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 장
완전한 때에 도살할 양으로
죽는 자만 이김으로
살아난다는 불편한 진실 (3)
창세기 1장에서 일곱 언약은 하나의 뜻이다. 똑같은 말을 일곱 번 반복한 것을 언약이라고 한다. 율법에서는 두 번 말 하면 확실한 것이다. 요한복음은 ‘사랑의 완성’ 책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책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라고 두 번 말씀하신다. / 그런데 일곱 번 말하면 그것은 확실한 언약이다. 하나로 설명해 주신 하나님이 창세기 2장부터 아담과 하와라는 사람을 동원하신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이쉬, אִישׁ, 이솨, אִשָּׁה’]가 나오지 ‘아담과 하와’가 나오지 않는다. [‘자칼, זָכָר, 네케바, נְקֵבָה’]가 나온다.
註: 남자 '자칼'(זָכָר)은 '기억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여자 '네케바'(נְקֵבָה)는 '지명하다', '표현(말)하다', '저주하다', '찌르다, 구멍을 뚫다' 등의 뜻을 갖고 있다. / 남자 '이쉬'(אִישׁ)는 남성 명사 에노쉬(אֱנוֹשׁ)에서 온 말이며, 에노쉬는 동사 아나쉬(אָנַשׁ)에서 온 말이다. 이는 "치유 불가능한, 구제불능의(incurable), 자포자기한(desperate), 극단적으로 사악한(desperately wicked), 비참한(woeful)" 존재라는 뜻이다. 출처 : 본헤럴드(http://www.bonhd.net)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교보재로 등장시키고 선악과나무를 재료로 사용하여 ‘하나’를 성취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신다. / 그리고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한 나무라고 말한다. 계수나무 한 나무, 짐승 두 마리 - 아담과 하와 - 그렇게 시작하신다.
선악과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아래의 것, 아래의 물, 땅, 바다, 어두움, 아래에서 기는 것, 날개 있는 새, 큰 물고기 이런 것들을 총칭한다. 이 아래의 것으로 진리를 알라는 말이다. 그래서 선악과가 아주 보기 쉬운 동산 중앙에 있었다. / 그 중앙이 타베크인데 그 단어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윗물과 아랫물 가운데와 똑같은 말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라키아, 궁창]은 성전이다. -> 동산 가운데 서 있는 그 선악과나무는 성전이요, 율법이요, 예수란 말이다. /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나무로 달리신 것이다. 그 나무가 죽어야 거기서 진리의 열매가 열린다. / 아래의 것으로 하늘이 되고 빛이 되고 위의 물을 알고 씨를 뿌리는 풀싹이 된다. / 그런데 어떻게 하면 선악과,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알 수 있나? 그냥은 알 수 없다. 하나님이 그냥 알도록 기대하신 것이 아니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아야 한다. -> 의역: “그걸 먹고 죽어서 선악과는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라!” - 그러면 그게 생명나무 실과이다. / 여기서 죽음이 [무트, מוֹת, 진리가 이루어진다] 이다. => 말씀의 완성. / 그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 완성된다. <- 예수님이 “내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말씀하셨다. / 선악과, 율법이 완성되려면 [무트, 죽음]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선악과를 먹어야 한다.
생명나무 실과는 그 열매가 맺혀야 먹을 수 있을 텐데 창세기에서는 아직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열매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맺힌다. 그러므로 그걸(입에서 맺히는 말씀을) 먹으면 된다. / 진리의 영으로,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이 생명나무 실과이다. 그래서 그분을 첫 열매라고 한다. 우리도 그렇게 열매를 맺는다.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진리를 깨달은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간다. 내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와야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너희는 그 영을 받고 이 역사를 살 것이니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말씀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일을 하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게 된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는 그게(생명나무 열매?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 뭔지를 깨닫는 자로 등장한다. 처음에 그들은 바느질하여 엮은 치마를 입었다. 그것은 인간이 노력하여 만든 것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는 뜻이다. 그것은 율법을 의미한다. / 그래서 하나님이 바느질하지 않은 옷을 입히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그 치마는 그런 말(바느질했다는 말?)이 없다. / 제사장들이 호지 않은 옷을 입었는데 그 옷은 하나님이 입혀 주신 것이다. 아들의 피로(아들의 희생으로) 만든 즉, 무죄한 제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이다. -> 첫 번째 제사는 하나님이 (아들의 피로) 드린 제사이다. 그것은 “모든 제사는 바로 이런 제사이다”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 제사가 무엇인지를 완료시키는 게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제사의 완료이다.)
-> 제사는 우리의 것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고 은혜 앞에서 죽으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입혀 주셔야 한다. 그러면 그 은혜가 죽음을 감싸서 (우리를) 참 생명으로 일으켜 세울 것이다.
