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2 / 김 종 욱 그런데 여래장이 여래의 태아라고 하는 것은, 가능성의 차원에서는 태아가 그대로 성장하면 여래가 될 수 있는, 그래서 여래와 같은 종족(gotra)이 되는 것이지만, 현실성의 차원에서는 아직은 여래가 아니고,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태아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가능성 차원에서 드러나는 여래와 중생의 동일성은 인간 본래의 심성본정을 가리키고, 현실성 차원에서 나타나는 여래와 중생의 차이성은 인간 실존의 객진번뇌를 함축한다. 이것을 《승만경》의 표현대로 하면, 객진번뇌성은 진여의 충만함이 ‘비어 있는’ 일시적인 허망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여래장(空如來藏)이고, 본성청정성은 진여의 충만함이 ‘비어 있지 않은’ 본래의 원만구족한 것이라는 점에서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다. 그러나 공여래장이든 불공여래장이든 동일한 진여의 은폐와 구현으로서, 양자는 기본적으로 무자성의 일체이고, 더욱이 여래의 본성인 법성이 곧 공성이기 때문에, 여래장은 공성의 유적(有的)인 표현일 뿐, 공성을 위반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여래장이 공성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다 잘 보여주는 표현이 바로 불성이다. 불성(佛性)에 해당하는 인도 원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보통 붓다―다투(buddha-dha-tu)를 그 해당어로 본다. 붓다란 법(法, dharma)을 보아 깨달은 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법을 본 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따라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담보해 주는 표현이 다투이다. 다투의 어근 dha-는 ‘야기하다, 일으키다’ 또는 ‘놓다, 위치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전자의 뜻으로 할 경우, 다투는 ‘야기하는 것’(因)이고, 붓다―다투는 ‘부처가 되게 하는 근원’이나 ‘부처가 될 요소’ 등을 의미한다. 후자의 뜻으로 할 경우, 다투는 ‘야기되어 놓여진 것’(界)이고, 붓다―다투는 ‘그런 근원에 의해 야기되어 부처와 한 종족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불성을 전자의 의미로 해석할 경우, 그 해당어는 붓다―가르바(buddha-garbha, 佛藏)가 되고, 후자로 해석할 경우에는 붓다―고트라(buddha-gotra, 佛姓)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투의 이런 용법은 다르마―다투(dharma-dha-tu, 法性·法界)에도 적용된다. 다투의 첫번째 용법에 따를 경우, 다르마―다투는 ‘모든 존재자의 현상을 야기하는 근원’으로서의 ‘연생성(緣生性, prat1-tyasamutpannatva)’, 즉 법성(法性)을 가리키고, 그 두번째 용법에 따를 경우에는 ‘연기라는 원리 하에 마치 하나의 가족이나 종족처럼 공존하며 모여 있는 것’ 다시 말해 ‘연기한 제법(prat1-tyasamutpanna- dharma-h.)’, 즉 법계(法界)를 가리킨다. 법을 본 자를 부처라고 하는 이상, 부처를 되게 하는 근원은 법이고, 이 법에 해당하는 것이 일체의 근원으로서의 법성이며, 법성은 바로 연기성과 공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성은 곧 법성이고 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불의 가능 근거와 일체의 존재 근거가 공성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은 곧 인간과 세계 모두가 공함에 의해 드러난 진여이며(佛性者 卽是人法二空所顯眞如)”, 인간과 세계가 모두 공으로서, 분리되지 않는 “무이의 성이 바로 불성이니(無二之性 卽是佛性)”, “불성이 없다는 것은 바로 공성이 없다는 것이다(無佛性者 卽無空性).”고 말할 수가 있다. 심성본정 객진소염이라는 미오의 이중적 복합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여래장이고, 그것의 이론적 토대가 공성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불성이지만, 여래장과 불성은 모두 중생의 성불 가능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인도에서 여래장 사상이 성립된 이래 후대로 갈수록, 여래장보다는 불성이라는 표현이 더 잦아지고, 특히 중국 불교에 이르러서는 여래장 사상을 체계화한 《보성론》이 거의 잊혀질 정도가 되었다. 이처럼 중국 불교에서 여래장이 불성으로 대체되는 것은 붓다―다투를 불성으로 옮김으로써, 중국인들이 훨씬 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불성이란 단순한 번역 용어 이상이며, 거기에는 불교 사상과 중국 전통 사상 간의 상호 침투 관계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불성의 중국적 수용의 첫번째 특징은 불성의 인성화이다. 붓다-다투를 불성으로 옮길 때의 그 성(性)자는 단순히 추상명사형의 어미가 아니라, 중국의 유가적 인성론상의 성, 즉 일반 사물의 특징(物性)이나 동물의 특징(獸性)과는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人性)과 연결된 말이다. 이제 성불의 가능 근거를 의미하던 붓다―다투가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되며, 그렇게 인성화됨에 따라, 맹자 이래로 인성론을 심성론의 차원에서 다루어왔던 중국인들은 불성 사상에 담긴 심성본정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축도생(竺道生)은 맹자식의 성선을 불성론적으로 해석하여, “성선(性善)에서 선이란 이(理→다르마)의 오묘함이고 성이란 근본으로 돌아감이다(性善者 妙理爲善 返本爲性也).”고 했고, 혜능(慧能)은 심성본정을 곧바로 ‘인성본정(人性本淨)’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불성이 인성화되고 심성화됨으로써, “성이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性卽是心 心卽是佛)”, “마음을 밝히는 것이 성을 보는 것이고(明心見性)” “성을 보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見性成佛).”라는 선불교의 기본 주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불성론이 인성화 심성화됨에 따라, 후대의 신유학은 오히려 보다 더 쉽게 불교의 사상을 흡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불성의 중국적 수용의 두번째 특징은 불성의 본체화이다. 본체론이란 만물은 자신의 전일적 근본(體, 본체)을 터전으로 삼아 조화롭게 작용하고 있는 것(用, 현상)이라고 보는 사고 방식을 말한다. 중국에서의 본체론은, “만물은 모두 도로부터 말미암아 생겨난다(萬物皆由道而生).”고 주장한 도가사상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런데 그 도는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을 성으로 삼고, 자연은 그 도를 체로 삼으니, 즉체즉성(卽體卽性)의 도즉자연(道卽自然)이 되어, 성은 곧 체와 연결된다. 이것은 본성을 심성의 차원에서 다루는 맹자와는 달리, 본성을 본체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