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강해노트 (28-2)
5리, 10리, 구하는 자, 꾸는 자
원저자: 김성수 목사 / 편집자: 카이로스
오늘 본문의 ‘짝’ 이야기를 구약에서 찾아보자.
(민 35:1-5) 1 여호와께서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얻은 기업에서 레위인에게 거할 성읍들을 주게 하고 너희는 또 그 성읍 사면의 들을 레위인에게 주어서 3 성읍으로는 그들의 거처가 되게 하고 들로는 그들의 가축과 물산과 짐승들을 둘 곳이 되게 할 것이라 4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들의 들은 성벽에서부터 밖으로 사면 이천 규빗이라 5 성을 중앙에 두고 성 밖 동편으로 이천 규빗, 남편으로 이천 규빗, 서편으로 이천 규빗, 북편으로 이천 규빗을 측량할지니 이는 그들의 성읍의 들이며
1절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시작하는 단어가 ‘다바르’이고 끝나는 단어가 ‘아마르’이다. ‘아마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가리킨다. 반면에 ‘다바르’는 그 ‘아마르’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된 도구를 통해 전해지는 눈에 보이는 말씀을 가리킨다. -> 1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설명해 주겠다는 말이다.
그 말을 흘려주시는 장소가 ‘모압 평지’이다. 평지라고 번역된 ‘아라바’는 광야이다. (이스라엘이 40년간 헤맸던 그 광야는 교회이다.) 그리고 모압은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롯과 그의 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근친상간이 아니다. 원래 아비가 말(씨)을 주는 자니까 우리는 아비와 함께 아들을 낳아야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딸이 아비에게 술을 먹여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그게 나쁜 것이다. 술은 ‘섞인 말’이고 술로 아들을 낳으면 모압이 되는 것이다.) ‘모압’이란 단어를 파자하면 ‘말씀의 아버지’이다. -> ‘모압’은 아버지의 말씀을 설명하는 자인데 그가 술로(누룩 섞인 것으로) 낳은 아들이다. 그게 성전이다. (섞인 술로 만들어진 것은 참된 진리가 아니라 율법이다. -> 섞인 것(아래의 것)으로 모압 광야에서 말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머물러 있는 [옛 성전과 율법] = [술로 낳은 아들, 모압]. 그래서 여호와께서 모압 평지에서 말씀을 주시는 그림이 바로 아래의 것(섞인 것)으로 ‘아마르’를 ‘다바르’해 주시는 형국이다.
지금 레위인들의 성전 구획에 대하여 말씀을 주신다.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에)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므로 성도의 모형이다. (그들이 아들이고, 그 아들들이(레위인들이) 거하는 곳이 성전이다. 그리고 그 성전은 진짜 하늘을 모형 한다.) 지금 하나님은 그들의 처소인 하나님 나라를 치수를 써서 그려주고 계신다. 그 성전의 치수가 동서남북 각각 1,000이다. 개역 성경에는 이천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그 ‘엘레프(אֶלֶף)’라는 단어는 ‘천’이다. 그리고 [황소, 하나]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황소’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모형이다. 그리고 ‘하나’도 하나님의 숫자이다. 그 ‘하나’를 ‘천’으로 쓰기도 하는 것은 ‘천’이 바로 ‘하나’의 완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충만]이 곧 [천]이다. 그래서 ‘천년 왕국’ 하면 그다음에 올 왕국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으로 왕국은 완성이다. (완성된 나라가 천년 왕국이라는 뜻이지 천년 동안 이 땅에서 있을 어떤 왕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 (cf)세대주의가 설명하는 천년 왕국) 베드로가 그것을 이렇게도 설명한다.
(벧후 3:8)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사랑하는 자들아(‘아가페토스’, 사랑이 된 자들아) 주 안에서 ‘하나’라는 날(=빛)이 천이고, 천이 하나의 날(=빛)이다. / [‘미아 헤메라’, μία ἡμέρα]: ‘미아’ = 하나, ‘헤메라’ = 날 / ‘하나(미아)’를 설명하는 그 ‘날(헤메라=[빛, 역사, 호 코스모스])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냥 표피적인 모습으로만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완성된 하늘, 천(1,000)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말라. 나누고 분리하여 너희들 마음대로 정의 내리고 판단하지 말라. 하나가 천이고 천이 하나이다. 그러니까 ’미아 헤메라‘는 ’천‘이라는 짝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그래서 둘은 하나이다. (하루와 천년은 짝이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을 ’낮‘이라 칭하셨다. 그 ’낮‘이라는 단어가 ‘욤’인데 헬라어로 옮기면 ‘헤메라’이다. 날, 빛, 낮 모두 같은 역할이다. (그 날들은 완성된 충만의 천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하나가 천이고, 천이 하나이다.) 빛은 어두움을 드러낸다. 같은 원리로 낮은 밤을 나타낸다. 밤은 낮의 모형이다. 그래서 밤과 낮은 하나이다. 창세기의 첫째 날이 ‘연합’을 말하고 있다면 둘째 날은 ‘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날 이라는 단어가 ‘쉐니(שֵׁנִי)’인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헬라어 ‘듀오(δύο)’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이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깨닫는 것이 둘째 날 곧, 짝이다. 둘째 날에는 하늘의 물과 땅의 물로 갈라져서 짝이 이루어진다. 첫째 것으로 주어진 하늘 아래의 물은 1,000이라는 하늘 위의 물을 담고 있는 모형이다.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이 깨달아지면 둘이 하나로 모아지게 된다. 그 상태가 1,000이다. (천이 하나의 완성이다) 그것을 주님께서 십자가(스타우로스)로 이루셨다. 하나님의 언약이 궁창이라는 휘장을 찢으시고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을 하나로 만드신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 일이다.
