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4:19)
복음 증거자가 행하는 수고란
듣고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 수고가 해산의 고통을 가지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복음을 깨닫고
따라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는 일반적인 교회들에게 증거되는
싸구려 복음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성도가 된 자들에게 쓰여진 편지글을
자신들의 것으로 취하여
이미 다 된 것처럼 행세하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 마땅히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볼 수 없다.
한 사람이 복음을 깨닫는 데는
해산의 수고가 필요하다.
물론 사람의 노력으로써 믿음이
가져진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바울은 해산의 수고가 필요한
대상들에게 '나의 자녀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복음으로 낳았다라는 의미이다.
'나의 자녀들'이라는 호칭은
복음이 전해져서 그 의미를 깨닫고
그 위에 서게 하는 일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짐작케 한다.
복음 증거자가 듣는 자들에게
어떤 자세로 임하는지와
복음을 받는 자가 전도자에게
어떻게 비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누가 그같은 아비의 심정으로
복음 듣는 자들을 대하겠는가?
교회 부흥과 성장,
그리고 목회의 성공 차원에서
한 사람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는 것에는
그같은 아비와 자녀라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나는 일반 목회자였을 때와
복음을 깨달은 후에 전도자 되었을 때를
모두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그 차이가 얼마큼 다른지를 알고 있다.
복음을 깨닫고 그 위에 선 자는
복음을 듣고 따르는 자들에 대해
아비의 심정을 갖게 된다.
따라서 듣는 자들에게
믿음에 관한 모든 좋은 것을 나누게 된다.
작은 것이라도 참된 믿음을 갖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면 곧 알리어
믿음을 진작시키고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게 하기까지 최선을 다하게 된다.
이는 자녀와 같은 심정으로
믿고 신뢰하고 따르는 자들을 향한 것이다.
물론 일반 목회자들도 그러하다.
인간적 애착은 그들이 훨씬 더 강하다.
그러나 인간적 애착은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사람은 애착을 가질 수록
병적인 현상이 나타나 많은 기대에 따른
실망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남길 뿐 아니라,
관계가 깨어질 때에는
그리스도를 알았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복음에 대해 자녀와 같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전도자를 철저히 신뢰하고
그를 복음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게 된다.
그들은 복음에 대한 자세가 남다르다.
온 세상을 뒤져서라도
참된 진리를 찾고, 또 찾고자 했던 시도가
있었던 갈급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들을 때에
놀라움으로 곧 흡수하게 되는 자들이다.
그만큼 참된 진리를 찾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며,
거짓 진리들로 인한 마음 고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녀는 산통을 거쳐서 된 자들이다.
복음을 깨닫기까지는 시간과 몸살을
앓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이라는 싸구려 복음을
가진 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이다.
그 산통은 기존의 사고체계가
깨어지는 단계를 의미한다.
복음은 그것을 깨닫을 때 지난 모든 삶을
모두 허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복음은 빛이다. 어두움 속에 희미한
한 줄기 빛이 큰 광명으로 비쳐질 때에
알지 못하고 믿었던 지난 삶을
크게 후회하거나 원통해 함과 동시에
현재 복음을 접하게 된 것을
크나 큰 행복과 은혜로 여김을
의미하는 것이다.
복음으로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전도자를
아비와 같이 여기게 된다.
복음을 듣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아비와 같이 대하는 것은 아니나,
그들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전부와
생명으로 여기는만큼
전도자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
복음으로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그것을 깨닫게 하기까지
얼마큼의 수고가 따르게 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수고란, 인간적인 애착이 아니다.
본래적으로 가진 율법적 사고를
깨뜨려 버리게 하는 일이다.
거기에 큰 수고가 따르는 것이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지금껏 옳다고 여겨왔던 사고 방식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것은
기적적인 사건에 해당한다.
사람은 결코 스스로는 자신의 사고쳬계를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각오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스스로 살려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을 따르는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룩한 삶을 이룸에 있어서
율법적 종교 의식을 받아들인 일로 인해
오직 성령을 따라야 할 자들의
그리스도의 형상이
무너져버렸던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살게하는 것은
모든 율법적 사고와 의식,
그리고 육신에 속한 의지를 버려서
스스로의 힘과 지혜와 열심으로
사는 것을 버리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따르게 하는 일이다.
아주 작은 행위라도
믿음의 어떤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면
그것이 곧 바리새인의 누룩이 되어
순식간에 믿음을 버리고
행위를 의지하는 율법적 삶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자는
자신의 어떤 의도적인 행위로도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삼지 않는다.
그는 오직 성령 안에서의 삶만을
구하고 따른다.
곧 그리스도가 전부와 생명이
되게 하는 믿음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주 작은
율법적 행위를 받아들였다면
그 율법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는 점이
곧 믿음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너뜨린 의미가 되므로
오직 믿음과 성령으로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복음을 다시 깨닫게 해야 하는
수고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쓰는 이 글도 해산하는 수고에
해당함을 잊지 말라.
당신이 행하는 율법 행위,
다시 말해 교회 생활이나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에 따르는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하거나,
흠없고 죄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려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님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예배나 기도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믿음을 원하시고 그에 근거하여
종교적 행위를 멈추고
오직 그리스도의 긍휼을 구하여
구원함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만일 당신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사는
실제적인 내적인 체험이 없이
예배를 비롯한 교회의 종교적 삶을
행하고 있다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야 할 상황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은 하나, 사실상 유대교의 삶을
사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라보라.
그는 아버지가 행하게 하시기까지
아무 것도 스스로 행하지 않으셨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나는 당신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바울이 행했던 수고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도 그의 형상을 갖게 된다면
이같은 수고를 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복음에 따르는 믿음의 삶이
얼마나 다르며,
얼마큼 빛의 삶이며 영광된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십자가를 보라.
거기에 당신의 죽음이 있는 것을 !
다시는 자신를 위해, 자신에 의해
살고자 하는 자기 생명을 버리고
그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따르라.
그리고 당신 안에 있는
믿음을 거부하는 모든 육신의 삶을
그의 말씀을 듣고 내려 놓으라.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17.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