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신
풍경(風磬)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때가 되면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허공에 헛된 꿈이나 솔솔 풀어놓고
나 하루종일 게을러도 좋을 거야
더벅머리 바람이 살살 옆구리를 간지럽혀도
숫처녀마냥 시침 뚝 떼고 돌아앉는 거야
젊은 스님의 염불 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낮에는 부처님 무릎에서 은근슬쩍 코를 골고
저녁 어스름을 틈타 마을로 내려가서는
식은 밥 한 덩이 물 말아 훌러덩 먹고 와야지
오다가 저문 모퉁이 어디쯤
차를 받쳐놓고 시시덕거리는 연인들의 턱 밑에서
가만히 창문도 톡톡 두들겨보고
화들짝 놀라는 그들을 향해
마른 풀잎처럼 낄낄 웃어보아도 좋을 거야
가끔은 비를 맞기도 하고, 비가 그치면
우물쭈물 기어 나온 두꺼비 몇 마리 앉혀놓고
귀동냥으로 얻은 부처님 말씀이나 전해볼거야
어느 날은 번개도 치고 바람이 모질게도 불어오겠지
그런 날은 핑계 삼아 한 사나흘 오롯이 앓아누워도 좋을 거야
맥없이 앓다가 별이 뜨면
별들 사이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칠 거야
그런 날이면 밤하늘도 소란스러워지겠지
그렇게 삶의 변두리를 배회하다가 내 몸에 꽃이 피면
푸른 동꽃[銅花]이 검버섯처럼 피어오르면
나 가까운 고물상으로나 팔려가도 좋을 거야
주인의 눈을 피해
낡은 창고에 처박혀 적당한 놋그릇 하나 골라
정부(情婦) 삼아 늙어가는거지
세월이야 오기도 하고 또 가기도 하겠지
늘그막에 팔려간 여염집 처마 끝에 매달려
허튼 소리나 끌끌 풀어놓다가
가물가물 정신을 놓기도 하겠지
그런 연후에 모든 부질없는 것들을
내 안에 파문처럼 켜켜이 쌓아놓고
어느 하루 날을 잡아 바람의 꽁무니에 몸을 묻어도 좋을 거야
1973년 전남 여천 출생.
1999년 전주대 국문과 졸업.
현재 완주군 소양 마음사랑병원 기획실 근무.
- 양인숙
그 날, 아버지가 세워놓은 지게가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돌담 밖으로 무너져 내리던 오십년지기 박토의 일생이 희망과 절망이 반쯤 절은 진눈깨비로 흩뿌려졌다. 모두들 떠나버린 시골마을 어귀에 순박한 하늘 한복판을 들여놓으며 넘어진 아버지의 빈 지게 위로 소나기도 함박눈도 되지 못한 회색 구름이 총총 걸린다. 당뇨병으로 수척해진 아버지의 말년, 날마다 야위어가던 퀭한 얼굴에 십일월의 시린 날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보라빛 상념이 달개비 꽃으로 피어나고 가끔씩 뱉어놓은 무서리에 놀라 고개를 떨군다. 무릎 저린 십일월의 진눈깨비 가슴마다 설움 깊어도 당뇨병 치료에 특효약인 달개비꽃 탕관에 달여지면 돌밭 사이로 하얀 씨앗들이 한숨을 묻고 있다. 중국산 수입 약초 향기에 밀려서 제 값 받지 못한 채 등 굽어 마르던 아버지의 잔기침소리. 희망과 절망의 반쯤 절은 십일월의 진눈깨비가 아버지 허리춤에서 겨울의 마지막 기운을 모아 힘찬 기지개를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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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인숙
1964년 8월 26일 제주생
제주대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 수료
표선상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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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시 심사평]허세부리지 않은 따뜻한 일상
해마다 그렇지만 올해에도 자갈밭에서 옥(玉)을 고르는 수고를 면할 수 없었다. 어려운 일은, 자갈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골라낸 옥 가운데서 최상품의 돌을 고르는 것이었다. 부지런히 추리고 남은 것이 7편- 그 중에서 다시 3편을 골라, 두 사람이 돌려읽기를 수 차례 한 끝에 마침내 양인숙씨의 「십일월의 진눈깨비」를 당선작으로 낙점할 수 있었다. ‘버린 작품’ 중에는, 당선작을 내고 나서도 몇 번이고 다시 만지작거려야 했던 수작들이 있었다. ‘택시일지’라는 부제를 단 연작 중의 「나의 위치와 속도는 감지되고 있다」도 그런 작품이었다. 서울에서 응모한 작품인데, 입담이 좋고 도시 속에 산다는 것의 실존적 의미를 묻는 주제도 육중하다. 그러나, 방만해지려는 언어를 효과적으로 수습하지 못한 흠이 걸려 읽기가 편치 않았다. 이와 정반대의 예로는, 경주에서 보내온 「저녁」이 있었다. 단 8행의 시였으나, 주옥이었다. 그러나 동봉한 다른 보석들은 불순물을 꽤 함유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대구에서 온 「보리밭」, 충북 음내리에서 온 「나무」, 서울에서 온 「침묵의 말로 꽃을 피우다」, 경남 진주에서 온 「上無住, 溪澗」도 독자 제위께 한 번 보이고 싶은 작품들이었다. 당선작 「십일월의 진눈깨비」는 대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대단치 않은 이야기를 대단치 않게 이야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 시에서 내리는 진눈깨비는 따스한 체온을 가졌다.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허세를 부렸다면, 지금처럼 ‘가슴 찡 해지는’ 시가 못됐을 것이다.
