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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의 항일투쟁 지원

작성자배용호|작성시간26.06.08|조회수2 목록 댓글 0

작은 불꽃 하나…메뉴

중국조선족역사-항일투쟁 - 중국 조선족 항일 투쟁의 지원

jewhakim 2025. 7. 27. 00:21

                                                        중국 조선족 항일 투쟁의 든든한 지원군

                                                                          조선민족의 고달픈 역사

 

조선은 지도자를 잘 못 만난 탓으로 백성들이 고생을 많이 한 나라다. 1910년(경술년) 8월 29일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일컫는 매국노들에 의해서 나라를 일본 침략자들의 손에 넘겨줘서 우리 민족은 하루아침에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는 눈물겨운 민족이 되었다. 

▶ 을사오적(乙巳五賊)이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을 일본에 팔아먹는 일에 찬성한 다섯 명의 반역자, 매국노를 일컫는 말이다. 

을사오적 : 학부대신 이완용 · 군부대신 이근택 · 내부대신 이지용 · 외부대신 박제순 ·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1910년 대한이라는 나라는 망했지만, 민족이 망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이 살아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안에서 잃은 것을 밖에서 찾자는 심정으로 찾은 간 곳이 청나라 만주와 소련의 연해주였다. 대한은 삼면이 바다여서 갈 곳은 대륙과 이어져 있는 그곳밖에 없었다. 일찍이 우리 민족이 나라의 불행을 미리 예지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라가 망하기 300년 전부터 그곳에 이미 우리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 민족이 남의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 민족적 색깔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면서 현지인과 동화되었다. 나라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면 다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행보가 후일 구국 강병의 초석이 될 줄이야. 미처 몰랐을 것이다. 우리 민족을 향한 하늘의 섭리가 있지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그러면 언제부터 조선 사람들이 이 만주에 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만주와 동북 삼성

그 옛날에는 고구려에 속했던 땅으로 만주족(여진족) 이 살던 땅이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만주를 간도라고 불렀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2차 대전이 끝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 인민 공화국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만주는 세 개의 성(흑룡강성, 길림성, 요양성)으로 나누어지면서 동북 삼성이라 부르며, 만주라는 이름은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함경도, 평안도에 살던 조선인들이 고조선 시대부터 고구려,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을 텐데, 그 후손들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 시대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갔거나 현지 주민인 만주족, 한족, 또는 몽골족으로 동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동북 삼성에 있는 조선 사람들은 주로 세 가지 경로를 통해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조선인들의 후예들이 만주에서 뒷날 항일 투쟁의 근거지와 자원이 된다.

 

첫째 경로는, 조선 세종조(1433) 4군 6진 시대이다. 우리나라 북방은 산악 지역으로 경작할 땅이 많지 않아서 늘 양식의 부족함에 허덕이고 있었다. 거기다가 여진족의 침략으로 바람 잘 날이 없는 지역이었다. 두만강 건너 드넓게 펼쳐져 있는 들은 조선인들의 입맛을 당기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에서도 월경을 금하고 있었고, 더욱이 두만강 건너 드넓은 벌판은 청나라 정부가 아무도 못 들어오도록 봉금령(封禁令)이 내려진 곳이다. 그곳은 룡흥지지(龙兴之地 롱 씽즈띠)라 부르며, 만주족의 발상지로 청 제국 황제 강의제 때부터 선조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이름 밑에 도문 강 북쪽에서 압록강 남쪽에 이르기까지 천 리에 이르는 지역을 보호하는 법인 봉금령을 선포하여 이민족의 거주를 금하였다. 만일, 이 경계를 넘어와 거하는 자는 단두대에 세워 처형하는 엄한 법을 정했다. 그러나 강 건너 그냥 버려져 있는 넓은 들을 탐내는 조선 사람들이 가만 놓아둘 리 없었다. 저곳에 살길이 있다는 것을 안 가난한 농민들이 몰래 숨어 들어가서 밭을 일구어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어들이기 시작하였다. 1669년 함경도 북방 4군 6진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단두대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불법으로 정착한 것이 연변의 조선족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860년대 다시 계속되는 가뭄으로 살기가 어려워지자, 조선인들이 대담하게 두만강을 건너 연길 용정 화룡 등 더 넓은 연변 지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조선 민족의 장점은 개척 정신과 창의성 그리고 역경을 극복하는 끈기라 할 수 있다.