창세기 4장에는 제사에 실패한 인물 ‘가인’이 나온다. 창세기 1장에서 일곱 말이 주어지고, 2장과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선악과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 말은 너희들의 힘과 노력으로 따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 진리, 일곱 약속, 언약이라는 것은 절대 너희의 노력으로 따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를 가르쳐준다. / 아담과 하와가 따 먹어 보겠다고 먹었는데 잘못 먹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게 아니지” 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그들에게 올바른 옷을 입혀 주는 것이 2-3장이다. / 4장에는 그걸 따 먹고 절대 굽히지 않는 인물 ‘가인’이 나온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때려 죽인다. 자기 제사를 지키기 위해 죽인다. 그게 율법이다. 성전을 지키겠다고, 내 제사 지키겠다고 한 것이다. 나의 제사를 왜 가치 없다고 안 받아주느냐고 따진다. “나를 희생하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왜 내 것을 가치 없이 여겨요? 왜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그래서 아들(아벨)을 형제를 죽인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들이고 율법으로 먹었으니 그것 역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 [‘헤벨, הֶבֶל, 텅 빈, 공허한, 덧없는]을 추적해서 올라가면 제물이라는 말이다. / 헤벨이라는 존재는 텅 빈, 공허한 제물로 온 어떤 존재, 죽기 위해 온 아들이다. -> 마땅히 죽어야 한다. /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다. 그분이 죽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율법으로 구원을 성취해야 했다. / 그분이 죽고 은혜로 받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선물로 그 생명을 받은 것이다. / 헤벨이라는 제물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 내 제사를 지키기 위해 그 아들을 죽여 버리면, 내 행위로 죽여 버리면, 그게 멸망이요 저주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들이 선악의 주체가 되어 보겠다고 그것을 먹어버린 그 사건은 그분의 말씀을 초개처럼 죽여 버린 것이다. / 요한복음에서 말씀은 아들이라고 한다. 그들도 아들을 죽여 버렸기에 말씀이 아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인도 아들을 죽였다. 둘이 똑같은 짓을 한 것이다. / 그런데 어떤 이는 호지 않은 옷, 무죄한 짐승의 피로 만든 옷을 은혜로 입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게 뭔지를 모른다. 결국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욕을 먹은 건 그가 한 그 일 때문이 아니다.
“그래 그 아들은 마땅히 너에게 죽어야 해. 그게 네 한계거든. 그런데 네가 한 그 일이 뭔지 아니?"라고 물어보신다. / 성경에 이 말은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고 나와 있다. -> 사실은 그런 말이 아니라 “네 형제 아벨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 “네가 죽인 그 아들 헤벨이, 그 제물이 뭐니?" “너 나에게 네 제사 지키겠다고 네 동생을 때려죽였다. 그럼 네 제물, 나에게 드린다는 그 제물이 도대체 뭐야?" / 네 제물 지키겠다고 죽인 그 제물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가인이 모른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동쪽”이라고 하신다. 동쪽 땅은 그분의 대적자이다. / ‘케뎀, קדם, 앞면, 동쪽, 옛날의, 이전의, 처음에, 시초에,. ~앞에, 상고, 태고, 옛적, 만세전, 영원하다’]라는 단어 자체가 ‘대적하다’라는 뜻이다.
“아이 헤벨 아흐, אָחִ֑יךָ הֶ֣בֶל אֵ֖י” = “헤벨이 무엇이냐?"라는 물으심에 가인이 “로 아다, לֹ֣א יָדַ֔עְתִּי”라고 대답한다, ‘아다, יָדַ֔עְתִּ’ = ‘알다’. -> “난 몰라요”라는 대답이다. 그러면 죽는다. -> 그 아들의 죽음, 그 말씀, 그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면 죽는다. / 우리도 그 예수, 그 아들을 죽인 자들인데 그것으로 벌하신다면 우리는 다 죽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차이점은 이렇다. / 행위로만 보면 그 말씀, 그 아들을 죽였으니 둘이 똑같은 짓을 한 것이다. / 구약, 십계명의 위의 다섯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는 이거 못하겠네요’를 깨달으라고 준 것인데 가인은 그것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한 것이다.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게 뭔지를 깨닫고 (다섯 계명을 못 지키겠다는 것.) 그 아들(예수)의 희생으로 만들어 준 옷을 입는데, 가인은 끝까지 자신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다가 망한다. 다음은 그 둘을 나누는 분수령 같은 말씀이다.