/심사위원: 한기팔(시인), 송상일(문학평론가)
< 조용한 가족 >
- 이동호
무상 임대 아파트 8층 복도,
한 덩이 어둠을 치우고 걸어 들어간다.
복도가 골목 같다.
이 골목은 일체의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복도가 직장이기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도를 벗어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이곳에서 사표를 낸다는 것은
極貧의 뜻이고,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일층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승은 주로 일층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고층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시 죽음과 내통하는 셈이다.
작년, 두 사람이 일층으로 순간 이동했다.
올해는 벌써 두 명분의 숟가락이
고층에서 주인을 퍼다버렸다.
몇 사람 더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으니
한 두 집 더 빈 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밤하늘은 눈치가 빠르다.
미리 弔燈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아파트 속에 조의금처럼 들어앉아 있다.
일부는 여전히 복도를 서성이다가
아무런 말없이 일층을 내려다보곤 한다.
이곳에서는 침묵도 하나의 宗派가 된다.
사람들은 침묵을 광신도들처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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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
△1966년 김천 출생
△대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성균관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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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당선 시 심사평] '담담한 필치.적절한 언어 돋보여'
예심을 거쳐 온 40여 편의 작품에서 최후까지 남은 것은 '이월의 우포늪'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조용한 가족' '밥 나르는 여자' '새들은 날아간다' '술래잡기' '통장정리' '공단 세탁소' '신라 주유소' '파장' '소문' 등이었다.
모두들 그만그만한 목소리로 자기나름의 색깔을 지니고 있어 선뜻 이것이다 라고 손을 들어주기에는 몹시 망설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정서의 구체화된 표현의 적절성을 염두에 두고 고심한 결과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이월의 우포늪' '조용한 가족' '새들은 날아간다'로 압축되었다.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는 그 짜임새나 이미지 처리의 깔끔함이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신인다운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덜한 점이 아쉬운 것이었다.
'이월의 우포늪'은 고대와 연결시킨 상상력의 확대가 우포늪의 분위기를 돋보이게 하는 솜씨가 주목을 끌었으나 그것을 어떤 인생론적 내용으로 좀더 구체화시켰으면 하는 지적이 있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새들은 날아간다'는 신인다운 활달한 감성과 거침없는 이미지 구사가 호감이 가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속에 지닌 내용과 엇박자 되는 구절들이 있어 보여 이것 역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조용한 가족'은 가난이 빚는 아픔을 얄밉도록 담담한 필치로 그려나가고 있는 시선이 돋보인다. 시니컬한 이런 시선은 자칫 격정의 목소리로 떨어지기 쉬운데 끝까지 제3의 눈으로 이끌어 가는 능력이 호감이 갔다. 또한 작품을 이끌어가는 적절한 언어 구사도 마음을 끌었다.
그래서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거듭 말하지만 예심에 올라온 앞의 열 한 편들은 보기에 따라 어디에 내어놓아도 당선작에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었다. 더욱 분발을 바라며 정진을 빌 따름이다.
권기호(시인.경북대 명예교수) / 정호승(시인)
< 눈물길 >
- 김춘남
기가 막혔다. 눈물길이 막혔으니….
길은 어디에나 있다고 하더라만,
미처 몰랐다.