창세기의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은 다 언약을 담고 있다. 첫째 날의 ‘빛’은 반드시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어 그 어둠을 없애고, 빛만 충만하게 나타내어 진리로 완성해 낸다. / 둘째 날의 ‘아래의 물’은 ‘위의 물’ 즉, 진리를 설명한다(드러낸다). 이것을 알아낸 사람들이 ‘위의 물’을 받아 위의 물화(化) 되는 것을 짝이라고 한다. 그것이 둘째 날이 담고 있는 언약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아래의 물은 당연히 위의 물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서 하나가 된다. / 셋째 날은 ‘뭍’이 저주의 물이 아닌 하늘의 물을 받아서 하늘이 되고 씨를 담게 된다. 그래서 셋째 날에 씨 가진 채소, ‘제라’라는 개념이 나온다.
그 천(千)이라는 단어 ‘킬리오이’는 사단이 결박당한 ‘천년’이라는 기간에도 쓰인 단어이다. 완벽한 결박을 말한다. 십사만사천에서도 바로 그 ‘킬리오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것은 12×12,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가 의미하던 바가 1,000으로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144,000은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 백성의 이름이다.
(사 60:22)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여기에도 천이 나온다. 이 단어가 민수기 35장의 ‘엘레프’와 똑같은 단어이다. 여기서는 천인데 왜 민수기에서는 이천이라고 번역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작은 자가 천이 된다는 것은 이 땅에 작은 자로 오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으로 완성되는 언약이 성취될 것이라는 말이다.
‘천(엘레프, אֶלֶף)’은 [하늘, 하나님, 충만, 완성]이다. 그것을 성전으로 주셨다. 그래서 레위인의 성전 구획에서 사방이 ‘천(엘레프)’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그 첫 번째 천으로 ‘충만의 천’을 알아먹는 이가 없다. 진리가 오기 전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 그래서 그 첫 번째 천 안에서 사람들이 ‘억지로’ 율법 지키고, 희생 제사 지내면서 죄의 종노릇 하고 있다. 그렇게 첫 번째 천(1,000) 안에서 억지로 율법적 삶을 살게 하는 이가 있으면 그 옛 성전의 실체인 진리로 인도하라. 그 일을 십자가가 이루어 낸 것이다. 그게 ‘5리, 10리’ 이야기이다.
옛 성전을 곡해해서 그 안에서 열심히 율법의 종노릇 하고 있는 이가 있으면 그를 옛 성전의 실체인 진리로 인도하라.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다. 겉옷을 넘겨준 것도 예수님이 하셨고, 속옷을 겉옷과 함께 넘겨주는 것도 예수님이 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해 놓으셔야 ‘에스카톨로스 코드란테스,’ 43절이 온다. 그 앞의 것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이다.
민수기 35장에서도 앞의 천은 단수인데 두 번째 천은 전부 쌍수이다. 히브리어의 쌍수는 복수의 개념이 아니라 ‘짝’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천은 천인데 그 1,000 안에 짝으로 다른 진의가 담겨 있다. 1,000이라는 단어 ‘엘레프’는 ‘소’의 뜻도 가지고 있다. 당시에 소는 애굽의 태양신 ‘라아’의 땅에서의 모형이었다. 하나님은 그 소를 가지고 당신을 설명하셨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소가 바로 나다’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뒤에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을 만들어 봐!’ 했더니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소밖에 없었으므로 금소를 만들었다. 그것도 금으로 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끌고 나온 소를 한 마리 가져와서 금으로 치장한 것이다.
귀고리를 내놓아서 소를 만들었다는 것은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저 소로 듣겠습니다.’라는 말이다.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팔찌도 있고 목걸이도 있었는데 굳이 성경이 귀고리만 뺏다. 그것은 이제 소로 듣겠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율법’, ‘소’라는 것이다.
