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게시판

근대와 교통

작성자임유상|작성시간26.06.19|조회수30 목록 댓글 0

우리나라에선 교통수단이 어떻게 발달했을까요?

동력을 사용하는 차량은 어떻게 시작 될까요?

자동차가 먼저 일까요? 기차가 먼저일까요? 아니면 전차가 먼저?

일단 사람은 걸어서 다녔겠지요. 그러다가 말 또는 소를 타고 다닌답니다. 동물의 힘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달구지를 사용, 소나 말의 힘을 이용하여 다니면 훨씬 힘이 덜 들겠지요. 근대화가 되면서 교통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동력을 이용하는 차량이 등장합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릴께요.

전차가 먼저랍니다(1899.5). 다음 기차가 개통되고요(1899.9) 그 후에 자동차가 나타납니다(1901).

전차는 철도 아니냐구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철도는 일정한 구간을 확보하여 다수의 인원과 대량의 화물을 운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쉽게 이해가 되는데 많은 사람들 정말 헷갈려 하세요. 전차는 일반 차량에 가까운 것이지요. 어떤분들은 전차 개통으로 철도 개통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곤 한답니다. 그러면 탄광에서 운행하던 광차도 철도라고 보아야 겠네요? 그건 아닙니다. 하면 쉽게 이해하세요.

특히 용어의 정의와 해석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이 부분은 아마도 제가 제일 잘 설명할 것입니다.

전차이야기 할께요

 

1. 전차의 개통

1899년 음력 4월 초파일, 외국 귀빈과 대신들 그리고 고종을 태운 전차가 광화문 앞에서 청량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1년 반 동안의 공사 끝에 서대문과 청량리 간에 부설된 궤도 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그 위용을 드러낸 것입니다. 전차 개통식 날 광화문과 종로 바닥은, 고종께서 친히 시승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 진귀한 모습을 보기 위해 모여 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집채만 한 '쇠당나귀'가 한꺼번에 20여 명을 싣고, 공중에 매달린 전깃줄을 따라 쇠막대기 끝에서 번갯불을 튀기며 자기 스스로 굴러가는 모습을 보고, 마치 온세상이 개벽하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동아시아 3국 중국, 일본, 대한제국의 수도 중 근대화의 상징, 시내 교통의 혁명이랄 수 잇는 전차가 우리나라의 서울에서 가장 먼저 개ᅟᅩᆼ되었다느 ㄴ사실 알고계실까요?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근대화의 의지가 있었다ᅟᅳᆫ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효도 전차계' 를 유행시킨 전차

전차를 우리나라에 들여온 사람은 미국의 전기 기술자 콜브런과 보스트위크였습니다. 콜브런은 한성에 전기가 부설되었으니 전차가 매우 이상적인 도시 교통수단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종에 전차부설을 요구하였고 근대화에 적극적인 고종은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는 고종의 홍릉(명성황후의 능) 행차를 위해 1898년 초부터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 8km에 이르는 대로 위에 전차 궤도 부설 공사를 시작했고, 그리고 미국에서 여덟 대의 전차를 분해하여 배에 싣고 들여온 후, 미국 기술자들에게 전차를 조립시켰습니다. 콜브런은 곧 일본인 전차 운전수들을 고용하고, 서대문과 청량리 간의 전차 운행 구간을 세 구간으로 나누어서 한 구간당 5전의 전차 요금을 받았는데, 당시 명동 진고개 골목 중국집의 자장면 한 그릇 값이 3전이었으니 차비가 꽤 비싼 편이었습니다. 시골 사람이 한 성에서 그 귀한 전차를 탔다 하면 동네의 최고 인기 스타가 되었고, 가난한 백성들 사이에서는 노부모님 전차 한번 태워 드리려고 '효도 전차계' 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사실 전차는 이땅에 등장한 지 며칠 만에 교통사고를 내고, 세도가와 기생의 탈것으로 이용되면서 서민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05년을 넘어서면서 전차는 평범한 백성들과도 차츰 가까워졌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을지로, 남대문, 태 평로 등에 전차 궤도 부설 공사가 뒤따르면서 배고픈 백성들이 인부로 고용되어 먹고살 길이 열렸고, 둘째는 전차 요금이 점점 싸져서 전차가 서민의 발로 안성맞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울 도성 성벽훼손

1902년 1월에는 종로 ~ 남대문 ~ 원효로의 전차 궤도가 완공되었다. 이 공사를 할 때 남대문의 좌우 성벽을 헐어야 했지만 조선조 역사를 간직한 국보를 보존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워낙 강했고, 새로운 이기인 전차에 대한 거부 반응이 컸기 때문에, 남대문 성벽은 그대로 두고 전차를 좁은 성문을 통과하여 달리게 했다. 남대문은 인마의 교통 이 복잡한 곳이었는데, 그 좁은 성문으로 전차가 다니고 1905년 경부 철도 개통 후에는 철도 승객까지 통과하게 되자 그야말로 대혼잡을 이루었다. 1906년 3월, 조정의 친일파 대신들이 고종에게 남대문과 동대문의 좌우 성벽 철거를 강력히 주청했고, 결국 남대문과 동대문의 문루만 원형대로 남긴 채 양쪽 성벽을 헐어 폭 여덟 간의 새 길을 내고 전차 궤도가 깔리게 된다. 1908년 10월, 남대문 좌우의 도로도 남대문역(현 서울역) 까지 연장하여 길이 436m, 폭 34~54m에 이르는 명실 공히 개화 도로로 완공되었다. 이어 남대문에서 동현(을지로), 광화문, 왕십리 간 등의 간선도로도 넓은 폭으로 개,보수 하면서 한성의 성벽은 차례로 사라져 갔다.