눈물에게도 길이 필요한 줄은 정말 몰랐다.
무심코 사는 것도 바빠서
세례만 받고 교회에 안 나가는 신자처럼
눈물의 존재를 잊고 산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곰팡내 나는 일기장을 들추어보니,
'눈물은 나의 신앙'이라는 얼룩진 표현도 눈에 띈다.
가뭄에 메말라버린 골짜기의 저수지처럼
가슴 속 밑바닥의 뻘이 드러나면, 그 속은
흉물스러운 쓰레기들이 방치되어 있을 테지.
이마며 가슴에 환경보호 띠를 두르고
환경 지킴이로 동분서주
개발이냐,환경이냐를 역설하였는데….
건조주의보의 나이에 들면서
먼 곳의 우포늪은 잘 보여도 정말 가까운
눈물샘은 돌보지 않았다.
고도근시와 난시를 동반한 마른 가슴은
어이없게도 눈물길을 막아버렸다.
물론 수술만 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지만,
마음이 담수되지 않고서는
길이 있어도
눈물은 결코 가지 않으리라.
눈물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몰된 고향과 같은 것.
인생의 이정표에 없는 눈물샘으로 가는 길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좁은 길
잡초에 묻혀 있던 고향 가는 길에 눈물길은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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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심사평]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눈물길 외 4편''물 한 잔과 자전거 외 2편''금성 라디오 외 4편''밤깎기 외 5편'이었다. 이 중 '금성 라디오'와 '밤깎기'는 그 상상력의 전개는 좋으나 형상성의 부족에서 오는 '얹기'의 결핍은 '울림'과 그로 인한,정서와 사유의 '교환'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눈물길'과 '물 한 잔과 자전거'의 두 편이었다. 이 중 '물 한 잔과 자전거'의 언어는 맛깔스럽고 재기에 넘치나,약간의 작위가 '교환'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시의 '울림'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눈물길'은 형상성에서 오는 '울림'이 시읽기를 유혹하고 있었고,이 유혹은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구체적 삶의 경험에서 길어올린 것이었으므로 더욱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교환'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미덕 중의 또 하나는 그 감동의 수준이 시 5편을 골고루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눈물길'을 당선작으로 하기에 심사위원들은 합의하였다. '재기'보다 '얹기'와 '교환'에서 오는 '형상성의 울림과 감동'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모든 이들,정진을 바란다.
/시인 강은교·최승호
< 4 월 >
- 최미경
벚꽃이 전쟁처럼 흩날리는 저녁
바그다드 도서관이 불에 탄다
길 위에 사람들은
낡은 책 안으로 사라져가고
죽음은,
검은 주머니 가득
모래 폭풍을 싣는다
어둠을 달리던 바람의 마차들
달빛아래 드러나는 폐허의 이빨들
희망도
절망도
깨진 꽃잎을 주워 담으며 중얼거린다
…봄은,
학살이다
홀쭉해진 계절을 틈타
별빛도 마른 티그리스 강가
어린 소녀들의 물동이 안에서도
달은 자라고
포탄이 떨어진 자리마다
흰 꽃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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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7명의 91편이었다. 엄선에 엄선을 거듭한 것이었으므로 다들 일정 수준을 상회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난형난제에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바람에 실로 자웅을 결하기가 어려웠다. ‘소리도에서’‘옷 만드는 여자’ ‘누드’ ‘부활’ ‘사자가족’ ‘막차’‘아버지의 겨울’‘남산동 2가’‘도배를 하며’‘4월’ 등 10편이 남아 한판 겨루기를 계속하였다.
설왕설래 끝에서야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였는데, 압축력이 약해 느슨해진 것, 너무 사변적이고 설명적인 것, 시적 변용에만 겉멋을 부린 것, 지나치게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것, 감상적인 색칠하기에 급급한 것, 가식적 위장술로 교묘히 포장한 것, 시류에 편승한 산문적 억지를 고집한 것 등의 이유를 들어 얻어낸 결과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일전을 겨룬 작품은 ‘아버지의 겨울’ ‘남산동 2가’‘4월’등 3편이었다.
