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나와 나무 사이에는 삶이 있었네-텍스트와 텍스트를 섞어라

작성자김서정|작성시간19.12.29|조회수113 목록 댓글 0

3강 나와 나무 사이에는 삶이 있었네

텍스트와 텍스트를 섞어라

국립민속박물관을 나와 길을 건너면 현대미술관 앞에 세 쌍둥이 비술나무가 서 있다. 150년 이상 된 세 나무를 쌍둥이라고 한 것은 크기도 모양새도 비슷해 부르는 것이지, 정말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사각 진 건물 앞 작은 둔덕에서 도로와 경복궁을 가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우아하다 못해 경건해진다. 하얀 수피가 두드러진 비술나무에 집중하고 있으면 도심 속 숲이 아니라 숲 속 도심에 있는 듯 몸이 가벼워진다. 고개를 들어 천천히 가느다란 나뭇가지와 작은 잎들을 보고 있으면 숲 속 하늘이 열린 듯 마음이 풍선 같아진다. 모든 게 정지되며 고요가 찾아온다.
<랩걸>에 나오는 글을 보자.
[숲의 가장자리는 혹독한 무인지대다. 거기서부터 나무가 더 자라지 않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숲의 가장자리에서 몇 센티미터만 벗어나도 물이 너무 적고, 해는 너무 적게 비추고, 바람이 너무 많고, 너무 춥고 등등의 이유로 나무 한 그루도 더 자랄 수 없는 환경이 된다.]
이 글을 보면 나무 생장이 멈춘 곳에서는 우리도 살 수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온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나무가 자라지 않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은 무엇일까?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래도 오래된 보호수(保護樹)가 주는 위안은 크다. 이마저 없다면 삶은 황폐한 땅에 내몰리는 듯한 두려움으로 가득해질 것이다.
삶을 깊게 성찰시켜주는 나무를 혼자만 품고 있으면 좋으련만 해설은 무엇이든 말로 나누어야 한다. 말이 안 되면 말을 하게끔 해서라도 시간을 이어가야 한다. 하지만 말을 끌어내려면 또 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또 해야 하는 말이 중복된다면 실제로 난감해진다. 5월에 오신 참가자는 분명 비술나무 해설을 들었을 텐데, 그 말을 다시 하기가 꺼려진다. 처음 비술나무를 마주한 참가자도 계시지만, 내 입에서 반복의 말들이 머뭇거려진다. 방법은 하나다. 전에 했던 말을 압축해 빨리 하고 새로 준비한 이야기를 하면 된다.
“왜 우리는 오래 사는 나무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질까요? 한 번 저 비술나무를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눈에 담으며 위로 올라가보겠습니다. 어떤가요? 위로가 되나요? 힐링이 되나요? 삶에 의지가 다져지나요?”
참가자 대부분은 수긍을 한다. 그러면 또 묻는다.
“저 위에 무엇이 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질까요?”
‘하늘, 공간, 바람, 구름, 사이, 생명, 나’ 등등이 나온다.
“좋습니다. 이를 좀더 시적인 표현으로 하면 어떤 게 있을까요?”
“여백?”
“맞습니다. 여백입니다. 이는 제가 한 말은 아니고 도종환 시인의 시를 보고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또 하늘을 올려보고는 잠시 침묵한다. 고요에 여유로움이 스며든다. 아주 짧은 도심 속 나무 명상의 시간이다.
해설 현장에서는 읽지 않았지만, 여기에 도종환의 ‘여백’을 옮겨놓는다.