 

조선의 불법 이민자들로 양국이 긴장 관계에 있다가 1881년 봉금령이 해제되면서 조선과 청나라 정부의 개척 이민정책에 따라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연변의 기름진 땅의 소문을 들은 조선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안고 밥이나 먹고살려고 몰려왔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화전을 개간하였고, 논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연변에 조선 사람들이 집단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1885년에는 청나라 길림 장군이 조선과 길조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 도문 강 700리 강 왼쪽으로 너비 50리나 되는 지역을 조선족 개간 구로 정하면서 대대적인 개간이 시작되었다. 기억할 만한 사건은 조선 사람들의 노력과 지혜로 벼농사가 성공함으로써 조선 사람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고, 동북 지역의 경제 사정을 일변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연변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어 삶의 터전을 일구어낸 조선 사람들의 세상이 되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894년에 73,000명 정도가 정착하기 시작해서 경술국치가 있던 1910년에는 만주의 조선 인구는 109,500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벼농사

만주에서 조선 사람 이전에는 벼농사라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벼농사의 성공은 획기적인 일이며 역사의 새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연변 지역은 우량이 적고 기온이 낮아 벼농사가 안 된다고 여겼다. 1870년대에 들어와 동북에서 처음으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곳은 통화 현 하전자라는 마을이다. 함경도에서 온 김 씨라는 농민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와서, 여러 해 동안 그 일대의 기후와 수온의 상태를 파악한 후 함경도로 건너가서 볍씨 몇 근을 가지고 와서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논을 풀어 심었더니 가을에 예상 밖으로 벼가 잘 여물었다. 김 씨의 벼농사가 성공했다는 소식은 넓은 만주 벌판을 논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쌀 혁명을 가져오게 되었다.

 

1920년대에 조선 농민들 사이에 널리 불렸던 이 민요는 동북의 넓은 벌에다 벼농사를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계속 발전시킨 조선 농민들의 가난하고 고생스럽던(간고한) 생활과 벼농사에 대한 애착심의 소박한 감정을 진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조선족 농민들의 피와 땀은 황무지를 옥토로 변화시켰고 살림은 제법 틀이 잡히면서 오붓한 마을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게 되었다. 피여 가는 조선족들의 생활 형편을 보자 피비린내를 맡은 이리 떼처럼 난데없는 ‘점산호’라는 폭력자들이 나타났다.

 

점산호(占山戶, 지주)

점산호는 새로 생겨난 신흥 지주 계급들이다. 이들의 출신 성분은 토비(산적)이거나 망나니들로, 지금 우리말로 하면 깡패 건달 집단이다. 잘 살아가는 조선족들을 시기한 그들은 조선족이 일궈놓은 밭과 논이 탐이 났다. 그들은 청나라 관청에 뇌물을 주고 연변의 토지 소유권과 관리권을 얻어 조선 사람들의 토지를 빼앗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토지 소유권이란 것은 없고 널려진 땅을 누구든지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 되었다. 그들이 토지를 착취하는 방식 또한 아주 가관이었는데, 강과 산을 얼추 경계로 삼아 온종일 말을 타고 한 바퀴 달린 후 그 안을 자기 땅이라고 선포하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힘없는 조선족은 반항 한번 못 해 보고 피땀 흘려 만든 전답들을 하루아침에 다 빼앗겨 버리고 소작농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때부터는 황무지를 개간하려면 점산호들과 계약을 맺어야만 했다. 이제 조선 사람들은 그들의 머슴 같은 소작농이 되었다. 소작료는 점산호가 6할을 차지하는 4.6 제로 하다가 3.7에 그리고 2.8에까지 올라갔다. 현물에 대한 이자는 60%로 봄에 옥수수 1kg을 빌리면 가을에는 7.5 kg를 갚아야만 했다. 점산호들의 착취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생활 처지는 소나 말보다도 못하였다. 긴 겨울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을 주고 옥수수나 곡식 얼마를 받아서 모진 목숨을 부지하여야만 했다. 더욱이 점산호들은 청나라 통치자들의 명령에 따라 조선족과 한족들에게 치발역복(薙發易服, 만족처럼 앞머리를 깎고 만족 옷을 입는 것)을 요구하여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소작권을 주었고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소작권을 빼앗고 쫓아냈다. 조선족 농민들은 이러한 치욕적인 민족적 억압과 민족 동화 정책에 반대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우며 견디어 내야 했다.

