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1 장
아나데마 (5)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처럼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아주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이 아래엔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주(註) 열림 ========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주: <-> 한 사람의 범죄,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사망이 들어왔다. 롬5:15, 17, 19. /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2:16 / 선악과는 먹으면 정녕 죽는다. 창2:17)
김목사의 “이 아래엔 그것밖에 없었다”는 설명은 ‘아래 세상에는 선악과밖에 다른 실과가 없었고, 아벨을 죽이는 것밖에 달리할 것이 없었다’라고 설명하는 듯하다. 더구나 “이 두 가지 사건은 아주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라고 강조되어 있다. / 김목사는 동산 중앙에는 선악과나무밖에 없었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여 왔다. 그리고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동일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근거로 히브리어 성경 원문에는 그 나무가 단수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참조: 창2:9 영어성경 원문 KJV & NIV) 그리고 선악과를 먼저 따먹어야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창2:9-개역한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KJV (단수로 표기.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로 구분하여 별개로 표기)
And out of the ground made the LORD God to grow every tree that is pleasant to the sight,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fe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2:9-NIV (복수로 표기,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별개로 표기 않음)
The LORD God made all kinds of trees grow out of the ground—trees that were pleasing to the eye and good for food. In the middle of the garden were the tree of life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이 두 가지 사건은 아주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김성수 목사의 [에피뒤미아, ἐπιθυμία, 탐심]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부터 ‘에피뒤미아’를 인간의 원천적 속성으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놓여진 아담과 하와는 창조의 초기에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지만, 그 본성적 에피뒤미아로 인해 언젠가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 있었다.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라는 설명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도 바로 이 타고난 본성적 에피뒤미아에 의해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된다. /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에피뒤미아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라는 설명이다. -> 기존의 죄론(원죄론)을 뛰어넘는 웅숭깊은 죄론이 소개된 것이고 기존의 신학은 허리를 동여매고 겸손하게 그의 신학을 재조명해 보아야 한다. (‘에피뒤미아론’은 원죄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보완적,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 주(註) 닫음 ========
가인은 땅의 열매,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그러나 땅의 소산으로 드리면 안 된다. / 아벨은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다. 첫 새끼는 장자란 뜻이고 기름은 진리요 말씀이다. / 원문을 보면 아벨이 첫 새끼와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고 나온다. -> 그가 장자로, 진리로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제물이 되었다. ->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하나님은 그 제사만 받으신다. /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그걸 ‘산제사’라고 한다. 거룩한 산제사. 그걸 영적 예배라고 하는데 ‘산제사’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 영적 예배 = [‘라트레이아, λατρεια’] = 진리로 소통하는 예배.
[‘세바조마이, σεβάζομαι’] = 진리를 내 마음에 가져 나 자체, 내 삶이 예배가 되는 상태 / 여러분과 내가 ‘세바조마이’의 상태가 되면 ‘성령과 진리’로(‘신령과 진정’으로) [‘프로스퀴네오, προσκυνέω, 예배’]하는 ‘화답 예배’가 요구될 것이다. 그때가 온다. / 너희 자체가 제물이 되고 예배가 되면, 너희가 세바조마이의 상태가 되면 너희들에게는 이제 성령과 진리로 ‘프로스퀴네오’하는 화답예배를 하게 된다. / 그런데 성경을 배우는 것에만 집중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지적 허영을 만족시키는 영지주의에 머무르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 자유를 가지고 이 예배를 드려야 한다. / 내가 강대상에서 진리를 전하고(얘기하고) 여러분이 거기에 화답하는 이러한 소통을 [‘라트레이아, λατρεια, 영적예배’] 라고 한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영적 예배를 요구하신다. 아벨이 기름(진리, 말씀)과 장자로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 // 아벨은 인과 지팡이를 내놓고, 가인은 염소를 내놓았다. / 자기가 드리는 그 제물이 뭔지 모르니까 자기가 바친 제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 말고 다른 제물을 드리는 자를 죽여야 한다. -> 그래서 벌어진 게 ‘하나님 살해 사건’이다. ‘인간의 예수 살해 사건.’ / 우리는 당연히 그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다. 그 진리를 알면 마땅히 그 예수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그 예수를 섬기지 않고 내 안에 마음으로, 진리로 가지게 된다.
