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견입니다...)
작성자 : Cain
출 처 : www.cainism.com
"금자씨가 누군지 아세요?" - <친절한 금자씨(2005)>
어떻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2005)>는 복수 3부작 중 가장 떨어지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스릴러물로 놓고 보아도 충분히 매력이 있는 <올드보이(2003)>와는 비교할 것도 없고, <복수는 나의 것(2002)>이 만들어 내는 잔혹한 복수의 먹이사슬에 비교해보아도 <친절한 금자씨>의 구성은 어딘가 허술하다. 그도 그럴 것이 <친절한 금자씨>에는 상호간의 '충돌'이라는 것이 없다. 무언가 졸라게 하고 싶은 주인공, 그것을 졸라게 막아야하는 반대인물(혹은 요소)는 구성의 기본이다. 그 둘의 연쇄 충돌이 만들어 내는 것이 드라마(Drama)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것이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여기에서 어딘가 어중간하게 비켜나있다. <복수는 나의 것>처럼 단선적인 구조 속에 거칠게 충돌하는 복수극도 아니고, <올드보이>처럼 치밀하게 설계된 구조 속에서 하나하나 완성되어 나가는 냉혹한 복수극도 아니다. 장시간에 걸쳐 금자씨(이영애)의 사연이 소개되고, <올드보이>의 우진(유지태)이나 류(신하균)처럼 금자씨의 안타고니스트로 설정된 백선생(최민식)이라는 인물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정교하게 짜맞추어지는 것도 아니요, 백선생이 특별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2시간에 가까운 상영시간 동안 영화 속에서 금자씨에게 백선생이 취하는 적극적인 행동은 금자씨의 딸 제니와 금자씨를 해하기 위해 청부업자 2명(<복수는 나의 것>의 원수가 콤비가 되는 대략 황당한 상황)을 보내는 것이 유일할 정도니까.
이것은 이 영화가 <복수는 나의 것>이나 <올드보이>와는 또 다른 지점을 향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복수는 나의 것>이나 <올드보이> 역시 최소화된 인물을 가지고 중심된 인물(류-동진, 대수-우진)들의 이야기를 엮어나갔지만, 각각의 주변 인물들에게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고 역사가 있었다. (<복수는 나의 것> 중 류의 연인 영미(배두나)처럼) 그런데 <친절한 금자씨>는 그 완전 반대다. 상당수의 금자씨 감방 동료들이 등장하고 그들 각각에 얽힌 금자씨와의 사연이 보여지지만, 그들은 철저히 무개성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실, 목욕탕 비누사건으로 금자씨에게 은혜를 입은 감방 동기나, 금자씨가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는 '친절'에 목숨을 건진 감방 동기나 - 각자 떼어놓고 생각해보면 이들은 그저 금자씨의 '감방 동기'일 뿐이다. 이들은 금자씨의 출소 이후 머물 집을 마련해주고 복수에 사용할 총을 만들어주며 금자씨의 복수에 도움을 주지만, 극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요 서로가 역할을 바꾼다고 해도 별반 무리가 없는 단순 조력자일 뿐이다.
금자씨가 13년을 준비한 복수극의 대상인물인 백선생 또한 마찬가지이다. 금자씨가 제거해야할 대상이기에 그 무게감에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별다른 역할이 없고 극 속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은 금자씨의 감방 동기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복수의 대상이라는 인물이 2시간 동안 적극적으로 취하는 행동이란 게 청부업자 2명을 고용하여 금자씨와 제니를 해하려는 것이 전부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의 이야기는 <올드보이>처럼 치밀하지도 않고 <복수는 나의 것>처럼 속도감이 있지도 않다. 그러나 사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는 <올드보이>나 <복수는 나의 것>과는 가장 다른, 독특한 지점에 놓여있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친절한 금자씨>는 철저하게 금자씨 한 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올드보이>나 <복수는 나의 것> 또한 박찬욱 감독만의 복수 철학이 농밀하게 녹아있는 결코 가볍지 않은 복수극이지만, <친절한 금자씨>만큼 복수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지는 못한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나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송강호) 또한 금자씨 만큼이나 억울하고 복잡한 사연을 지닌 인물이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이 워낙 굵고 강렬하여 그 안에 일부분 묻혀 가는 경향이 있었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최대로 간결화된 구조 안에 철저히 금자씨 한 명만을 노출시킨다. 두 작품과는 달리 금자씨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심지어 백선생마저) 특정한 '기능'만을 하도록 설정된 이유 또한 그 때문이다. 금자씨'가' 감방생활 시절 동기들을 어떻게 도와주었고, 백선생에게 어떻게 복수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지 감방동기들이 금자씨'를' 어떻게 도와주고 백선생이 금자씨의 복수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들은 누구여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설정된 이 이야기 속에서 금자씨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있다. <올드보이>와 <복수는 나의 것>이 두 남자의 복수심을 포개어 하나로 완성된 복수의 에너지를 만들어냈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를 하는 한 여자에게 주목한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말이다.