‘아버지의 겨울’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에다 기성 시인의 냄새가 너무 짙은 나머지 오히려 낡은 매너리즘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역으로 ‘남산동 2가’는 용기와 열기를 앞세운 젊은 혈기와 현실 재단적 안목은 대단했으나 그만큼 거칠고 미완적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점까지 참작하여 작품 ‘4월’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선작 ‘4월’은 다소 소품적인 데가 있으나 그만큼 군더더기가 없는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고 행과 연 구분의 탄탄한 구성력과 참신성이 돋보이는 데다 공교롭게도 최종심에서 겨루다 탈락하게 된 두 작품의 장단점을 무리 없이 절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 또한 크게 참작되었음은 물론이다. 서정의 본령과 시적 정공법을 지속적으로 살려 앞으로 좋은 작품 많이 써 주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김용택 김창근
< 대흥사 가는 길 >
- 임 곤 택
숲에서 나온 길이 나를 앞질러
동백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뼈를 묻을 곳을 찾는 늙은 동물처럼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쉼이 없었다
저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산 그림자와 함께 산을 넘은 바람은 숲에 머물고
알 수 없는
사실 조금은 알 듯도 한 무엇을 보았던지
상기된 꽃잎들이 연이어 숲을 나오고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며 총총히 길을 건넜다
나무들이 울부짖듯 노래를 부르고
위태롭게 펄떡이던 잎들 위로
오랫동안 공중을 떠돌았을 시퍼런 영혼들이
막 새 몸을 얻어 힘겹게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것은 명백해 보였다
동백숲으로 사라진 길은 돌아 보지 않았고
동백꽃만 검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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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심사평]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성, 깊이 있는 주제 형상화 돋보여
불교신문 신춘문예라는 특징 때문인지 응모된 시(시조) 작품의 대다수가 불교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대다수가 불교적 세계관을 작품 속에 내재화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제재로 다루어진 것들이었고, 불교적 관념만 생경하게 노출되어 있을 뿐 한 편의 정제된 시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적지 않은 작품이 만만치 않은 시적 역량을 보여 주어 심사의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남은 작품은 ‘대구머리 찜을 먹으며’(최숙자), ‘고물상 장씨’(금이정), ‘대흥사 가는 길’(임곤택) 등 세 편이었다. ‘대구머리 찜을 먹으며’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인간의 내면적 고통과 삶의 애환을 가다듬은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대구머리 찜의 묘사와 일상적 삶의 반성의 교직이 작위적인 데다가 다소의 감상기가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고물상 장씨’는 배냇병신인 고물상 장씨의 삶과 폐품이 되어 고물상에 버려진 물건을 대비시킨 상상력과 단순한 비유법에서 느껴지는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고물상 장씨의 배냇고물인 왼팔에 얽힌 사연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재생을 꿈꾸는 사물과 인간의 욕망이 긴밀한 조응을 이루지 못했다. 이와 함께 ‘고물캉’과 같은 어휘가 시적 긴장감을 이완시켜 놓았고 “고물상을 동그랗게 에워싸던 불빛도 차츰 사그러진다”를 독립연으로 처리한 것도 애매했다.
‘대흥사 가는 길’은 첫눈에도 잘 다듬어진 작품임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별 군더더기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짜여진 구성과 평이한 어휘와 조사(措辭)를 통해 생사의 반복적 순환과 그 경이로움에 관한 깊이 있는 주제를 형상화한 솜씨가 녹록치 않았다. 이 작품이 주는 ‘잘 정제된 작품’이란 일차적 인상은 신춘문예 응모용이란 혐의를 주는 게 사실이지만, 작품을 이만큼 잘 만들어낼 수 있는 기량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과 함께 투고한 작품이 보여주는 고른 수준을 시 당선작으로 뽑는다.
앞으로 신인으로서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갖추면 좋은 시인이 되리라 믿으며, 더욱 정진할 것을 부탁드린다.
- 장영우 (동국대 교수)
< 토우 >
- 권혁제
평택 三 里에 비가 내렸다
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
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
석탄재 날린 진흙길 따라
드러누운 경부선 철길
裸女가 흘린 헤픈 웃음 위로
금속성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기차가 얼굴 붉히며 지나갔다
한 평 쪽방의 몇 푼 어치 사랑에
쓸쓸함만 더해주는 汽笛소리
누이의 嬌聲이 흘러 다니는 三 里
누이의 꿈은 거기에 있었다
밤마다 사랑 없는 사랑이
하늘로 가는 문턱을 움켜 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축축한 신음소리만 되돌아 오는
갈 길 먼 꿈들은,驛廣場에 쏟아져 나와
가슴 뚫린 퍼런 그림자로 떠돌아 다녔다
갈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의 품을 찾아서
무뚝뚝한 하행선 열차가 떠나가고
반 시간쯤 후에 비가 내렸다
부활의 율동으로 옷을 벗는 누이,
三 里에 내리는 비릿한 土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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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제
1965년 경기 평택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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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심사평]
본심으로 넘겨진 20여 분의 응모작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우리가 공통으로 느낀 것은 개성이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없다는 거였다.(하긴 그런 작품을 선자로서 만나는 것도 복이다.)대신 오랜 연마기가 느껴지는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은 꽤 있었다.
