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참모습 - 삼법인 / 강건기 교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삼법인(三法印)은 불교를 상징하는 깃발이라고 해도 될 만큼 불교의 기본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낸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어떤 사상이나 학설이 불교의 진리와 맞는지의 여부를 대조할 때 이 삼법인과 맞추어 봅니다. 법인은 진리의 도장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서류에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틀림없음을 확인해주는 절차입니다. 따라서 삼법인이란 세가지의 틀림없는 진리라고 하는 뜻입니다. 연기의 진리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삼법인은 다분히 함축적이고 종교적인 표현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삼법인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하고, 소승불교에서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합니다. 또한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을 합해서 사법인이라고도 합니다. 첫째, 제행무상은 연기의 시간적 표현입니다. 존재를 시간적으로 볼 때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제행이란 현상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순간순간의 흐름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에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누가 죽었다고 할 때 무상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무상은 단순히 감상적이거나 인생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무상은 감상적 표현이라기보다 존재의 실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우리들은 자신도 변하는 것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몸이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같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내가 실제로 같을 수도는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변화를 통해 생로병사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태어나서 늙어가고 병들어 앓으며 마침내 죽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자연이나 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천체나 우주도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을 통해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는 계절의 변화도 역시 제행무상인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않을 것 같은 부귀영화도 이내 변하여 사라지고, 무상하기 때문에 병약자가 건강해질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어리석은 중생이 지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상한 것을 유상한 것으로 착각하여 영원히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고, 무상하며,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면 사는 모습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 고정불변한 존재는 없다 - 삼법인의 두 번째인 제법무아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공간적 관찰입니다. 즉 연기의 공간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구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아(我)'에는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라는 것이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법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지칭하므로, 제법무아는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한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생주이멸하는 흐름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치 불교가 생활의 주체인 '나'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불교는 현실을 부정하는 염세적인 종교가 됩니다. 불교는 생활의 주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주체인 '내'가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도 역시 인연 화합된 존재이기에 끝없는 변화속에 있습니다. 인간은 다섯 가지 요소가 화합되었다고 합니다. 즉 물질적 요소(色), 느낌(受), 표상작용(想), 의지작용(行), 인식작용(識) 등 오온(五蘊)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 연기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인간이해는 육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은 오온이 다 공(空)하다는 말씀입니다. 즉 '나'라는 것이 공하다는 것으로 '나'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정하는 것이고, '내가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아란 말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 소유에 대한 고정관념까지도 깨버리는 의미를 가지게됩니다. 왜냐하면 '나다'하는 존재도 무아인데 '내것'이란 것이 영원히 '내것'일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아를 유아로 착각하기 때문에 '내것'이란 소유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따라서 한번 가지면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남방에서는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아주 특이합니다. 야자 열매인 코코넛 속에 맛있는 음식을 넣고 손을 펴면 들어갈 만큼의 틈새를 만들어 원숭이가 잘 다니는 곳에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지나가던 원숭이가 코코넛을 발견한 후, 그 속에 들어있는 음식이 먹고 싶어 틈새에 손을 넣고 음식을 꽉 움켜쥡니다. 그리고 손을 빼려고 하는데 움켜쥐고 있는 손은 뺄 수가 없습니다. 원숭이는 움켜쥐었던 음식을 놓고 손을 펴면 빠져나와 도망갈 수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음식을 쥔 채 손을 빼려고 흔들다가 사람들에게 결국 잡히고 맙니다. 