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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작성자insmile|작성시간07.10.31|조회수798 목록 댓글 0

0.  역모사건인가? 사화인가?
조선시대 당쟁싸움으로 반대파 선비들을 죽인 사건을 사화라고 한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던 4개의 사화를 모아 '4대사화'라고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 순서별로 바르게 나열한 것을 고르는 시험문제도 심심치 않게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4번의 사화보다 더 많은 선비들이 죽은 사건이 있으니,
바로 '정여립 역모사건'이라고도 부르는 기축옥사이다.
이 기축옥사로 인해 정여립과 관련된 선비들 뿐만 아니라
동인 세력들 대부분이 죽거나 유배를 갔다.
정확한 수치는 내려오고  있지만, 1000여명이 죽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 500만명 중에 1000명이라고 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역모사건에 관여했던 사람들만 죽인 것이 아니라,
반대파 또는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엮어서 죽였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정황으로 보아 이 사건은 역모사건이 아닌
역모사건을 핑계로 한 사화라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가들의 견해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400년동안 이 사건은
역모사건이니 역모사건이 아니니,
모두 날조된 사건이니, 날조된 사건이 아니니 말들이 많다.
이 기축옥사가 일어나고 3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기축옥사의 기록이 유실되어서 진위를 밝히기는 더욱 쉽지 않다.
그리고 기축옥사 당시 왕이었던 선조 때의 실록인 <선조실록>에서는
기축옥사는 날조된 사건이라고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 <선조실록>은 광해군때 동인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적혀있는 것이라고 인조때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주장하였다.
그래서 인조때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유례없이 실록 수정편을 내놓았다.
그래서 <선조수정실록>이 생겼으며,
여기에는 기축옥사가 정여립의 역모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은 이 정여립 역모사건의 수사일지이다.
과거 진상 규명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자료 미흡으로 명확한 판결을 내릴 수 없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진실을 알려주고 있다.
지은이는 <다시 쓰는 택리지>로 유명한 사학자 신정일이다.


1. 당시 시대적 상황과 정여립의 행보
선조는 영조, 숙종 다음으로 오랫동안 왕위에 머물렀던 왕이다.
그의 왕위에 있었던 16세기는 조선으로서는 잊고 싶은 시절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강토가 피폐해지고,
오랜 당쟁싸움으로 조정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런 데는 왕이었던 선조의 책임도 있었다.
그는 서인, 동인의 권력 다툼에서
이쪽 손을 들어주었다가 저쪽 손을 들어주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선조의 행보가 당쟁싸움에 더욱 불을 붙였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동인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서인 세력들은 권력을 다시 빼앗을 생각에 그들의 헛점을 찾는데 혈안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의 먹잇감이 눈에 들어왔다.
정여립.
어린 시절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정여립은 원래 서인이었다.
정여립은 이이의 배움을 받고, 이이의 도움으로 정계를 진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이가 죽고 난 후 그는 이이를 배신하고,
동인의 이발을 찾아갔고, 이발은 그를 받아주었다.
근세에 들어 어떤 사학자는 정여립이 서인을 버리고 동인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진보적, 혁신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서인이 보기에 정여립은 배신자였다.
그렇게 서인을 배신한 정여립이었기에 더욱 서인들의 표적이 되었다.
뿐만 아니고 선조의 미움을 받고, 낙향하여 지내고 있던 정여립이 아닌가.
천재로 소문난 그가 낙향했으니 주위에서 그를 찾아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정여립은 고향에서 새로운 사상을 키워나갔고,
기존체제에 도전하는 평등한 개혁 조직인 대동계를 만들었다.
이것은 공개된 조직으로 한달에 한번씩 정기모임을 갖고,
글을 배우고, 무술도 익히는 그런 모임이었다.
이 모임이 당시 다른 양반들과의 모임과 다른 것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가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승려들도 이 모임에 있었다고 한다.
전라도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국가에서 대동계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국가에서도 인정하는 모임이었다.
지은이 신정일은 이 대동계를 이이가 주장한 십만양병설보다 더 실천적 대처방안일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 대동계가 정여립이 꿈꾸는 새로운 세계를 표방하였던 것이다.
그런 대동계가 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저건 역모다.
뿐만 아니라, 그가 있던 진안의 죽도 근처에는
미륵신앙을 가지고 있는 금산사가 있었다.
거기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던 황해의 부사를 그토록 하고 싶었던 정여립이 아닌가.
그리고 정씨 집안이 왕이 된다고 하는 <정감록>이 백성들 사이에 돌고 있지 않은가.
이런 것이 역모의 증거다.
이렇게 하여 정여립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밀 장계가 조정에 날아들어왔다.


