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 토요일 13:00~15:00 인천시민애집에서 인천 화교 생활사, 개항장에서 오늘까지 라는 주제의 시민강좌가 있었습니다. 재한중국인 3세(거의 한국인에 가까운 그렇지만 중국인으로서 본 화교의 내용들이 너무 잘 나타나 있어 중요한 내용이라 그 내용을 적어봅니다.
인천화교생활사 강좌 제1강
인천화교사회의 형성
화교협회 부회장 주희풍
1. 재한화교란 누구인가?
화교(華橋)는 해외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유지하는 중국인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한국화교'는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 '미국화교'는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뜻 한다.
그러나 '대만화교(臺灣華僑)'라는 표현은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독특한 용어이다.
대만화교란 대만에 사는 중국동포라는 직역이 아니라 92년 이후(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서 온 화교 중국화교와 비교하려고 대만화교라 불리운다.
1971년 유엔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면서 중화민국(대만)은 국제사회에서 중국 대표권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여전히 대만을 중국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한화교들은 본적은 중국, 국적은 대만인 상태에서 자신들을 중국인으로 인식하며 살아왔다.
1992년 한중수교 이주 한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하였다. 이로써 한국 사회에는 두개의 학교 집단이 공존하게 되었다.
하나는 1880년대부터 한국에 정착해 4~5 대째 살아오고 있는 대만 국적의 재한화교이고, 다른 하나는 1990년대 이후 새롭게 유입된 중국 국적의 화교·화인이다.
현재 한국에는 약 1만 5천명의 대만 국적 재한화교와 약 95만 명의 중국 국적 화교·화인이 거주하고 있다.
재한화교는 단순한 외국인 집단이 아니라, 140여 년 동만 한국 사회와 함께 살아오며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해 온 역사적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다.
대만화교는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 한국에서 볼땐 외국인 중국인이다. 주민등록증이 안나오고 외국인 등록증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1955년부터 왹구인등록증 제도가 시행되었다.
그 1955년이 단기 4288 즉 속칭 쌍팔년도라고 부르던 년도이다.
일단 출생하게 되면 화교협회에 출생신고를 한다. 화교협회는 우리나라로 볼 때 복지센터에 해당한다. 그러면 대만에서 여권이 나온다. 대만에서 전혀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화교협회의 통보에 의해 여권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 그 여권에 의해 한국에서 외국인 등룩증을 발급받게 된다. 아버지가 영주권자이면 자식도 영주권이 나오고 장기체류자이면 장기체류자로 등록된다.
그러나 타이완의 신분증(바코드가 있다,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증)은 없다. 대만화교가 대만으로 갈 때 입국허가서를 받고 가야한다.
2. 재한화교의 시작과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재한화교의 역사는 1882년 조선과 청나라가 체결한 「조중상민수록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에서 시작된다.
이 조약은 청나라 상인들의 통상권과 거주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최초의 협정이었다. 또한 오늘날의 비자에 해당하는 집조(執照) 제도가 도입되었다.
1884년 정월 후베이성(湖北省)과 장쑤성(江蘇省) 출신의 서한산(徐漢山)과 대금명(戴金明)이 제1호와 제2호 집조를 발급받았다.
집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제4조에 따라 인천부 경계 약 200~300리 이내에서 토산물을 구매할 수 있도록 허가한다."
이들은 공식 기록상 최초의 재한화상으로 기록된다.
1882년 조중상민수록무역장정 체결 이후 화상(華商)과 목창(木廠)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한성에 상점과 기와·벽돌 공장을 세우며 경제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인천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다.
3. 인천 화상지계의 설치와 선린동의 탄생
1883년 청나라는 현재의 인천 선린동 일대에 화상지계를 계획하었다.
1884년 4월 2일 조선과 청나라는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草商地界章程)」을 체결 하고 인천 화상지계를 설치하였다.
덕흥호사건 ~ 부산에서 개업 못하게 해서 일본에서 방해 함, 그래서 1884년 인천부 화상지계 맺음
화상지계는 현재의 인천 중구 선린동 일대이며, 응봉산 서남쪽에 위치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조선 민가 16호와 미국인 1명만 거주하고 있었다.
미국인 합하가 대만근대사연구소에 나와있다.
천진의 조선촌 자료(우리나라에 차이나타운이 있듯이 천진에 조선촌이 있었다. 인천화상조게, 지계 규장각 자료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지세 지불한 내용
지계로 불리우다가 원세계 오고나서 조계로 불리움, 일본인은 거류민으로 표기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은 인천을 중국 산둥반도와 서울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판단하고 조계 설치를 적극 추진하였다.
그는 인천을 "발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 엔타이와 하루 거리이며, 서울과 백리도 채 되지 않는 중요한 거점"으로 평가하였다.