히브리어에는 ‘소’라는 뜻의 단어가 셋이 있다. ‘알렙’이라는 소가 성전으로 제시된 소라면, 보이는 소를 설명하는 소, 일하는 소가 ‘바카르’이다. 그 ‘바카르’의 소에 의해 성전이 의미하는 바를 진리로 깨달아 알게 되면 그 소들 ‘토르’라고 한다. 그 ‘토르’라는 단어는 ‘산비둘기’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산비둘기는 떼를 짓는 습성(=율법주의 아래에서의 인간들의 속성. 자기들끼리 힘을 규합해야 하고, 민주주의 해야 한다,)을 가진 집비둘기와 달리, 항상 짝으로만 다니기 때문에 ‘짝, 진의’라는 의미를 담아 ‘토르’라고 쓴다. 여기에서 ‘토라’가 나왔다. ‘토라’는 율법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성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말씀을 율법으로만 읽으면 글자 그대로 ‘토라’가 되고, 그 말씀 속에 담긴 진리로 그 말씀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짝’이 된다.
이제 [‘밀리언 에이스’, 하나의 천(1,000)] 안에서 억지로 하게 하는 이가 있으면, ‘둘, 짝(듀오)’로 인도하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만 알아들어서 그 천(1,000)의 성전 안에서 억지로 종노릇하는 이가 있으면 진리를 짝으로 전해 주어서 그에게 자유를 주라.’ 그리스도 예수가 그 일을 했다. 이제 진리를 가진 우리도 그 일을 함께해야 한다. 너희에게 겉옷이 주어졌으니 너희도 전해주어야 한다. 짝으로 전해주라는 말이다.
이 많은 내용, 다른 글자, 다른 단어들이 어떻게 전부 하나만 이야기하고 있을까?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가? 어떻게 그 많은 내용이 항상 하나로만 수렴되는가? 다 하나만 이야기하고 있다.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여기서 ‘구하다’라고 번역된 단어가 ‘아이테오(αἰτέω)’인데 그 단어는 단순히 ‘뭘 달라’는 정도가 아니라,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당연히 받아야 할 빚을 요구할 때 쓰는 단어이다. 즉, 당당하게 ‘빚 갚아!’라고 할 때 그 단어를 쓴다. 그렇게 누군가가 우리에게 ‘빚 갚아!’라고 하면 [디도미, δίδωμι, 넘겨주다, 밝히 보이다, 허락하다]’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독처하는 것은 악한 것이므로 반드시 ‘네페쉬’에 내 진리를 넣어서 내 곁의 신부로 만들겠다’는 창세전 언약을 세우셨다. (하나님이 하셨다. 우리가 요구해서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때 있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셨다.) 그러면 창세전에 택해진 네페쉬는 반드시 그 진리를 받아야 한다. (이 ‘네페쉬’에게 하나님이 [생기, ‘르와흐’]를 불어 넣어서 생령으로 만들어야 그가 하나님의 신부가 된다.) 네페쉬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신 언약이기 때문이다. 어떤 ‘네페쉬’에게 진리를 보는 눈과 귀가 허락되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성령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 ‘네페쉬’는 생명에 이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그 ‘네페쉬’가 뭐라고 기도할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을 세우시며 반드시 무상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신 그 진리를 내게 주세요’ 하며 마치 채권자처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아이테오’라고 한다.
그것은 무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는 데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반드시 주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채권자처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 진리를 내 마음에 주세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운영 윈리이다. 이 세상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왕을 향해 채무자처럼 산다. 백성들이 왕을 섬긴다. 그리고 끊임없이 왕에게 빚 갚는 식의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왕이 백성들을 섬겨주신다. 왕이 진리로 백성에게 끊임없이 흘려주신다. 그리고 백성은 ‘그 생명 없으면 우리는 한 시도 살 수 없습니다. 주세요! 주세요!’ 하며 산다.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력을 끊임없이 부으시고, 백성들은 그 생명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들이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진리의 빚(채권)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을 구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성경에 나오는 [구하라(아이테오), 찾으라(제테오)]는 다 ‘빚진 것 갚아라!’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제테오는 ‘감추어놓은 그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 그러면 내가 주겠다고 약속한 것인데 왜 안 주겠어? (기도하는 것은 뭐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다 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땅의 나라는 백성이 빚진 자처럼 왕에게 항상 무엇을 바치면서 산다. 그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뭔가 바치고 섬겨야 한다. 이게 세상 나라가 돌아가는 원리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진 자처럼 하신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흘려주신다. 그것을 하늘의 생명이라고도 하고, ‘바라크’라고도 한다. 그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다. 이 세상의 원리와 완전히 반대이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그 생명과 복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할 일이다. 피조물이, 먼지들이 어떻게 무슨 수로 하나님을 섬겨? 감히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그 하나님을 무엇으로 섬겨?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리의 빛, 하늘의 물, 생수]를 구하게 된다. 구하는 자가 나타나서 너희에게 (빚진 것을 갚으라고) 구하거든 당연히 네 안에 있는 그것(진리, 빛, 생수)을 주어라! ‘구하는 자에게 주라’는 말은 아무거나 달라는 대로 다 주라는 말이 전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