 

둘째 경로는, 일제 탄압 통치가 시작되자, 애국지사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왜인들에게서 나라를 되찾겠다고 왜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만주로 오게 되었다. 애국지사 가족인 이회영 형제분들이 세운 신흥 무관학교는 항일전쟁을 위한 군 지휘관들을 배출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일본 침략자들은 동양척식 회사라는 것을 만들어 조선의 농토를 다 빼앗아 조선으로 이주한 가난한 왜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원래 땅의 주인인 조선 사람들은 왜인의 소작농으로 만들었다. 땅을 빼앗기고 파산한 농민들이 새 삶의 길을 찾아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31년까지 조선인은 409,402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이 인구는 모두 자발적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애국지사들은 학교를 세워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또 조선 기독교에서는 여러 교파에서 선교사들을 보내서 조선족 선교에 힘써 조선족 마을에 세워지는 기독교회는 민족의 애국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남의 나라에서 힘들게 살던 조선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혜로 마음의 위안과 기쁨을 누리는 안식처가 되었다. 세월이 어수선하던 때여서 만주에는 왜군의 폭력과 지역 공산당의 활동으로 지극히 불안정 한때였다. 이때 여러 교파에서 선교사가 순교를 당하게 된다. 내가 아는 두 분만 소개한다. 1921년 손상렬 침례교 선교사가 왜경에게 순교를 당한다. 또 1932년 10월 14일 연길 현 화첨자 종성동 침례교회 김영진 목사와 형인 김영국 장로가 공산당 30명으로부터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순교를 당한다. 순교자의 피가 흐른 연변은 기독교 신앙의 맥을 꾸준히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일차 조선 사람들의 만주로의 불법 이주와 오늘날 북한 동포의 탈북을 연관하여 생각해 본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지난날 지금의 북한 땅에서 일어났던 똑같은 일들이 지금 바로 그 땅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반복되는 역사의 진리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금세기에 북한 사람들은 독재자의 그늘에서 굶주리다 못해 살려고 중국으로 탈북하고 있다. 350년 전 봉건시대 조선 조의 조선 백성들도 굶주린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서 만주로 월경한 과정도 두만강을 숨어 건너는 똑같은 길이다. 어쩌면 이리도 똑같은지 놀랄 뿐이다. 월경, 탈북은 같은 뜻이다. 이제부터 하나의 단어 탈북으로만 쓴다. 같은 땅에 있었던 봉건왕조 이 씨 나라와 지금 있는 사회주의 왕조 김 씨의 나라가 정치체제도 같다. 수백 년의 시간 간격은 있지만, 탈북의 환경과 원인도 똑같다. 첫째 굶주림이다. 둘째 자유를 찾아서이다. 과거와 현재의 형편이 똑같으니 신기할 따름이다.‘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은 저 북방 땅에 딱 맞는 말이다. 공산주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재미있는 말을 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이다. 북방 땅에 적용해 보면, 조선 시대 조선 사람의 만주로의 탈북은 비극으로 시작되었지만, 희극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 사람의 만주로의 탈북은 비극으로 시작하여, 더 큰 비극이 되었다. 두 나라의 탈북 목적지가 같은 만주 땅인데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 준다.

2차 경로로 만주에 온 사람들은 나라를 잃고 삶을 빼앗긴 아픔을 안고 온 사람들이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차별을 받으면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 대한의 사람들에게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한을 되씹으며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이다. 이 동포들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로 든든한 독립군의 지원군이었다.