우리는 다섯분의 작품들을 놓고 토론을 시작했다.박성희의 ‘유년의 계단’은 얼핏 담박하면서도 어릴 적 기억과 어른의 일상의 어울림이 만만찮게 복잡하지만 후속작은 추억과 일상으로의 2분법이다.김경진의 ‘달팽이가 무섭다’는 자연과 자아의 관계가 절묘하지만 후속작에서는 무너진다.‘전남성로원’을 쓴 김창헌은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으나 아직은 그 가능성들의 온전하고 총체적인 주인이 아니다.
천서봉의 ‘나무에게 묻다’는 자연과 일상과 종교적 신비의 구경이 산 속의 고요 속에 절묘하게 녹아 들어있으나 심상 사이 모호한 주름이 장식적이며 화려한 수사의 찌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끝내 지울 수 없다.선자들로서 매우 안타까운 대목이었음을 굳이 적어둔다.
‘토우’외 3편을 투고한 권혁제는 ‘토우’ 첫 2행의,버려진 도시의 향토적이기까지 한 정서(평택 三 里에 비가 내렸다/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를 ‘누이의 嬌聲’을 통해 한반도 전체의 아픔으로 끌어올리는 광경이 흥건하고 또 흥건하다.그리고,‘토우=웃음=비명’의 등식이 만만찮은 복잡성을 시의 육체에 부여한다.‘밀물’과 ‘우기’에서도 ‘흥건=복잡’은 적당하다.우리는 이 광경을 뽑아 선에 들지 못한 사람을 적셔주는 방식을 택하기로 하였다.
/ 김명인, 김정환
< 유적 >
- 예현연
금간 항아리 사이로 그녀와 내가 교차한다
비어있는 것들을 배경으로 그녀는 흐릿하다
先史보다 아득하게 먼지낀 세월이
두터운 유리벽으로 앞을 가로막는다
古代의 여인이 회갈색 미라로 누워있다
유폐된 황녀의 마지막은 고통뿐이었다
벌린 입 속 수천년을 견딘 치아들이 온통 틀어졌다
푸른 비소 알갱이 갈앉은 자기병이 그녀의 유품이다
벽옥 파편들은 멸망한 족속의 文字처럼 어지럽다
지하 전시관에서 부식되는 황녀의 초상
흩어진 채색, 이제는 밑그림만 남았다
낯선 유적에서 마주치는 그녀와 나의 낡은 눈동자
저 자기병에 맺힌 유약은 수천년 전부터 글썽여온 울음이다
그녀도 엇갈리는 因緣 속에서 때론 그 실오라기를
애써 끊으며 살았을 것이다 붉게 힘준 잇바디
고리 끊어진 장신구는 한때 그녀의 저녁을 치장했다
가슴팍에서 사그락대던 벽옥 구슬들은
한순간 쉽게 끊어져 내렸다
멀리까지 굴러가는 구슬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녀
그러모아도 쥐어지지 않는 것들을
놓아버린 순간이 遺蹟의 저녁이다 불이 꺼진다
폐관을 알리는 안내 방송만이 어지럽고
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은 꺼져버린다
어둠 속에서 모든 금간 유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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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현연
1978년 경남 진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ㆍ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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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심사평] 시적묘사의 묘미 체득한 작품
시가 당대적 현실을 비켜가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는 유난히도 가족의 집단 자살이나 살해, 사체 유기 같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소재로 하는 시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시의 대부분은 산문적이거나 결론이 뻔한 풍자여서 왜 굳이 시란 장르를 택해서 그런 소재를 다뤄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20여 명의 작품을 선택한 다음, 다시 4명으로 좁혀 논의했다. 먼저 김륭의 ‘라면은 나쁘다’ 등 5편은 현실에 있을 법한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진행해 나가지만, 그 상황을 시적으로 변모시키는 노련한 솜씨가 돋보였다. 그러나 시인 자신이 나서서 설명하는 부분이나 과장하는 부분이 걸렸다.
