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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한자어가 좋아보이기로서니……

작성자사릿|작성시간00.09.05|조회수74 목록 댓글 0
저희 동네에는 유선방송사가 있습니다. 저희 동네는 산으로 둘러싸여서 전파가 잘 전달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TV화면이 썩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유선방송 서비스에 가입해서 TV를 보고 있지요. 그런데, 유선방송사에서는 KBS, MBC, SBS, EBS 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체 제작도 하거든요. 그리고 인기가 있을 법한 프로그램은 녹화해 두었다가 다시 방송하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우연히 한 녹화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MBC의 한 쇼 프로그램이었는데, 무슨 스포츠 한 종목을 배워보는 순서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스포츠 강사로 나온 사람이 이런저런 설명을 하다가, '똥배를 집어넣고'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똥배라는 말을 하기가 좀 이상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묻더군요.

"똥배는 방송용어가…… 아니죠?"
(사회자)"아, 네. 좀…"
"자 그럼, '변배'를 집어넣고……."

'변배'. 똥 대신에 변(便)을 써서 말한 것이겠죠. 그런데, '변배'라는 말. 이것을 그냥 웃고 넘어가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자어를 교양있고 품위가 높은 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변배'라는 말을 써야 되겠습니까? 차라리 똥배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정 이상하다면 그냥 배라고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국어를 배우다보니까, 우리가 그처럼 점잖게 생각하는 한자어들이 사실 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변(便)도 그렇습니다. 똥과 변처럼, 뜻이 전혀 다를 것 없는 말인데 단지 한자어라는 이유로 대접받고, 토박이말이라고 구박받는 말이 참 많습니다.

비슷한 일로, 역시 MBC에서(너무 MBC만 짚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MBC에 무슨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분께서 말씀하시는 중에는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 '꼽추'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경고음이 나오고 자막에서 '시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청각장애인', '척추장애인' 이라고 모조리 고쳐 놓더군요.
속이 상했습니다. 그렇게 한자어로 해 두면 더 고상하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그리고, '장님' 같은 말이 이미 듣기 싫은 말이 되었다고 해도, 꼭 그렇게 한자어로 고쳐야만 했을까요? '앞 못 보는이', '못 듣는 이', 이렇게 고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 말을 곱게 쓰자고 하는 일이 도리어 우리 말을 다 없애고 한자어들만 늘려놓는 결과가 되어서 너무도 답답하였습니다.

한 술 더 떠서 이제는 서양말을 써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역시 그 방송사입니다. 같은 프로그램이고요. 소록도의 이야기를 담은 부분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문둥병'이나 '나병'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한센병'또는 '한센씨병'이라는 말을 쓰더군요. 진행자도 낯선 말이었던지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나병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쓰지 않습니까?"
"네. 한센병이라고 합니다."
"나병이라는 말은 틀린 것인가요?"
"네. 한센병이 정확합니다."

나병이라는 말이 틀렸다고 하는 말은 처음이었습니다. 나병이 틀린 말이라니…….
혹시 그 간호사가 말한 것이, "'나병'과 '한센병'은 다른 병이고, 사람들이 나병이라고 부르는 병은 사실은 한센병이며, 소록도에 있는 분들이 앓고 있는 병은 한센병입니다."라는 뜻인가 해서 백과사전을 찾아봤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병과 한센병은 뜻이 다른 말인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은 완전히 똑같은 병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센'이라는 이름은 '한센'이라는 의학자가 나병 연구에 업적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그를 기념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나병이나 문둥병이나 한센병이나 똑같은 병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면 나병을 무슨 까닭으로 '틀렸다'고 그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나병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한센병'이라고 하면 그 병이 더 잘 낫는 것인가요? 그렇게 해야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인가요? 그렇게 불러줘야 치료할 맛이 나더란 말입니까?
사실, 그렇게 서양말을 쓰면 유식해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별 것 아닌데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한센병이라고 하면 사람들의 느낌이 조금은 달라질 것입니다. '나병'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나쁜 느낌을 덜 받게 되겠지요. 고급스러운 병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순우리말은 어느새 상스러운 말이 되어 버렸고, 한자어, 영어가 고상한 말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상스러워도 무조건 순우리말 쓰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고운 말로 바꿀 때에도 제발 순우리말로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자어나 영어로 바꾸지 말고 말입니다. 그렇게 바꾸는 것은 언어만 바꾼 것일 뿐이며, 어찌보면 말장난일 뿐, 진정한 고민 끝에 나온 아름다운 말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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