 

세 번째 경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강제 이주 정책에 따른 것이다. 1931년 9.18 만주사변을 일으켜 무력으로 만주 지역을 점령한 뒤 만주 제국을 세우고 청 왕조 마지막 황제였던 부위를 만주국의 허수아비 황제로 앉히면서 중국 본토 침략을 위한 전초 기지를 만든다. 또 현지에서 관동군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쌀농사를 지을 농민이 필요했다. 왜인들은‘개척 이민’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땅과 집을 준다고 우리 농민들을 속여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모집하여 강제로 이주시켰다. 개척 농민들은 왜군의 감시 아래 집단촌을 이루어 쌀 생산을 위한 논을 개간하는 데 주력하였다. 양식도 넉넉히 주지 않아서 굶주린 배를 움켜 안고 북방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내면서 개간하여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3년 동안 이주시킨 조선 농민은 48,839명에 달했다고 한다. 개척 이민자들은 길림성 안도, 설안, 그리고 흑룡강성 오상, 상지, 하얼빈, 아성, 야부리, 밀산 등지에 배치되었다. 조선 개척단이 황무지를 만든 논은 오늘날 중국에서 질 좋은 쌀 대 생산지가 되어 있다. 3차에 걸친 조선 사람의 이주민 가운데 2차, 3차 조선인이 항일 투쟁의 가장 활성화된 자원이 된다. 왜인들에게 속아 온 억울함의 분노로 적개심이 컸고, 조국 해방의 염원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조선족의 다수는 천하의 근본인 농민으로 땅을 차지하고 한 지역에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유리한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또 식량을 생산하므로 언제든지 먹을 것이 있어서 독립군의 양식 공급이 가능한 것이 큰 원동력이 되었다. 집단 마을은 조직적인 정보수집과 정보전달이 편리하였고, 필요한 인력 동원이 가능했다. 골짜기마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조선족의 작은 마을들은 독립군들의 작전과 활동을 원활하게 하는 편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청산리 대첩과 김좌진 홍범도 장군

한 번은 내가 연길 조선족 TV 방송국 출장팀과 두만강 변경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김일성 사실 여부와 청산리 대첩과 김좌진 장군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기자들은 나에게 김일성은 진짜이며, 청산리 대첩에는 홍범도 장군을 내세운다. 또 촬영 기사는 김좌진이 누구냐고 묻는다. 잠시 논쟁이 있었는데, 나를 초청한 기자는 청산리와 봉오동 격진 지가 연길서 그리 멀지 않고, 그때 그곳에 살던 분들도 있으니까 가서 확인시켜 줄 수 있다고 열을 내고 있었다. 이분들 가운데 아나운서와 기자들은 한국 KBS에 가서 한국 표준어와 역사 등 교육을 받고 와서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밝혀지고 자료도 많이 나와서 우리 의문을 풀어 주었다.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과 홍범도 장군 그리고 작은 부대를 이끈 지휘관들의 합작품이다. 청산리 전투의 사령관으로 김좌진 장군을 든다면, 청산리 못지않은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사령관의 몫이다.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부대의 사령관으로 작전은 하지만 공동의 적인 왜군에 대해서는 상호 협력적이었다. 그러면, 왜 그동안 우린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 저쪽은 김좌진 장군에 관해서 잘 몰랐을까? 이유는 이렇다. 남북이 갈라지면서 한반도의 역사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남한은 남한 출신의 김좌진 장군을, 북한은 북한 출신의 홍범도 장군을 청산리와 봉오동 대첩의 주인공으로 내 세워 일방적으로 가르쳐서이다. 양쪽 주장이다 옳다. 중국 조선족은 역사교육에 있어서 개방 전까지는 전적으로 북한의 영향 아래 있었다.

 

 

다행스럽게 한국의 SBS에서 2003년 7월 29일부터 3003년 9월 30일까지 124부의 야인시대가 방영되자 조선족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김좌진 장군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이제 우리는 혁혁한 공을 세운 두 분의 항일 투사를 같은 마음으로 대해야 하겠다.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미리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일 우린 민족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았다면 독립군의 항일 투쟁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연변의 용정, 도문, 화룡, 왕청, 이도 백화 와 태백산에 이르는 크고 작은 항일투쟁은 여러 독립군 단체가 개별적으로 때로는 연합하여 이룬 쾌거이다. 그때 만주에서 항일 투쟁하던 독립군 부대와 지휘관들을 참고로 열거해 본다.