탐욕의 결과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지나치게 물건의 소유를 탐하게되면 나중에는 물건이 사람을 소유하게 되는 소유의 역전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질 만능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야자 열매인 코코넛 속에 든 맛있는 음식에 정신을 빼앗긴 원숭이처럼 소유욕에 눈이 멀어 맹목적인 탐욕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탐심은 또 금전을 항상 내것으로 묶으려고 합니다. 금융이란 원래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 삶을 융통시키는 것이지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그래서 '잠시 내가 보관하는 것'입니다. 잘 보관해야 되고 잘 관리도 해야합니다. 그리고 공익을 위해 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맹목적으로 쥘려고만 하는데, 사실은 황천길의 노자로도 가져갈 수 없는 것이 재물입니다. 모두 돌려주고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잘 돌려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회향(廻向)을 잘 해야 합니다. 산다는 게 무아인 줄 알면 소유의 고정관념도 달라지고 그럴 때 맹목적으로 쥐고 있던 것을 놓을 줄도 알게 됩니다. 또한 넓은 안목에서 잘 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일제시대에 불국사 주지로 수월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시절에는 몹시 가난해서 죽도 못먹을 때였는데 불국사의 젊은 스님들은 수월 스님이 하시는 일에 몹시 불만을 가졌습니다. 수월 스님은 근처의 땅을 개간한다며 마을의 인부들을 모아 놓고 일을 시키면서 부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스님들은 주지 스님께서 일을 시키려는 건지,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더불어 품삯까지 후하게 주니 지출되는 돈과 땅에서 경작되는 소출과 잘 맞지를 않았습니다. 타산은 안 맞고 임금은 자꾸 들어가니 젊은 스님들이 수월 스님은 무능하다는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스님들이 "밑지는 장사를 왜 자꾸 하십니까?" 하며 거친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수월 스님은, "아, 이 사람들아, 출가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어찌 생각이 그리 좁다는 말인가? 내 계산으로는 수지맞는 일인데 뭐가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인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린 그래도 땅이라도 있어서 밥을 먹을 수 있지만 저 마을 사람들은 굶기를 밥먹듯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지 않은가? 우리가 주는 품삯으로 가족들 죽이라도 끓여 먹여 살게 했으니 수지맞는 일이요, 일하면서 부처님 말씀도 전했으니 포교도 되었고, 또한 농토의 개간으로 우리나라의 농토가 그만큼 넓어졌을 것이니 이만하면 수지맞지 않았는가?" 중생들의 사는 모습은 그저 나와 남을 갈라놓고 항상 자기 중심적인 입장에서 생을 보기에 대립,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아라는 존재의 실상을 분명하게 터득한다면, 수월스님처럼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소아적인 삶이 아니라 대아적 삶이 될 것입니다. 무상, 무아의 가르침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항상한 것은 없다.', '불변하는 실체는 없다.'는 것을 이론으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명상법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한 명상법이 백골관(白骨觀)이라는 관법(觀法)입니다. 무상아나 무아를 터득하기 위해 부처님 당시 제자들은 공동묘지까지 찾아가서 썩어가는 시체를 앞에 놓고 명상을 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시체의 모습과 명상하는 수행자가 하나가 되는 순간 '아, 무상하구나', '무아구나' 하며 스스로 터득하도록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백골 관법이 소승불교를 신봉하는 나라에서는 아직도 실천되고 있습니다. 타일랜드와 말레이지아 국경근처에 있는 차야라는 도시에 붓다다사라는 유명한 스님이 계십니다. 그 스님의 제자들은 세계 각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고 있으며 이 가르침은 곳곳에서 혁신적인 가르침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스님이 계신 절은 현대식 건물에 시청각 교육시설까지 겸비하였고 정글 속에 위치해 있어서 운치까지 있어 보였습니다. 전통적으로 타일랜드 스님들은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땅을 파는 농사일을 하지는 않지만, 혁신불교라고 불리우는 이 스님이 계시는 차야의 절에서는 스님들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선(禪)수행을 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파격적인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1968년 이 절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 저는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새벽 안개가 자욱한 정글에 붓다다사 스님은 고목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우리 일행을 반겨 주셨습니다. 스님은 우리가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니 태극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승경전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절에서 저녁 예불을 드리고 법당의 툇마루를 내려서는데 눈앞에 섬찟한 것이 나타났습니다. 다름 아닌 생물 시간에나 봄직한 백골이었습니다. 우리가 깜짝 놀라니까 그곳 스님들이 웃으면서 놀라지 말고 가까이 가서 명찰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명찰에 '1930년 미스 타일랜드의 실물'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지만 그쪽에서는 보통인 듯 했습니다. 그러니까 몇 십년 전 타일랜드 제일의 미인의 모습을 법당에 드나들며 매일 바라보고 무상과 무아를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방을 찾아갔을 때에는 조그만 방에 10여명이 참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슬그머니 참선에 들었는데 내가 앉아 있는 안쪽 구석에 흉칙한 미이라가 하나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피부와 모발도 그대로 있는 사람의 형상이었습니다. "누군가요?"하고 물어 보았더니, 그 방에서 함께 참선하던 스님인데 몇 해 전에 병으로 죽은 후 그대로 세워 놓았다는 것입니다. 