대의 과학자들은 그만 깜작 놀라게 된다. 그의 연구노트에 들어 있는 데이터는 총 175개나 되었는데, 1913년에 발표된 논문에는 그 중 58개의 데이터만 실은 것이었다. 문제가 심각해진 진짜 이유는 그가 논문에서 “데이터를 골라내지 않고 모든 데이터를 다 사용했다”라고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밀리컨은 순식간에 연구 윤리를 위반한 부도덕한 과학자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그러나 밀리컨의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반전이 한 번 더 이어진다. 그의 연구노트를 면밀히 분석한 다른 일련의 학자들은 그가 버린 데이터 중 많은 부분이 그가 실험 조건을 잡기위해 시범적으로 수행했던 데이터였음을 알게 된다. 또 본 실험에서 얻은 데이터 중에 논문에 실리지 않은 데이터에는 명확히 왜 그 데이터가 삭제되었는지 그 이유가 적혀있었다.
밀리컨에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는 나름 매우 꼼꼼하게 실험을 수행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또 다른 과학자들이 밀리컨의 원본데이터를 다시 분석해본 결과 밀리컨이 삭제한 데이터를 포함시키더라도 논문의 결과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로써 밀리컨의 명예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어찌 보면 밀리컨의 생애가 너무 부정적인 면만 강조되어 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플레처가 논문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아 부도덕한 스승으로 평가받고는 있지만, 밀리컨은 평생 플레처를 돕고 지지했으며, 둘은 늘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플레처가 섭섭해 할 수는 있어도 노벨상을 가로챈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밀리컨이 가졌다는 여성에 대한 편견도 사실 오늘날의 잣대일 수 있다. 1930년대 미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제한된 교육의 기회와 직업, 투표권 등을 생각해보면, 밀리컨이 특별히 여성차별에 더 앞장섰거나 고의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고, 그 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일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