여백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여기까지는 감성이 고조될 수 있는 여릿여릿한 이야기로 내용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다음부터는 딱딱하고도 무거운 이야기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뜰에 있는 종친부 경근당 건물 옆에 서면 보호수로 지정된 오래된 소나무를 볼 수 있다. 그곳에 참가자들을 일렬로 서게 하고 말한다.
“소나무에 대해 식물학적으로 아는 것 하나, 선생님의 삶 속에 있었던 추억 하나, 이렇게 두 가지를 들려주세요.”
하나씩 꺼내 놓으면 소나무에 대한 이야기들은 거의 다 나온다. 굳이 내가 소나무 해설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게다가 독특한 추억이 나오게 되면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이어져 분위기는 밝아진다. 그런데도 내가 준비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곧바로 말한다.
“선생님들이 만일 조선시대에 살았다면 소나무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겁니다. 소나무는 임금의 독점 소유물이었습니다. 소나무 베다가 걸리면 사형으로 다스린 시대였습니다. 벌채를 금지한 봉산(封山)제도, 일정한 용도에 쓸 목재의 채취를 금지하는 금산(禁山)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그러고는 6월의 주제인 나무와 권력에 대해 말을 이어간다.
먼저 소나무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이 충청투데이에 쓴 글을 옮겨온다.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秦)나라 진시황이 그 사연의 주인공이다. 그는 하늘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天子), 즉 황제가 됐다. 어느 날 그가 봉선제(封禪祭 : 천자가 흙을 쌓아 단을 만들어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를 끝내고 환궁하는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어가(御駕)는 폭우를 감당하기에 너무 부족해 그 행렬은 멈춰야 했다. 그러나 지나는 곳이 허허벌판이라 쉴 만한 곳이 없었다. 이러 기를 지속하다 신하가 어가 앞으로 뛰어왔다. 저 멀리 큰 나무가 보인다는 것이다. 서둘러 그 나무 밑으로 갔다. 거짓말 같이 억수 같은 소나기를 피할 수 있었다. 소나무 가지가 너무 무성해 거대한 우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비가 그치고 출발하려던 차에 진시황은 신하들에게 이 나무의 이름을 물었다. 하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아니 이름이 없는 나무였다. 비를 피해 쉴 수 있어서 고마운데 이름도 모른 채 지나침을 안타깝게 여긴 진시황은 이 나무에 작위, 즉 벼슬을 내렸다. 그것도 작위의 최고 등급인 공작(公爵)이었다. 우산 역할을 했던 나무는 '목공작(木公爵)'이란 벼슬을 얻었던 게다.
그 후 사람은 그 나무를 '목공작'으로 부르다 어느 때부터 작(爵)을 빼고 목공(木公:mugong)이라 했다. 이처럼 목공으로 불리다 어느 누가 실수로 '목과 공'을 붙여 한 글자로 쓰는 바람에 송(松:song)이 됐다. 옛 문헌을 보면 소나무를 목공이라 표기한 곳도 있다. 무명의 나무가 우연찮은 우산 역할로 이름을 얻었고 나무의 제왕마저 차지한 셈이다.]
이는 속리산 정이품송 이야기와 비슷한 구석이 엿보인다.
다음은 회화나무다. 나무 책들을 보면 회화나무와 관련해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주나라 제국 건설의 행정 직제와 직무 지침서를 기록한 주례(周禮)에 쓰여 있다는 내용이다.
삼괴(三槐)는 삼공(三公)을 뜻하는 말로 주대(周代)에 조회(朝會)할 적에 궁정의 세 그루 회화나무 쪽으로 삼공이 얼굴을 향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 삼괴구극(三槐九棘)이 있는데 이는 세 그루 홰나무와 아홉 그루 멧대추나무를 뜻하는 것으로 주나라 때 조정의 뜰에 홰나무 세 그루와 멧대추나무 아홉 그루를 심고 공경대보와 삼공(三公)들이 그 아래에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습이 우리나라에도 이어져 나무에 신분을 부여하였고, 신분과 계급에 따라 식재하는 나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살아서 직위와 사는 정도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적용되었다. 중종실록에 나오는 글이다.
[《예기》를 강(講)하다가 시강관 김희열(金希說)이 글에 임하여 아뢰었다.
"이 책에 ‘서인(庶人)은 그냥 하관(下棺)하고 봉(封)하지도 않고 심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개 관혼상제(冠婚喪祭)에는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에 따라 높이거나 깎아내리는 등급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봉(封)이라는 것은 구롱(丘壟, 무덤) 이라는 것이고, 심는다는 것은 나무 심는 것을 말합니다. 천자는 소나무를, 제후는 잣나무를, 대부는 밤나무를, 사(士)는 느티나무를 심고, 서인은 나무를 심지 못하는 등 장사지내는 등급이 이같이 엄격합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일은 모르지만, 유독 장사지내는 일만은 서인·천례(賤隷)·장사치들도 재력만 있으면 그 표석(標石) 등이 사대부의 분묘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고례(古禮)로 본다면 지극히 참람하니, 금단을 거듭 밝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와 관련되어 매일신문 2019년 8월 12일자에 실린 강판권 교수의 글을 보자.
[주나라는 나무의 종류에 따라 죽은 자의 신분을 구분했다. 죽은 자를 묻은 무덤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사라질 수 있지만 나무는 아주 오랫동안 존재할 뿐 아니라 죽으면 다시 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나라에서는 천자의 무덤에는 소나무를, 제후의 무덤에는 측백나무를, 사의 무덤에는 회화나무를, 백성의 무덤에는 버드나무를 심도록 했다.
신분에 따라 나무의 종류를 달리한 것은 나무도 신분처럼 격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자와 제후의 무덤에 심은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늘푸른큰키나무라는 공통점이 있고, 사와 백성의 무덤에 심은 나무는 갈잎큰키나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자료들이 일관성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일일이 확인해볼 만큼 열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텍스트에 덧입혀진 덱스트를 보면서 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 하나, 나무에게도 권력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내가 그때 한 이야기를 정리해 적을 수 없는 것은 이야기 도중 질문이 들어오면 그에 따라 이야기 전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내가 어떤 식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갔는지 명료하게 재생해낼 수 없다. 돌이켜 보니 이런 식의 소설 같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대략 소나무 옆에는 임금이 서고, 회화나무 옆에는 삼정승이 서고, 멧대추나무 옆에는 육조판서가 서 있었을 것입니다.”
“백성이 죽으면 사시나무를 심게 했습니다. 죽어서도 벌벌 떨라는 의미였겠지요.”
막 뒤섞이다 보니 일어난 일이다.

아니 그곳에는 소나무 뒤에 정말로 회화나무 대여섯 그루가 자라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확실히 정리되지 않은 사안들을 단순화시켜 이해를 돕기 위한 이야기 구성을 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가였기에 그랬던 것보다 이런 식의 멘트는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 야외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큰 잘못이 되지 못한다. 이를 기반으로 더 깊은 공부를 해나가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어디 가서 해설을 들을 때 낯선 이야기가 나오면 꼭 기억해 두었다가 확인하면서 공부를 한다. 이는 해설뿐만이 아니라 모든 텍스트를 대하는 기본 자세일 것이다. 모든 텍스트는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해설의 핵심은 순간의 진지한 재미라는 점, 꼭 기억하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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