2. 반전
그렇게 역모를 꾸몄다고 잡혀온 사람은 황해도 백성 두어명이었다.
역모라고 하니 선조가 직접 국문을 하였는데,
그 잡혀왔다고 하는 백성들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동인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는 판에 동인인 정여립이 역모를 꾸밀 리가 있나.
선조조차 실없는 소동이라고 여기고 정여립의 이야기를 듣고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들려오는 사건의 전개과정이 일대 반전을 불러 일으켰다.
정여립이 이 고변 소식을 듣고 도망을 갔고,
관군에 쫓기다가 일행들과 자살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정여립 자신이 역모를 인정한 것이 되었다.
정여립은 곧바로 서울로 압송되어 능지처참되었고,
이 사건은 동인에게 핵폭탄이 되었다.
그리고 세력이 너무 커진 동인 세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선조도
이를 동인 세력을 견제하는데 사용하기로 마음 먹은 듯하엿다.
그런데, 사실 정여립의 자살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조차 불확실하다고 한다.
그 근거로 정여립을 쫓던 관군을 지휘하던 자가 바로 서인인 민인백이었다.
정여립을 죽이고, 자살했다고 거짓진술을 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여립의 역모가 사실이라면 동인의 몰락과 서인의 급부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모든이가 예상한 바와 같이 정여립이 자살 이후 동인은 줄줄이 형상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3. 정철의 재발견
정철이라고 하면 조선시대 유명한 시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정철은 시인이기 이전에 자신의 당에 충실하는 당원이었다.
을사사화때 정철의 매형 계림군은 죽음을 당하고
정철의 아버지는 유배를 가고, 정철의 형은 유배를 가다가 죽었다.
그러다가 명종 6년에 사면을 받고 나서야 정철은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이, 성혼 등의 유학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의 이런 어린 시절이 후에 그를 잔인한 집행자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26살에 장원 급제를 하였지만, 지방에 좌천되었고,
그에 대한 평가도 포용력 없는 정치인이라는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잠시 강원도 관찰사를 할 때가 있었는데,
이 때도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선조때 심의겸과 김효원의 의해 본격적인 당쟁다툼이 시작되었을 때
정철은 심의겸 편에 서면서 서인이 되었다.
한때 이이와 의견을 대립으로 귀향하기도 했지만,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때 그는 동인과 서인의 화합을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이가 죽고 나서 정철이 대사헌이 되었지만,
치열한 당쟁 싸움에 그는 조정에서 물러났고,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가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된 것이 정여립 역모사건 때이다.
그는 정여립 역모사건의 소식을 듣자마자 궁궐로 왔고, 우의정이 되어 옥사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정여립 역모사건을 선두 지휘하면서
많은 동인의 주요 인사들을 처형시켰다.
그리고 그는 꿈을 이룬 듯 했다.
조선은 서인들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인의 재집권을 꿈꾸던 이산해의 계략에 말려들어
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와 어긋나게된 정철은 파직 후 유배를 가게 되고,
서인들은 몰락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다시 석방하여 평양에서 선조를 모시기도 하였지만,
다시 모함을 받아 강화로도 물러나 가난하고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가
58세 강화도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유명한 시인의 재발견이다.
그가 이런 삶을 살다 갔다는 사실에 놀랍고도 허망스럽다.
한낱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가기를, 어찌 그리 허황된 꿈만 쫓다 가나?
한편, 동인은 정철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서게 된다.
이산해를 중심으로 정철을 탄핵하자고 하는 강경파인 북인과
김수, 우성전을 중심으로 유배만 보내자는 온건파 남인이 그것이다.
거참, 말로만 공자니, 주자니 떠드는 인간들이여...
도대체 조선을 말아먹기로 작정했나...