‘왜 나는 아벨과 다른 제물을 드렸으며, 왜 그 제물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아 알지 못하면 나는 살인자가 된다. 하나님은 그 살인자를 ‘마귀’, ‘비진리’라고 했다. 그래서 유다가 예수를 팔아버리는 내용이 신약에 등장한다.
유다, 가인, 요셉, 야곱. 그 유다가 그 유다이다. 우리가 그 유다이다. 모든 아담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넘기게 되어 있다. / [‘파라디도미, παραδίδωμι’] = ‘팔다, 넘겨주다’ / 유다가 안 팔면 사람들이 그 예수 얼굴 몰랐나? -> 넘겨주었다는 말이다. / 다른 제자들도 저주하며 넘겨줬다. 다 부인했다.
그러면 내가 왜 예수를 그 죽음에 넘길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이 불의 혀처럼 임함과 동시에 자기들이 그렇게 세 번이나 철저하게 (완벽하게) 그분을 부인한 게 어떤 일인지를 알았다. / 유다는 그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오시기 전에 죽어버렸다. 그가 자살했기 때문에 유다는 마귀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이 와서 유다가 다른 열한 명의 제자들처럼 그게 뭔지를 알았으면 그 유다나 다른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이다. / 그런데 유다는 진리의 성령을 인으로 받지 못하고 죽었다. 진짜 복은 그 진리를 알고 죽는 것이다.
복은 하나님이 제물이 되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이 한 곳, 에덴동산(= 하나님의 성전)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 ‘행복’의 ‘행(幸)’자는 ‘어려서 죽지 않는다’란 말이다. 이것은 ‘아기 때 죽지 않는 게 복’이라는 말이 아니다. / 진리를 아는 자를 어른이라고 한다. // 진리를 듣지 못하고, 그게 뭔지 모르는 상태를 젖 먹는 어린아이라 한다. / 어린아이로 죽으면 그게 불행이다. 어린아이 때 죽지 않고 진리를 알고, 진리를 안 자(장로)가 되어 죽으면 복이다. -> 우리는 반드시 진리를 알아야 한다. 유다가 진리를 모르고 죽었기 때문에 마귀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성령이 오시기 전에, 진리를 깨닫기 전에 죽은 것이다.
바울의 글> 우리 조상들은 ‘아나데마’의 삶을 살면서 그 삶을 진리로 깨달아서 하늘의 별들로 살았다. 우리 조상들이 그 인과 지팡이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아 하늘의 별들이 됐다. / 나(바울)도 너희들에게 그런 ‘아나데마’의 존재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너희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고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 아래의 것들과 아래의 개념들을 위의 것으로 깨달아 알면 그게 구원이다. / 너희는 모형으로 주어진 양자,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이런 것들을 너희들의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천사가 뭔지 부활이 뭔지 이런 걸로 싸움만 하고 있으면서 나는 구원 받았다느니, 영생을 가졌다느니 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안타깝지 않겠느냐? / 내가 전하는 그 내용이 [‘알레떼이야, λήθεια, 진리’]야. 그러니 ‘내 말을 들어라.’
이 세상은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꿈같은 것이다. 환상 같은 것이다. / 그래서 성경이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이 크로노스의 세상을 꿈, 환상이라 한다. / 꿈이나 환상은 지속되지 않는다. 중간에 깨버린다. / 이처럼 우리의 삶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 꿈속에서 여러분이 먹고 싶은 것을 배 터지게 먹었는데 꿈에서 깨어나면 계속 배가 부른가? / 꿈에서 너무 목이 말라 시원하게 해갈했는데 깨어나면 또 물 마셔야 한다. / 꿈속에서 먹은 것은 우리의 현실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 / 꿈속에서 여러분이 선한 일을 많이 했어도 깨어보면 꿈일 뿐이다.
꿈에서 한 일(꿈에서 먹은 것, 꿈에서 이루어진 것)은 현실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 여러분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관계, 그토록 많이 상처 받은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 왜 그렇게 사람들은 일관성이 없고, 배신을 일삼고, 험담을 일삼는가? 그게 당연하다. 인간은 그렇다. 그때마다 성경에서 진짜 여러분의 하늘 친구를 찾아보라. 그들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변치 않는 내 친구들이 그 안에 다 있다. 성도의 인간관계는 그렇게 맺는 것이다. 여기서 상처받고, 저기서 오해받고 그런 것에 너무 개의치 말자. 모두 꿈일 뿐이다.
