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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부근당

작성자임유상|작성시간22.06.19|조회수37 목록 댓글 0

부군당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교동읍성 북성 둑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부군당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관청내에 두던 신당으로 행정구역 어느 곳에나 있었다. 부군당의 화상은 다산을 상징하는데 읍내리 부군당에느 조선시대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교동으로 유배된 연산군(재위 1494 - 1506년)으로 추정되는 화상과 남근목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읍내리 주민이 연산군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죽은 원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연 1회씩 지냈다고 한다.

1.역사

부군당제는 조선시대 각 관아(官衙)에서 신당(神堂)을 두고 아전(衙前)과 서리(胥吏) 등 하급 관리들이 지낸 제사이다. 부군당제는 현재 한강변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조선 후기 한강의 수운을 이용한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인구가 급증한 한강변에 이를 관리하는 여러 관청 및 기관이 집중되었다는 점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부군당제의 목적이 해당 관서에서 맡은 업무와 관원들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기원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부군당제가 주재 집단의 변화에 의해 마을공동체 신앙으로 바뀌거나 무당 개인의 신당으로 변화한 것은 사실이다. 교동도의 부군당은 인천 도서지역 가운데 유일하며, 여성을 중심으로 한 마을공동체 신앙으로 현재 전승되고 있다.

부군당이 위치한 교동도 읍내리 교동읍성(둘레 약 430m, 높이 약 6m, 둘레가325m라는 설도 있다)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곳곳에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 위쪽에는 읍성의 돌담이 남아 있고, 읍성 남문인 홍예(虹霓)는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홍예 한쪽에는 ‘남문(南門)’이라는 글자도 적혀 있다. 교동읍성은 1629년(인조 7)에 축조된 것으로,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었다. 동문의 누는 통삼루(統三樓), 남문의 누는 유량루(庾亮樓), 북문의 누는 공북루(拱北樓)라고 하였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현재는 홍예만 남아 있다. 1890년(고종 27) 동문과 북문을 다시 세웠다는 것을 통해 그 이후에 유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홍예는 화강암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두 홍예 골격 사이는 트여 있어 하늘이 보인다. 홍예 한쪽 벽면에는 민가 한 채가 놓여 있다.

교동읍성의 교동부(喬桐府)는 1629년(인조 7) 남양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긴 후 교동현이 교동도호부로 승격하면서 도호부가 세워졌다. 도호부 터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계단이 남아 있어 3도(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을 관장하던 규모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읍성 남문의 누각 기둥으로 추정되는 장대석 2기가 남아 있다. 한편 연산군이 죽기 전에 머물렀다고 여기는 터를 가리키는 비문이 있으며, 그 터 아래에는 정자형 우물이 현재 남아 있다. 이 우물 안에는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다. 연산군의 격거지(擊居址)는 봉황산 자락, 화개산 북쪽 자락 등 여러곳이 있다. 이 가운데 고읍이 있던 화개산 북쪽 지역이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곳은 읍내리가 도호부가 되기 전에 교동현이 있던 곳이다.

2.내용

1) 부군당 명칭 : 부군은 부군할아버지, 부군할머니, 부군마지로 불리는 신이다. 부군이라면 마을의 수호신으로, 도당보다는 범위가 큰 마을의 수호신이다. 서울 지역 무당들은 부군이 도당보다 상위 신격의 성격을 띠면서, 좀 더 넓은 지역을 관장하는 신격이라고 믿고 있다. 부군당의 한자어 명칭은 ‘府君堂’으로 표기한다.

한편 교동도 읍지의 경우 부군당을 ‘부근당(付芹堂)’이라고 표기하고 있어 둘 사이에 한자 표기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기록에 보면 ‘付根堂’이라는 표기가 보이며, 이규보(李奎報)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각사(各司)에 신사가 있는데 부근당(付根堂)이라고 하였고 이것이 와전되어 부군당(府君堂)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규보의 의견에 따르면 부군당(府君堂)의 본래 명칭은 부근당(付根堂)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군의 명칭은 위에서 언급한 한자 이외에도 부근(府根), 부근(附根), 부군(府群), 부강(富降), 부군(符君) 등 다양한 한자로 쓰이고 있다.

付根, 府根, 附根이라는 명칭은 부군당에 남근목(男根木)을 바치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동도부군당 내부에도 남근목이 걸려 있다. 여기서 당집에 남근목을 바치는 이유는 송씨 처녀를 위함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경우와 부군당의 신격이 여성이라고 밝힌 경우가 있다. 송씨 처녀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흔히 원한을 품고 죽은 여성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부군당의 송씨 부인은 당의 주신(主神)이 아니고 남성신을 보필하는 존재로 보인다. 한편 송씨 부인의 경우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화주당(化主堂) 전설에서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관련해 억울하게 죽은 홍대감의 부인, 중구 방산동 성제묘(聖帝廟)에서는 팽씨로 구전되는 관우의 부인으로 성씨를 달리해 등장하는 등 실체를 확인할 수 없으나 광범위하게 모셔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남근목을 바치는 행위는 강원도 해신당이나 일본의 마을 신당에도 보이며, 네팔에서는 정초 행사에 수많은 남근목을 집에 걸어 놓고 풍요를 기원하기도 한다. 이능화는 신당에 봉안된 남근목은 부군당에 모셔진 손각씨(孫閣氏)를 위한 일종의 제물로 이해하고 있다. 현재 한강변 부군당 가운데 남근목을 봉안하고 있는 곳은 영등포구 신길3동 방앗고지 부군당이다. 민간신앙에서 남근목을 봉안하는 것은 생식숭배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2) 위치 : 부군당은 교동읍성 북쪽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교동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읍내리 앞바다는 중국 어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통로이고, 한강에서 출발한 어선들이 중국으로 향할 때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연산군이 폐위를 당하고 교동도에 올 때도 이곳 항로를 이용하였다. 현재 교동도의 포구는 남산포, 동진포, 월선포, 호두포 등이 있다.

부군당은 본래 옆자리에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허물어지자 지금의 자리에 초가에다 기와를 올려 새로 단장하였다. 부군당 옆에는 큰 오동나무가 있으며, 신목인 셈이다. 본래 부군당은 고읍에 있었으나 교동읍의 중심이 읍내리로 바뀌면서 부군당도 함께 모셔왔다고 한다. 부군당은 본래 관아에서 마을을 지켜 주는 인물을 모신 곳이기에 관아가 읍내리로 이전하면서 부군당도 함께 옮긴 것이다. 부군당을 한자로 ‘府君堂’이라고 표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교동도의 부군당을 한자로 ‘부근당(扶芹堂)’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나 ‘芹’은 ‘根’의 잘못 표기인 것으로 여겨진다. 부군당에 ‘미나리 근(芹)’을 쓰는 사례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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