같은 방에서 참선하다가 죽은 도반의 모습을 보면서 무상과 무아를 터득하게 하는 생생한 현장이었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백골관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살 궁리만 하지 죽을 궁리는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반쪽 삶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산다는 것과 죽은다는 것은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손바닥의 앞과 뒤처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과 죽음을 딱 갈라놓고 죽음은 기분 나쁜 것이라 해서 제쳐놓고 살려고만 합니다. 삶은 설계하면서 죽을 설계는 안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따라서 반쪽 설계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잘 죽을 궁리도 필요합니다. '어떻게 살까?' 하는 문제는 '어떻게 죽을까?' 하는 문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인 인생의 종점에서 우리의 삶을 한번 반추해 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훨씬 넉넉한 인생의 설계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서양에서는 죽음에 대한 교육이 큰 유행입니다. 1970년대부터 각 대학에서 죽음에 대한 강좌 붐이 일어났습니다. 삶을 온전히 알고 잘 살기 위해서는 죽음의 실상을 제쳐놓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강좌의 표어를 보면, "삶은 불확실하다. 다음 순간에 어떻게 될 지 모른다. 그러나 죽음은 확실한 사실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서양의 교육은 그 확실한 문제를 외면해 왔기에 이렇게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참 좋은 교육운동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윤리, 도덕, 종교 교육이 바로 이런 차원으로 연결되어져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죽음에 대한 교육은 불교적 훈련과 통하는 운동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현대적 백골관을 우리 삶 속에 활용하면 어떨까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살 생각만 하는데 죽을 생각도 한번쯤 해봐야 합니다. 죽을 때의 장면을, 일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머리 속에 한번 그려 봅시다. 친지들이 모여서 슬퍼하는 모습, 숨이 떨어지고 하루, 이틀, 삼일 지나면 염을 해서 꽁꽁 묶여있는 모습, 5일쯤 지나고, 1년쯤 지나고, 10년쯤 지나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요? 이러한 연습을 통해서 모든 것이 무상하고 무아하다는 진리는 우리들과 가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삼독의 불이 꺼진 평화의 세계 - 삼법인의 세 번째인 열반적정은 열반이 적정하다는 것입니다. 앞의 무상과 무아가 현상세계라면 열반적정은 이상세계입니다. 즉 불교의 이상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이상 세계는 현상 세계를 떠나서 따로 있는 세계가 아니고 우리가 있는 현상, 현실이 무상, 무아인 줄 분명히 알면 그것이 바로 열반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열반적정은 무상, 무아가 체득된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열반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니르바나(Nirvana)란 말을 소리나는 대로 옮긴 것입니다. 원래의 의미는 불을 확 불어서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활활 타던 뜨거운 불이 꺼졌으니 얼마나 적정하고 안온한 상태입니까? 그러나 그 불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마음의 불입니다. '나다' 하는 놈이 심지가 되어서 욕망,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탐진치, 즉 삼독의 불이 붙으면 눈, 코, 귀, 입, 몸을 통해서 대상세계에 옮겨 붙습니다. 마음에 탐욕의 불이 있으면 눈을 통해 나타나서는 대상세계의 여러 곳으로 옮겨 붙어 욕심내고 훔치는 일로까지 번져갑니다. 귀는 소리를 통하여 불을 옮깁니다. 이리하여 삼계화택(三界火宅)이 됩니다. 온 세상이 불난 집입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실감나게 됩니다. 오탁악세(五濁惡世)란 말이 있는데, 이것이 불난 집의 소식입니다. 첫째, 겁탁(劫濁)입니다. 이는 '시대가 탁하다'는 뜻입니다. 물질이 극도로 치성한 것이 오늘의 시대인데, 물질이란 원래 무겁고 찌꺼기를 남기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이 치성하니까 환경이 오염되고 산과 물이 더러워집니다. 우리나라처럼 아름다운 산하를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수값이 석유의 1.3배쯤 된다고 하니 우리가 얼마나 탁한 환경속에서 살고 있는 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둘째, 중생탁(衆生濁)입니다. 그런 물과 공기를 마시고 오염된 자연 속에 사는 중생은 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없었던 병인 각종 암이나 후천성 면역결핍증 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셋째, 견탁(見濁)입니다. 이는 사상, 주의, 이데올로기의 난무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데올로기의 혼탁으로 남북이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했었습니다. 서양적인 이데올로기인 사회주의, 자유주의가 왜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맞지 않을 때는 버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지금 동구의 변화가 그런 것인데, 우리는 마치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철옹성을 쌓고 있습니다. 세계는 요즘 탈 이데올로기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것은 다 버리고 남의 것, 서양 것만 중히 여기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사상, 종교, 철학도 우리에게 맞는 우리 것이 정착되어야 합니다. 넷째, 번뇌탁(煩惱濁)입니다. 만들 수 있는 물건은 모두 만들어 놓고 매스컴 등을 통해 광고를 해대니, 우리의 번뇌가 치성하여 눈, 귀, 코, 입, 혀, 몸 등이 얼마나 분주하고 소란합니까? 그러니 번뇌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째, 명탁(命濁)입니다. 이는 생명이 천시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오늘날처럼 천시되는 시대가 없었습니다. 이 오탁악세는 불난집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반적정의 세계는 그러한 불이 꺼진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적정은 소아적인 번거로움이나 탐, 진, 치가 멸함으로써 대아적인 삶, 대자비의 적극적인 행이 용솟음치는 세계입니다. 즉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 45년간 한시도 쉬지않고 일체의 모든 생명을 위해 동체자비를 실현하셨던 그런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