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1 - 마종기
인간계에서 천상에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그리고 피렌체에서 의롭고 건전한 겨레한테로 온 나는.
- 단테의 '신곡'중에서
나 방향을 잃고 친구는 부모를 한 해에 잃어, 실의가 비구름 일
듯 무연히 덮고 있을 때, 우리는 봄길을 헤치고 불현듯 불혹의 연세
에 불치의 병을 앓는 우리의 고등학교 선생님을 찾았다. 죽음이 한
절반만큼 노후한 산장에 걸터앉고, 우리의 선생님은 乾坤을 누비시
듯 책을 읽고 계셨다. 잔잔한 죽음이 책장 사이로 물결지고 있었다.
인생은 결국 책입니까.
아니다.
인생은 사랑이다.
아니다.
그것은 예술이다.
아니다.
우정이다, 아니다.
인생은 고독이다, 그 투쟁이다.
아니다.
피다, 허무다, 전쟁이다, 종교다,
아니다, 아니다.
그러면 인생은 오히려 평범,
아무것도 아니라면
술이다, 노래다, 여자다,
아니다.
인생은 열광이다.
열광에의 기다림,
열광에의 서성거림,
그리고 열광에의 미련.
오래 기다리다 이제 떠납니다. 젊은 날 우리의 진심은 너무나 조
용하고 깊었습니다. 외국어보다는 더 눈이 빛나 청춘을 이야기해주
시던 존경하는 고등학교 선생님은, 죽음의 좁은 난간에서 우리를
배웅해주시며 웃으셨다. 열광은 어디 있는가.
눈보라치는 우리의 계절, 세상이 살아온 거리를 헤치면서 나는
열광을 찾아보리라. 옆에서 친구는 손을 쥐며 대답했다. 열광은 이
미 우리 몸에서 자라고 있다. 열광은 어디 있는가.
* 사진 : KARSH
* 음악 : 1. 프렐류드(Prelude) - 4/4 박자, G장조, 모데라토
- 바흐 / 무반주 첼로 조곡 제1번
( 시집 : ' 조용한 개선' , 문학동네 ,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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