백윤경의 ‘멜론은 그물을 치고’ 등 3편은 대상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대상, 혹은 하나의 세계가 숨기고 있는 비의를 천착했다. 시들을 읽고 나면 하나의 멜론이 무덤으로 확장되고, 아스팔트에 페인트로 그려진 사람의 형상이 시지프스처럼 일어서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이미지의 진행을 따라가는 재미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간혹 눈에 띄는 상투적 표현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신기섭의 ‘가족사진’ 등 6편의 시 세계는 모두 달랐다. 그렇지만 하나의 사건이나 정황을 묘사함으로써, 결국 죽음에 이르고야 마는 우리 삶의 진한 슬픔을 시 쓴 사람과 공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시 한 편, 한 편을 구축하는 솜씨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 편의 밀도 있는 완성작을 선택하기에는 미흡했다.
예현연의 ‘유적’ 등 7편은 시 쓴 사람 자신의 작은 경험 하나로부터 시작된 묘사를 치밀하게 진행하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묘사를 통해 일상의 경험에서 채집된 보잘 것 없는 시간과 공간이 조금씩 넓어지고,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시적 묘사의 묘미를 체득한 사람의 시였다.
같이 응모된 ‘내 창 밖, 고양이’도 재미있고 신선한 작품으로 논의됐다. 심사위원들은 응모된 7편의 작품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는 예현연의 작품을, 그 가운데서 시간의 겹침을 무리 없이 소화한 ‘유적’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쉽게 합의했다.
/심사위원=신경림 정호승 김혜순
< 작은 손 >
- 문신
1
정말로 한번 만져보고 싶게 작은 손이었다
2
싸락눈이 내리는 저녁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즐거웠다
누군가의 농담에 모두들 과장된 표정으로 웃어주었고
그것만이 우리의 저녁을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축축한 것들이
우리들의 배경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어떤 이는 전화를 하러 눈치껏 자리를 뜨고
그 옆자리의 친구는 화장실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빈자리의 쓸쓸함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문이 열릴 때마다 눈길을 돌리곤 했다
그때마다 낯선 얼굴을 만나고는 서둘러
쓰디쓴 눈물빛 술잔을 비웠다
갑자기 세상이 시큰둥하게 보이는 저녁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쌓아놓은 빈 병들을 보며
가끔씩 던지곤 하던 농담도 시들해져갈 무렵
창 밖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우리들은 다시 활기를 띠며 눈에 얽힌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낭만이든,
아니면 진부한 자유이든,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즐거웠으며
즐거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조바심 나는 저녁이었으므로
또 한 친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들은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더욱 단단하게 여미며
썩 괜찮은 농담을 찾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침몰하기 직전의 선장처럼 우리는
어떤 결정이라도 단호하게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창 밖의 함박눈은 우리들을 비껴서 내렸다
서너 걸음 앞에 놓인 영정 사진 한 장으로
우리들은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었으므로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빈 병들은 쓰러졌고 아직은
채워지지 않은 잔들이 우리들 앞에 남아 있었고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더 이상 우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날이었다
3
남자의 손을 보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은 작았다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처럼, 세상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제것으로 움켜쥘 수 없을 만큼 작은 손
그 작은 손위에 놓여진 동전 개수만큼 침침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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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1973년 전남 여천 출생.
1999년 전주대 국문과 졸업.