카메라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시종일관 금자씨를 쫓고 거침없이 금자씨의 표정 하나하나를 클로즈업하여 보여준다. 다소 산만하다 싶을 정도로 금자씨의 과거사연과 현재사연이 교차되고 이야기 진행에는 별반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장면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거기에 금자씨도 백선생도 아닌 제3자의 목소리가 끼어든다(제니가 성인이 된 목소리라고 하던데!). 금자씨의 과거 사연과 금자씨의 속내를 해설해주는 나레이터의 목소리는, 우리를 철저히 방청객으로 만들어준다. 우리는 한편의 <인간극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친절한' 혹은 '마녀' 이금자에 관한.
그래서 사실, 영화가 시작과 함께 제시하는 '그녀는 왜 복수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사람이므로'가 절대 아니다. 아니, 그게 답이었다면 이 영화는 볼 필요가 없다. 그건 이미 영화를 보기 전부터 제공이 되는 정보가 아니던가. 또한 그게 답이었다면 백선생이 죽은 뒤 영화의 마지막을 채우는 사후 처리과정 및 빵집에서의 회동 장면은 잘려나가고 없을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 그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을 주목한다. 때문에, <올드보이>나 <복수는 나의 것>이 영화가 끝난 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강렬한 복수, 그 에너지가 남았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 그 뒤의 '사람'이 남는다. 무엇으로도 씻겨지지 않는 더러워진 영혼, 이태리 타올처럼 박박 밀어서 애기속살로 변할 때까지 벗겨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죄의식만이 남은 한 여자가 남는다. 다른 이의 손을 빌려 자신의 복수를 완성했으되 이미 죽은 어린 아이에게서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고 그 죄의식에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서글픈 한 여자가 남는다. 하여 이 영화의 마지막 두 장면, 그토록 원하던 원모와의 만남과 두부모양 케이크에 머리를 처박고 괴롭게 신음하는 라스트신은 숨이 막히게 불편하고 처절하다.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구원의 카타르시스가 부족하다'라고 평가한다지만, 이 영화는 구원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해버린다. 단지 이 라스트신만으로도.
그래서 사실, <친절한 금자씨>는 그 흔한 눈물 몇방울 없이도 처절하게 슬픈 영화고 금자씨는 근래 한국영화 중 전무후무한 인물이 된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질질 싸고 지랠이야' 따위의 욕설을 내뱉고, 어두운 밤 갑작스레 마주친 남자에게 '어머!'하며 깜짝 놀라는 심약한 사람임에도 자신의 원수가 처절하게 죽어가는 장면은 너무나 태연히 지켜보는 이중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하얀 눈처럼 순결하고 깨끗해지고 싶지만 절대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명료하게 반영한 인물이기에, 너무나 솔직하고 적나라한 이 영화는 잔인하도록 슬픈 '새드무비'가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판단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내놓을 수 있는 반응이 가지각색이듯, 대단히 관조적인 <인간극장> 한편을 보는 듯한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보는 사람의 자유다. 다만, 나처럼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나 자신 또한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위험할지도 모른다. 금자씨는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바로 당신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