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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철학의 필요성 / 이병욱 1. 들어가는 말

작성자거울|작성시간07.07.22|조회수30 목록 댓글 0
 

비교철학의 필요성 / 이병욱 콘즈와 칼루파하나의 비교 1. 들어가는 말 한국사람이 한국에 살다가 미국에 이민을 가서, 이제는 한국어도 다 잊어버렸다고 하자. 이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보아야 할까? 미국인이라고 간주해야 할까? 몸은 노란 얼굴을 한 동양인이고, 언어와 사고방식은 완전히 미국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육신’은 어느 곳에 있더라도 바뀌지 않는 요소이고, ‘말’이나 ‘사유형태’는 장소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구분을 불교사상의 흐름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불교사상에도 장소와 시간이 아무리 변천하고 흐르더라도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고, 공간과 시간에 따라 바뀌는 요소도 있다. 이것을 불교의 ‘독자성’과 ‘적응성’이라고 한다. 불교의 독자성은 불교사상만이 가지는 독특한 본래 모습을 말하는 것이고, 적응성은 그런 독자성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전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컨대, 같은 소나무 씨앗이라고 해도, 어떤 장소와 어떤 시기에 심어졌느냐에 따라 그 소나무가 제대로 자랄지, 어떤 모습으로 클지가 정해지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래서 다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뿌리로 하는 불교사상이지만, 인도의 불교사상과 중국, 한국, 일본의 불교사상은 그 줄기와 잎이 다르고, 향기와 빛깔에서 자신만의 모습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독자성과 적응성, 이 두 가지는 불교사상의 흐름에서 보자면, 중요한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독자성이 없다면, 그것은 ‘불교’라는 간판을 걸 수 없을 것이고, 적응성이 결여되었다면, 그런 불교는 그 사회와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독자성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칫하면 시대와 여건을 무시한 메마른 이론이 되기 쉽고, 적응성만을 강조한다면 부처님 사상에 위반된 잘못된 사상을 불교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적응성을 강조하면 당장에는 사람이 많이 몰리는 일시적 효과는 누릴지 모르지만 길게 보아서는 불교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내고 말 것이고, 독자성만을 주장한다면 대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것이다. 대중이 없는 종교란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철 지난 옷에 불과하다. 독자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중과 잘 화합할 때 불교사상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발했고, 신록이 무성한 진녹색의 초여름같이 풍요로웠다. 이와 같이 불교가 번성했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독자성과 적응성이 잘 화합했는지 그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가 아쇼카 왕 이후 인도의 주요 종교세력이 되자 정체하는 현상이 생겨났는데, 이에 반성해서 생겨난 종교운동이 바로 ‘대승’이고, 대승도 다시 현실에 안주하게 되자, 다시 이를 딛고 일어선 것이 ‘밀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의 불교사상이 중국에 전해져서 중국 독자의 불교사상을 꽃피웠다. 중국불교는 인도의 불교사상과 중국의 토착사상이 서로 결합되어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인도의 불교사상 요소는 ‘독자성’에 해당하겠고, 중국의 토착사상 요소는 ‘적응성’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런 중국불교사상이 한국에 전해져서 한국 특성에 맞는 불교로 다시 탈바꿈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원효는 화쟁사상을 주장하였으며, 이는 당시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일치하였다.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은 당시의 불교계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정혜결사를 주장하고, 그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선(禪)사상을 제시하였다. 이렇듯 그들의 사상에서 원효와 지눌은 독자성을 지키면서도, 시대의 요구에 답하려는 적응성을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적응성과 불교 본래의 독자성을 한국불교는 일치시키고 있는가? 한국불교사의 과제를 거칠게 말하자면, 통일신라시대에는 교종 간의 이론적 조화를 추구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선종과 교종의 일치를 모색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억압하고 성리학(유교)을 숭상하는 정책에 맞서 불교·도교·유교가 본래 같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불교학의 과제는 과연 무엇일까? 현대는 인정하기 싫든 좋든 간에 서양의 문물이 지배하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독자성과 적응성의 조화라는 입장에서 보자면, 불교철학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서 서양사상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가 최대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과제에 해답을 모색하기 위해서, 이 방면에 있어서 서양의 두 대가, 콘즈와 칼루파하나를 비교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의 비교철학관에는 서로 대조되는 점이 있어서, 그 대조를 통해서 한국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의 비교를 어떻게 시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시사점을 던져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콘즈는 1904년에 태어난 영국의 불교학자인데, 문헌에 근거한 비판적 불교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 《인도불교사상사》 등 3가지가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D.J. 칼루파하나는 현재 하와이 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데, 《불교철학사》를 필두로 한 그의 저서 3권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은 국내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는 불교학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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