이 무렵 조선은 청나라 텐진(天津)에 조선주천진공관(朝鮮駐天津公館)을 설치하여 양국 간 외교 및 통상 관계를 강화하였다.
공관에는 대원(大員) 남정철(南延哲)을 비롯하여 종사관(從事官) 박재순(朴載純), 서기관(書記官) 성기운(成岐運), 반상(伴徜) 박창규(朴晶奎)·이재환(李載煥)、통사(通事) 박영조(朴永祚), 수종(隨從) 만흥(萬興)·봉인(鳳仁)·학신(學臣)·용석(用石) 등이 근무하였다.
이는 단순한 외교기관의 설치를 넘어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 및 통상 관계가 제도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인천 화교 거주지역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1884년 : 화상지계(華商地界)
1890년대 : 조계(租界)
1910년 : 청국거류지(清國居留地)
1914년 : 지나정(支那町) 인도언어로 “치나” 위대한 나라라는 뜻이다.
1937년 : 미생정(彌生町) 중국인의 조상이 일본사람이다. 일본 조상이 미생인이다 라는 내용.
1946년 : 선린동(善隣洞)
'선린(善隣)'은 『좌전(左傳)』 의 「친인선린 국지보야(親仁善隣 國之寶也)」 에서 유래하였으며, "어진 이틀 가까이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나라의 보배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미국인 합하가 대만근대사연구소에 나와있다.
천진의 조선촌 자료(우리나라에 차이나타운이 있듯이 천진에 조선촌이 있었다. 인천화상조게, 지계 규장각 자료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지세 지불한 내용
지계로 불리우다가 원세계 오고나서 조계로 불리움, 일본인은 거류민으로 표기
4. 삼방과 중화회관의 설립
초기 화교사회는 출신 지역에 따라 삼방(三幫)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광방(廣幇)은 광동성 출신 화상들, 남방(南幇)은 상하이 · 장쑤성 · 저장성 · 후베이성 · 푸젠 성 · 후난성 등 화남 지역 출신 화상들. 북방(北京)은 산동성 · 허베이성 · 텐진 · 동북 지역 출신 화상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공동 지금을 모아 서울의 중화회관을 설립하는 동시에 현재 선린동 일대의 평지(平地) 작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지란 땅을 평평하게 다지거나 석축을 쌓아 건축이 가능한 터를 만드는 작업을 의미 한다.
당시 일본과 서구 열강은 자신들의 조계지로 화상들을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였으며, 청나라 역시 적극적인 화상 유치 정책을 펼쳤다.
5. 초기 인천 화교사회의 모습
1884년 음력 5월 무렵 현재의 선린동에는 약 12개의 삼점이 운영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상점은 다음과 같다.
왕흥륭 세탁작업(王興隆洗衣作)
대합순 정육점(戴合順猪肉店)
서홍성 정육점(徐洪盛肉店)
이상 목재소(李詳木店)
이들 상정은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외국 군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였다.
특히 대합순과 서홍성 정육점은 최초의 화상인 서한산과 대금명이 운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6. 화농과 화공, 그리고 생활문화의 형성
인천 화교사회는 화상(華商) 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화능(華農)과 부두 및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화공(華工) 들 역시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화농들은 주로 현재의 미추홀구 일대에 정착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앙파, 결구배추. 당근. 피망 등 당시 조선에서는 생소했던 채소들을 재배하여 신포시장(현재의 신포국제시장)등을 중심으로 판매하였다.
결구배추-김장하는데 좋다, 조선배추-얼갈이에 좋다
화농들이 재배한 채소는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식당의 주요 식재료로 사용되었으며 점차 한국인의 식생활에도 영항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화교들은 단순한 음식 판매를 넘어 포판회석(包辦會席)이라는 독특한 연회 문화를 발전시켰다. 포판회석은 결혼식, 회갑연, 각종 경축 행사 등에 필요한 음식과 연회 진행을 일괄적 으로 담당하는 방식으로, 당시 인천의 대표적인 고급 연회 문화로 자리 잡았다.
한편 화공들은 부두 노동과 건축 현장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목창(木廠)으로 불린 화교 건축업자들은 근대 건축물 건설에 참여하였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건축물들이 있다. 답동성당, 명동성당,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답동성당 프랑스인이 설계 시공자 중국인, 그렇듯이 많은 건물들을 중국인이 시공했다.