4. 송익필 그는 누구인가?
송익필이란 낯선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기축옥사를 배후에서 조정했다고 알려진 서인의 막후 실력자이다.
사건의 주모자는 송익필이고, 연출은 정철이라고 할 정도이다.
그의 아버지는 앞선 사화에서 무고, 위증으로 죽었다.
이에 송익필은 출세길이 막히고,
땅 소송사건으로 동생 한필마저도 죄인이 되어버렸다.
그런 그가 서인의 실력자가 부각한 것은 심의겸 관련자들이 파직할 때였다.
송익필은 뒤에서 조정하여 심의겸 관련자들을 파직시킬 때
이이와 성혼을 구해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동인은 송익필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송익필은 동인의 이런 공격으로 종의 신분까지 되어서
정철 등 서인의 집에 숨어 지내게 된다.
그리고 동인을 공격할 것을 찾던 중 정여립의 대동계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감록과 정여립의 근황을 절묘하게 엮어 역모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5. 희생된 그들은 누구?
당시 억울하게 죽어간 동인의 선비들의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랑하는 관기와 헤어져 눈물을 흘린 조대중도,
눈에 질병이 있어 바람이 부는 날이면 눈물이 나는 김빙도,
모두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누명을 쓰고 운명을 달리했다.
그들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서인의 미움을 받은 것이었다.
최영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죽게 된 사연 또한 한심하다.
기축옥사가 한참 진행이 되었는데도,
기축옥사의 중심인물이라고 언급된 길삼봉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당시 진주에 살고 있던 최영경이 길삼봉이라는 설이 돌기 시작하였다.
서인에게 밉보였던 동인 최영경이었다.
이를 조사하던 이항복은 이상히 여기고 함정임을 알았다.
이에 정철에게 도의를 지킬것을 요청했지만,
정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최영경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가 뒤늦게 풀려났다.
하지만, 그가 성혼을 흉을 보았는데, 다시 옥에 갇히고 다시 길삼봉이 되었다.
최영경은 자신을 변호했지만, 그의 집에서 정여립과 주고 받은 단순한 안부편지가 증거가 되어
옥에 갇히고 죽고 만다. 독살되었다는 유력한 설이 있다.
이발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당시 동인의 영수였다.
그는 이이를 배반한 정여립, 정개청 등을 동인으로 받아주었다.
그로 인해 정철과 앙숙지간이 되었다.
이발 또한 역모사건에서 빗겨갈 수 없었다. 그 또한 가족이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리고 정여립의 9촌벌 되는 정언신, 정언지 또한 누명을 쓰고 파직되었다.
그야말로 삼족인멸이 따로 없었다.
정개청이란 사람이 있다.
그 또한 잘못이라면 정철하고 사이가 안좋았다는 점이다.
그는 정여립과 내통 혐의를 받고 귀향 중에 사망하였다.
정개청은 서경덕과 박순의 제자로서 나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강의계'란 모임을 만들어 향약을 보급하고 문인 집단을 결속하였다.
박순의 추천으로 교정낭인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는데,
박순이 세력을 잃자, 동인의 실력가 이산해를 찾아간 것이 정철과 서인의 공격대상이 된 원인이었다.
하지만, 박순은 정개청의 인간됨을 어려서부터 봐왔기 때문에 끝까지 옹호했다고 한다.
그 또한 이 옥사로 인해 운명을 달리한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이런 정개청과 정철의 관계는
오늘날까지 정개청의 고성 정씨와 정철의 연일 정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 풍습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정철의 연일 정씨는 이발의 광산 이씨하고도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6. 기축옥사 그후
기축옥사로 인해 죽은 이가 1000명..
그것도 재능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정철과 서인들이 권력을 잡았다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리고 기축옥사 이후 호남 지방의 인재 등용을 엄격히 제한했다고 한다.
실제 기축옥사 후에 조정에서 일한 호남 인재는 현격히 줄어들어다고 한다.
그리고 기축옥사 3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기축옥사때 유능한 인재나 너무나 죽어서
임진왜란 당시 힘없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심지어 어떤 사학자는
기축옥사때 유능한 인재가 너무 많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일본이
쳐들어왔다고까지 했는데, 황당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
기축옥사도 세월에 묻여 지내다가
근대에 와서 다시 논쟁의 불을 지핀 사람은 다름아닌 단재 신채호이다.
신채호는 <조선사총론>에서 정여립을 혁명성을 가진 인물이고,
혁명이 실패하여 후세가 안타까워하는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학자들이 기축옥사는 날조되었다고 평가하면서 여러 의문점들을 제시하였다.
동인이 집권하던 시기에 같은 동인이 모반을 꾸민 이유가 있었는가?
고변 소식을 듣고 도망간 정여립이 편지 등 증거물을 왜 그대로 두었는가?
정여립은 왜 자신의 연고지로 도망을 갔는가?
정여립은 왜 자신의 행방을 알리고 도망을 갔는가?
뿐만 아니라 당시 이 사건을 접한 사람들 중에 유독 정철만이
그가 도망갈 것을 예측하였다.
다른 이들은 정여립이 조정에 직접 찾아와 해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정황으로 봐서 정철이 정여립을 유인하여 암살한 최고 지휘자일 것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물론, 현대 사학자들 중에서도 정여립 역모 사건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
다음은 기축옥사에 대한 지은이의 총평이다.
"기축옥사는 현실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는 주자학적 통치이념에 대한 반발과 백성을 도외시한 위정자들의 권력투쟁, 그리고 지배계급에 의해 수탈당한 백성의 불만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의해 발발한 사건이었다.
...
위관 정철과 그를 배후 조종한 송익필의 복수심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평가하는 주장도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이이의 죽음 이후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동인 세력을 제거하려던 성혼 등 서인들의 정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결국 기축옥사는 당쟁의 형세를 돌이킬 수 없는 극한 상황으로 몰아간 역모 사건이었고, 혁명사상의 좌절이었으며, 진보 세력이 몰락하게 된 변수였다. 이 때문에 변란의 불씨가 계속 남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
다음은 정여립에 대한 지은이의 총평이다.
"첫째 정여립은 왕위의 세습을 부인하였다.
중국의 성인인 요, 순, 우가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당대의 현자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왕위가 혈연이 아닌 능력에 따라 이어져야 한다고 정여립은 믿었다.
둘째 정여립은 충군사상을 부인했다.
임금과 신하가 절대적 충성심으로 이루어지는 수직적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군신의 주종관계가 무너짐을 의미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일종의 민중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세째 그는 공화주의자였다.
천하가 공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주인이 반드시 군주가 아님을 주장했다.
이는 원시적 형태의 인민주권설을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여립은 영국의 크롬웰보다 50년 앞선 공화주의자였다."

 


책제목 :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지은이 : 신정일
펴낸곳 : 다산초당
펴낸날 : 2007년 10월 10일
정가 : 15,000
독서기간: 2007.10.27 - 2007.10.31
페이지:  385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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