(사29:8) 8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같이 시온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
오늘날 생명의 양식을 전해준다고 하는 예배당에서의 설교가 전부 인간의 육신과 그들의 욕심과 이 세상일에 관한 도덕, 윤리,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 이런 것들이다. 꿈같은 세상에서 꿈 얘기만 하고 있으니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 교회는 그런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인생을 남들도 존경하는 훌륭한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아나 티데미, 아래의 것’]이다. 위의 것을 설명해주기 위해 하나님이 잠시 허락하신 것일 뿐이다.
얼마 전에 로마 카톨릭이 라틴어 미사를 없앴다. 그전까지는 온 세상에 있는 성당이 전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다. 설교도 교황청에서 일괄적으로 내려주는 라틴어 설교를 그냥 읽어줬다.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 그런데 다들 은혜를 받았다. 헌금도 도에 지나칠 정도로 냈다.
그런데 어느 날 “각자 너희들 말로 하라”고 해서 각 교구에서 자기 나라말로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더니, 사람들이 내놓은 첫 번째 반응이 그냥 옛날처럼 못 알아듣게 라틴어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때가 훨씬 은혜로워. 사람의 말로 들으니까 배가 고파. 그냥 그건 그거겠거니 하고 추측할 때가 훨씬 은혜롭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해봐야 배고파 죽겠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현실은 이 크로노스의 세상이 아니라 영원(永遠)이다. 그 영원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생의 꿈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면 된다. 그러면 여러분이 영생, 영원의 주인이 된다. / 우리는 그 영원을 현실의 연장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 영원의 세계도 이 세상 것들로 막연히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그런 것들이 풍성하게 제공되는 곳’처럼 이 유한한 세계의 것들로 그 무한한 세계의 것을 쟁취해 내려고 애쓰고 있다. / 그러나 그것은 이 유한한 세계의 그 어떤 것, 꿈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도 쟁취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하늘의 것이다.
우리 육신과 이 세상은 이스라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부정당하기 위해 존재한다. / ‘아, 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그 민족적인 이스라엘이 아니었구나. 그때는 성 밖은 다 이방인. 성 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에게 [‘아나 티데미.’ ‘아나데마’ => 아래의 것]으로 설명해 주었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영적 이스라엘)를 설명하는 것이었구나.’라고 알면 그 이스라엘이 부정되는 것이다. / 우리의 욕심도 마찬가지로 그게 부정되어야 그 안의 보물인 진리의 하나님이 영광으로 나타나시게 된다.
‘아나데마’, 하늘을 그려내는 도구로써의 삶, 그리고 모든 것을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그 인과 지팡이로 그게(진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줄 수 있다. / 하나님은 “너희들이 스스로 그걸(진리를) 알면 너희들이 꿈속에서 행한 일들은 못 본 걸로 해줄게.”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지금 불안해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그동안 살아온 그 시간과,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 또 내가 원하지만 되지 않은 것들 때문이다. / 만일 여러분이 무슨 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앞으로 살 시간밖에 모른다고 하자. 그때도 여러분이 지금처럼 아파할까? /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잊었고, 너희들도 잊으라고 하신다. 그것은 너희 자신도 너를 용서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새록새록 기억해 내고 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 모든 죄가 모두 해결되면 여러분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 그리고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이 꿈속에서(이 세상에서) 그렇게 진행된 것인데, 그 시나리오에 대로 행한 일을 가지고 “너 왜 그런 일 했니? 왜 그런 죄를 저질렀어?” 하고 질책할 수 있는가? // 그걸 아는 사람이 어떻게 ‘이제는 내 맘대로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그 더러운, 지저분한 일을 합리화, 정당화 시키기 위해 그 귀한 진리를 갖다 붙이느냐는 말이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진리를 던져도, 복음을 던져도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끌어다 써먹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주: 에피뒤미아는 못 말린다.)
바울이 원하는 것처럼 나도 간절히 원한다. 제발 그 진리를 바로 알아듣고, 그 자유와 기쁨, 평안으로 열심히 살아가자. 사람답게 사는 것 그 이상으로 더 성실하게 살아가자. 누가 막살아도 된다 그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화지이다. 그 역할 잘하고 가서 그 印과 지팡이 내어놓으면서 “하나님, 잘 봤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저는 이런 존재고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면 그게 영원이고 완성이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내려주시며, 인생의 의미와 하늘의 뜻을 설명해 주시고 계시해 주시려 애쓰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가 무지하여 스스로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 진리로 자유를 얻게 하시고, 이 세상 속에서 조금 더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송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