 

2.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새보다도 빠른 '불뿜어대는 수레' 탄생

우리 역사상 첫 동력을 이용 탈것인 전차가 등장하고 4개월 뒤, 기차가 이 땅에 나타나 대량 수송 교통 혁명을 일으켰다. 1899년 9월 18일 아침 우리나라 최초의 기차가 국내외 귀빈을 개통식에 모시기 위해 인천의 제밀(제물포)에서 한성의 노들(노랑진) 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시커 먼 연기를 내뿜으며 칙칙폭폭 달리는 화륜거(火輪車, 기차)의 위세에 구름같이 모여든 구경꾼들은 얼이 빠져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이날 개통식에 참석한 독립신문의 한 기자는 시승 소감을 다음과 같이 썼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서 영창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내닫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당나귀나 보부상들도 힘든 경인 간 80리 하룻길을, 사람과 짐을 태 산같이 실은 기차가 긴 쇠몸뚱이를 뱀처럼 비틀면서 1시간 40분 만에 당도하니 그 속도가 당시로는 기가 질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경인선 개통 초기에는 역이 7개 있었다. 하지만 경인철도가 개통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연일 구경꾼만 구름처럼 모여들 뿐이고, 사람들은 철로를 베고 낮잠을 자거나 기차 힘이 얼마나 센지를 시험한다며 몰래 철길 위에 바위나 멍석을 올려놓으며 장난을 치기 일쑤였다. 이를 참 다못한 경인철도회사는 관청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이후 철도 연변 에 구경꾼들의 접근을 막는 철도 경찰이 생겨났다. 한편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자 경인 간의 교통이 더욱 혼잡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외국인이나 상인의 왕래가 잦은 인천역 주변은 교통 량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았고, 교통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리하여 1904년초, 인천역 광장 도로에 교통사고 방지를 위한 특이 한 광경이 나타났다. 인천역 부근 도로 가장자리 한쪽에 줄을 매고, 도로 건너편에는 줄을 쥔 사람이 배치된 것이다. 그 사람은 앉아 있다가도 기차가 도로를 가로질러 지나가면 벌떡 일어나 줄을 팽팽하게 잡아 당겨 올려서, 사람이나 자동차, 우마차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 았다. 줄이 교통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한 일종의 차단기 역할을 했던 것인데, 바로 이것이 오늘날 건널목의 시초였다.

 

3.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1901년에 홈즈라는 미국인이 출판했던 여행기 중 한국 편을 사진과 함께 연재했는데, 그 사진 속에 자동차 가 나온다.

1901년 봄, 미국 시카고대학의 사진학 교수이며 여행가였던 버튼 홈즈는 일본의 풍물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다가 조선의 수도인 한성에 가면 볼 것이 많다는 소리를 듣고 화륜선(증기선)과 경인선 열차를 타고 한성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명승고적을 구경 다니며 사진 을 찍었다. 하루는 한강을 구경하기 위해 커다란 사진기를 자동차에 싣고 마포로 향했다. 그런데 서대문을 막 빠져나가다가 마주 오던 소 달구지를 피하지 못하고 들이받아 급기야 사고를 내고 말았다. 다행 히 소와 농부는 다치지 않았지만 수레는 망가져서 바퀴가 빠져버렸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최초의 자동차 대물 사고였다. 홈즈의 여행기에 바로 이 자동차 사고 현장 사진이 실려 있다. 한데 그의 여행기 속에는 자동차를 어디서 어떻게 구했다는 기록이 없다. 당시 의 상황을 미루어볼 때 홈즈가 자동차를 가지고 들어온 것은 아니고, 누군가가 가지고 있던 차를 빌려 타고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 홈즈가 한성에 머물 때, 전기를 가설하고 전차를 부설한 콜브런과 보스트위크를 알게 되어 식사 초대를 받기도 했다고 하니, 콜브런이 들여와 타던 자동차를 빌린 것이 아닌가 한다.

1901년에 서울에 자동차가 있었다는 사실이 1986년에야 밝혀졌다.

바퀴달린 쇠귀신, 구중궁궐의 구경거리가 되자.

공식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는 고종의 어차로, 1903년에 미국에서 들 여온 포드 또는 캐딜락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고종이 어차를 처음 들여온 것은 1903년, 고종황제 즉위 40 주년을 기념하는 나라 잔치인 ' 칭경예식(稱慶禮式)' 때였다. 잔치를 준비하던 개화파의 몇몇 대신들이 유럽의 임금들이 탄다는 자동차를 한 대 들여와 칭경예식 행사장인 광무대 행차에 주상을 태워 모시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고종은 빈약한 국고를 걱정했지만, 대신들이 거듭 주청하자 자동차 도입을 허락했다. 그러나 비행기가 없던 시절이라 미국에서 건너오는 고종의 자동차는 칭경예식이 끝나고도 4개월 후에야 배에 실려 도착했다. 게다가 수구파 대신들이 '임금님의 행차는 법도를 갖추고 장엄해야 하는데, 자동차 한 대만 타고 납신다는 것은 경망스럽다' 고 거세게 반대하여, 결국 고종의 어차는 궁궐 안 한쪽 구석에 방치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대궐을 출입하던 궁인과 상인들에 의해 '궁궐 안에는 나팔 울음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바퀴 네 개 달린 쇠귀신이 있다'는 소문만 장안에 퍼졌을 뿐, 백성들은 고종이 자동차를 타고 외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04년 러일전쟁 북새동에 이 최초의 어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