이들은 서양식 벽돌 건축 기술과 시공 기술을 도입하며 한국 근대 건축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화상, 화농, 화공들은 각각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화상 : 상무총회(商務總會)
화농 : 중화농회(中華農會)
화공 : 중화노공형회(中華勞工協會)
이들 조직은 단순한 직업 단체를 넘어 교육, 복지, 상호부조 기능을 수행하며 화교사회의 자치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인천 화교사회는 상업 중심의 집단이 아니라, 무역 · 농업 · 건축 · 노동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생활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7. 인천 중화회관의 설립과 공동체의 성장
1905년 인천의 삼방은 1894년 이후 방치되어 있던 조선 최초의 전보기관인 한성전보 총국(漢城電報摠局) 인천분국(仁川分局)을 수리하여 인천 중화회관(中華會館)을 설립 하였다.
현재 인천화교협회가 위치한 선린동 8번지 일대이며, 오늘날 인천화교협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화회관에는 삼방의 회의실과 도서관. 열람실. 인천화교학교의 전신인 화영학당(華英學堂), 구락부(俱樂部). 남방회관(南幇會館) 등이 운영되었다.
1906년의 지출 내역을 보면 교사 급여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순찰원 및 포도(浦盜)의 급여, 청소부와 정화조 청소부의 인건비, 야경꾼 임금. 전화비, 가로등 유지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동공사에 납부했다.
이를 통해 당시 인천 화교사회가 이미 교육 · 행정 · 치안 · 생활기반을 갖춘 자치 공동체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선린동에는 원단 상징 16곳, 수입품 상점 3곳. 잡화점 57곳, 객잔 6곳. 주점 6곳 등이 운영되고 있었다.
또한 156가호, 약 540명이 밭농사에 종사하였으며, 상호 91곳, 242가구, 남성 1,509명, 여성 58명, 한국과 중국을 왕래하는 인원 약 15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8. 교육 · 종교 · 복지 공동체의 형성
화교사회는 일찍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1906년 인천과 한성에 최초의 화교학교가 설립되어 중국어와 영어, 기초 학문을 교육 하였다.
현재도 전국의 화교학교에서는 중화민국 교육과정과 일부 한국 교육과정을 병행하여 운영하고 있다.
종교 역시 공동체의 중요한 축이었다.
1917년 6월 3일 인천중화기독교회가 설립되어 인천 유일의 중국인 교회로 자리 잡았다.
1917년 창립 2002년에 없어짐
가톨릭의 경우 1960년 7월 17일 메리놀회가 선린성당을 설립하였고, 1966년 현재의 성당 건물이 완공되었다.
인천화교천주교 명칭 변경 해안성당 성당 안쪽에 화교양로원이 있었는데 덕적도로 감
미국 우너조로 텍사스 모자 쓰고 사진 찍은 것 있음 이 거리를 텍사스거리라 불리움
또한 의선당(義善堂)은 빈민 구제. 고아 보호. 환자 지원, 장례와 묘지 관리 등을 담당하며 화교사회의 상호부조 체계를 구축하였다.
의선당 기와유리화 황제 중국에서 보내줘 교체 함
이교 지움 1926년전 아편에서 구제 인천에만 남아 잇?음
인천 의선당 1916년 설립, 1927년에 옮겨 옴
경성 거선당 명동 5층 짜리 건물 한달에 집세만 4천만원 나옴
인천 삼선당도 있었다. 편액 연구로
원산의 보선당
아편 끊으려 약 만들어 주었던 곳 이교로 시작해 불교로 바큄
이교 제자 필씨(중화) 살아계심
9,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한 재한화교
재한화교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대일항쟁기, 두 차례 세계대전, 그리고 6.25전쟁을 한국인들과 함께 겪었다.
대일항쟁기에는 일동회(日東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조직원 네 명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S.C. (SEOUL CHINESE) 부대 명의로 참전하여 1 . 4 후퇴에도 함께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공헌은 오늘날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10. 박정희 시대와 재한화교의 변화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 제한 정책 등을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화상과 화농들은 토지를 처분하고 생업을 바꿔야 했다.
많은 화교들이 100평 이하의 소규모 중식당을 운영하게 되었고, 재한화교는 점차 '중국집'과 " 짜장면"의 이미지로 고착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140여년 동안 한국 사회와 함께 살아온 공동체의 깊은 역사가 존재한다.
11. 재한화교를 다시 바라보다
재한화교는 단순한 외국인이 아니다.
개항 이후 14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와 함께 살아오며 경제, 교육, 건축, 농업. 음식문화, 종교, 독립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재한화교의 역사는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오늘날의 한국을 함께 만들어 온 또 하나의 우리의 역사이다.
이제는 잊혀진 이름이 된 재한화교를 다시 기억하고, 그 존재를 제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인천 화교사회는 외국인의 역사가 아니라, 인천과 함께 성장해 온 인천의 역사이며, 재한화교의 역사는 곧 한국 근현대사의 또 다른 한 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