(창3:22-24)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22절은 선악의 주체가 되겠다고 하는 선악 구조 속에 있는, 선악을 분별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 진리를 깨달아 알면 ‘아담과 하와’가 되는 거고 자칼과 네케바가 되지만,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면 4장의 가인이 된다. => 손[야드, יד]을 밖으로 뻗어[솨라흐, 'צָלַח, 돌진하다, 번영하다, 형통하다] 생명 열매를 획득하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건 안 되는 거구나’ 하고 (註: 깨달아) 나에 대해 죽으면 그게 아담과 하와이다. 반면 끝까지 손을 뻗어 내가 그 생명나무 실과를 내 손으로 쟁취하겠다고 하면 (->바느질하는 행위) 그것은 가인이다. / 창세기의 이야기는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 손을 뻗어 생명나무 열매를 내 손으로 쟁취하겠다는 생각이 한마디로 탐심[‘베짜, עצב’]이다. / 바울은 “내가 율법이 ‘탐심이 죄’라는 걸 말해 주지 않았다면 계속 탐심을 가질 뻔했다”라고 말한다. 율법은 “탐심을 갖지 말라”고 한다.
십계명의 마지막도 ‘탐내지 말라’로 끝난다. “성경 전체는 탐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탐내지 않는 것은 너희들 힘으로 안 되는 일이다." / 자기의 손을 뻗어 부정하게 열매를 획득해서 생명에 이르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탐심이고, 그게 율법이며 죄이다. / 그 시도에 성공한 자가 가인이다. 잠시 착각 속의 성공이었지만 말이다. / 그 시도에 실패하고 ‘아, 이건 아니구나’ 하고 깨닫고 죽고 죽어(‘무트 타무트’) 하나님 은혜 앞에 있는 게 아담과 하와였다. / 하나님은 그런 자를 은혜의 옷으로 입혀 주신다.
동쪽으로 쫓겨나서 거기에 정착한 가인의 후예는 전부 승승장구한다. 정치, 경제, 문화, 농업, 예술 분야에서 대장이 된다. 4장 말미에 가인의 후예들의 족보가 나온다.
아담의 후예들은 역사 속에서 계속 죽는 것으로 나온다.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무트 타무트이다.) -> 그게 바울이 쓴 “날마다 죽노라”의 의미이다. / 아담의 후예들은 계속 죽지만 가인의 후예들은 계속 살아난다. 손을 뻗어 따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 문명이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진짜 죽는 것이다.
예전에 다석 유영모 선생이 “대한민국은 TV와 신문 때문에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요즘에는 인터넷도 들어가야 할 것이다.) 요즘엔 TV가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한다. 아내가 남편 말은 안 들어도 TV에 어떤 박사가 나와서 이야기하는 건 다 듣는다. 그런데 어떤 이가 거기서 정설이라고 하는 90% 이상이 음모라고 했다. 어떤 의사는 “의사 말 듣지 마세요. 의사들은 약을 권하고 수술도 권하지만 자기들은 정작 수술 안 하고 약도 안 먹는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바보상자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속에서도 아들이신 말씀(예수)이 죽었다. 그 아들의 죽음은 가죽옷이 되어 그들에게 입혀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 율법은 어기라고 준 것이고 선악과는 먹으라고 준 것이다. ‘아들의 죽음’이 뭔지 알면 의의 흰옷을 입게 된다. -> 아들을 죽인 자가 아들이 되는 것. / 가인의 이야기 속에서도 똑같이 아들이 죽는다. 그 아들의 피(註: 가인의 피? 아벨의 피?)는 땅속에서 신원하는 복수의 피가 되고 의의 계보에 들어오지 못한다. 진리의 겉옷을 입지 못하고 땅속에서 복수를 신원하는 피가 되어 버렸다. ‘아들의 죽음’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와 같다.
<장자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죽음>
어린양은 아들의 대표이고 장자의 예표였다. 애굽의 장자들이 모조리 죽었다. 이스라엘도 아들(어린양)의 죽음으로 나오게 된다.
애굽의 장자의 죽음 = 스스로 자기를 죽여, 율법으로 자기를 희생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겠다는 율법의 죽음 (註: 율법에 따른 죽음, 율법적인 죽음)
이스라엘의 죽음 = “아들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네요”라고 그 은혜 앞에 바짝 엎드리는 자기 부정의 죽음.
--> 둘 다 아들이 죽는 것. / 애굽의 장자가 죽으면 하나님의 장자가 될 진짜 내가 죽고 나를 살릴 진짜 아들을 죽여 버리는 것 => 율법주의.
이어지는 것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이다.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깊음이 터져 버리고 위의 물이 내려온다. / 원래 갈라놓은 것인데 하늘의 물이 아래의 물과 섞이면 심판이다. 율법이다. / 그래서 율법을 술이라 하고, 누룩이 들어 있다고 한다. 섞이면 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