 

부대 이름지휘관
북로군정서군김좌진, 김규식, 이범석
대한독립군홍범도
군무 도독부군최진동
국민회군안무
의민단허근, 강창대, 방위룡, 김연군
신민단김준근, 박승길, 양정하

 

중국도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중국 혁명사에서 조선 민족은 항일 투쟁의 동반자로서 혁혁한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모택동의 문화혁명 기간에 조선 민족은 큰 피해를 보았다. 특히 남한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온갖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10여 년 동안 숨죽이고 견디며 살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1989년 중국이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면서 1994년 한국과 국교를 맺는다. 이때부터 숨죽이고 있던 조선족에게는 Korean Dream에 들뜨기 시작하였다. 한국과 소련으로 나가면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중국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조선족의 위상이 달라졌다. 조선족에게는 돌아갈 나라가 있어서 희망을 잃지 않았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까지 모진 북풍 설한을 참고 견뎌 내듯이, 그 모진 세월을 절망하지 않고 참으며 견뎌냈다. 조선족에게 좋은 세월이 온 것은 틀림없지만, 반사 영향으로 조선족 가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개방과 더불어 조선 민족의 아픔과 불행이 시작되었다. 아내가 떠나가고, 엄마가 떠나가면서, 조선족 사회는 잿빛 구름에 덮이고 있었다.

 

조선족 인구의 이동으로 조선족 사회도 함께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중국의 조선족은 약 200백만이었는데, 50만이 고국으로 돌아가고 150만이 남게 되었다. 내 나이 6살 때 흑룡강성에서 살던 우리 가족 6명도 이 50만 명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1990년 인구조사에서 조선족 인구 1,925,970명은 10년 뒤인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10만 명이나 줄었다. 갈수록 인구가 줄어서 50년 뒤에는 중국에 조선족 인구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으로 인구학자들은 보고 있다. 지금 한국에 중국 조선족 70만이 살고 있다. 중국의 지방조직 법에는 어느 행정 구역에 소수 민족 인구가 30%가 넘으면 그 소수 민족의 자치 행정 구역으로 설정하는데, 그 많던 조선족 자치 촌, 면, 읍 그리고 학교가 사라졌다. 이제 얼마 남은 조선족 자치 시와 연변 조선족 자치 주도 인구가 이미 법적 수준 밑으로 내려가고 있으므로 없어질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에서 조선족은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한 희망은 없는 것으로 본다.

 

350여 년 전 굶주린 배를 안고 만주에 들어와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황무지를 개척하여 젖과 꿀이 흐르게 땅을 만든 조선족은 자랑스러웠다. 쌀농사를 모르던 중국인들에게 논을 만들어 잘살게 해 주었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조선족은 간고한 세월 가운데서도 자녀들의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49년 3월 20일 연변 조선족 대학은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 가운데 처음 세운 대학으로 조선족의 긍지요 자랑이다. 조선족의 교육열로 인하여 훌륭한 인재들이 중국 정부와 군과 교육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 중국 정부는 법으로 소수 민족 우대 정책을 펴와서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아왔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우대 정책은 사라졌고, 혁명의 동반자라고 치켜세우던 조선족 항일 유적지도 모두 없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용정의 일송정에 가 보면 실감한다. 또 시진핑의 China Dream은 조선족은 존재가치는 더는 특별하지 않다. 중국 조선족은 만주에서 항일 투쟁의 혁혁한 전공도 세웠고, 공산혁명에도 일조한 우월한 조선 민족, 이제 피와 땀으로 이룬 자랑스러운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떠나가고 있다. 조선족은 더부살이해 온 민족으로서 한족으로 동화되어 가거나, 조상의 나라로 돌아가는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특히 많은 조선족 여성은 한족과의 결혼으로 이미 한족화되었다. 중국은 간고한 세월 동안 조선족이 잠시 머문 나라이며, 조상의 나라가 번영하니 여기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1:1-3

Jewha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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