현재 완주군 소양 마음사랑병원 기획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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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심사평] 삶의 슬픔 담담히 묘사
예심을 통과한 응모자 19인의 작품들 가운데서 5분의 1이 본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나머지 작품들에 견주어 비슷하기보다는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제 나름의 개성을 풍기는 것은 모든 예술작품의 첫 걸음이다. 예컨대, 모대가리금풍뎅이 한 쌍과 가시돌거미 새끼들의 삶과 죽음을 빌려서 ‘애벌레 같은 아이를 안고 뛰어내린 어미’를 보여준 ‘잃어버린 길’(박여주), ‘탱탱한 가지 위에서/ 포슬포슬한 감자 위에서/ 아삭아삭한 오이 위에서/ 알싸한 쪽파 위에서/ 팔랑거리는’ 나비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린 ‘세 시의 나비’(이승주), ‘열 아홉 평 진달래 아파트 가판대’에서 ‘오천원에 세 장’씩 싸구려로 팔리는 ‘30수 면사 런닝셔츠’ 같은 ‘이력서’, 서양문물이 세계화의 이름으로 동양을 점령해버린 이 시대에 ‘아시아 갈대’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태평양을 건너가서 미국의 오대호 연안에 뿌리를 내렸다는 ‘여정기’(김미안) 등이 그러한 발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편의 시,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평가되기에는 모자라는 데가 있어서 아쉬웠다. 부분을 다루는 이들의 솜씨가 전체를 마무리하는 기량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당선작으로 뽑힌 ‘작은 손’(문신)은 오늘의 평범한 현실을 소재로 삼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과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을 오버랩시키면서, 죽은 친구의 영안실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인이 남기고 간 ‘빈자리의 쓸쓸함’, 조객들의 허황된 농담과 공허한 웃음, 피상적인 관습이 되어버린 조문과 속내에 감추어진 삶의 슬픔이 저녁에 내리는 싸락눈처럼 잔잔한 공감을 일으킨다. 아무런 내면적 교감도 없이 겉 모습만 스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에 숨겨진 우수를 평이한 일상어로 형상화했다. 억지로 만들어낸 은유적 표현이 적어서 친근하게 읽히고, 산문의 어조에 시적 정취를 담았다. 구체적 부분에 충실하면서도 전체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함께 투고한 ‘숲으로 가는 곰 인형’에서도 이 작품과 대등한 수준의 저력이 드러난다.
새 시인의 등단을 축하하며, 계속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유종호 문학평론가-김광규 시인
< 폐(廢)타이어 >
- 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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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현
1967년 경북 청도 출생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포항 세화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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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심사평] 문명의 피곤 어루만지는 힘 탁월
실체야 쉽게 달라지지 않겠으나, 시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기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다소간 달라지는 양상이다. 따라서 이번에 선자들이 주목한 점은 새로운 문제의식이었다.
당선작 ‘폐(廢)타이어’는 이러한 의식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다. 우리 현실의 핵심을 가로질러가는 속도의 문제에 대해서, 전통적 서정의 회복을 꿈꾸는 시적 자아는 문명의 구체성에 대한 관찰과 한편으로 그 피곤을 어루만지는 시의 힘, 그 부드러움을 탁월하게 대비시킨다.
시와의 더욱 치열한 싸움을 통해 새로운 세기의 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일에 앞장서 주기를 기대한다. ‘히말라야의 물고기’(김성신), ‘매직아이@’(민미숙) 등의 작품들도 당선을 겨룬 우수한 시들이었다.
시적 언어의 조탁은 당연히 중요한 일이지만, 오늘 우리에게 보다 절실한 것은 야만스러워져가는 시대의 중심을 꿰뚫어 바라보면서 시의 존엄을 새삼 이루어가려는 박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황동규·시인 / 김주연·문학평론가)
<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
- 김성규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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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1977년 충북 옥천 출생
2003년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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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심사평] 절제된 수사, 상상력 빛 더해
당선작을 골라내지 못했던 지난해의 부담 탓일까? 예심을 거친 스무 명의 작품을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선자(選者)들은 공연히 긴장되고 조바심이 났다. 작년에 비추어 올해의 응모 시편은 시적 진지함이나 다양성에서는 확연히 향상되어 있었다. 그러나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 탓인지, 작품의 개성이나 진정성을 드러내는 데서는 별다른 진전이 느껴지지 않았다. 산문 투의 엇비슷한 넋두리도 여전하였으며, 한두 편 돋보이는 응모 시만으로는 그 가능성 또한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이 주목한 시편은 최동일, 이상훈, 주예림, 정구영, 문신, 김성규 제씨의 작품들이었다.
최동일의 시에서는 삶의 풍경과 굴곡을 읽어내려는 투명한 시선이 살펴졌다. 그러나 ‘할머니를 바라보다’ 외에는 시야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상훈과 주예림의 경우는 소외된 삶의 애환을 능숙한 솜씨로 공들여 시화했다는 점에서 장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어딘지 모르게 낡았다는 인상을 갖게 하였다. 정구영의 응모 시들은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시어의 선택도 비교적 선이 굵고 선명하다. 그럼에도 직조된 시상이 다소 작위적이어서 시의 깊이나 높이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똑같은 지적은 문신의 응모 시에도 적용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응모자는 ‘우리들의 생활’과 같이 범상한 일상성을 따뜻하게 갈무리하는 작품도 함께 묶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결국 신춘의 지면을 장식하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김성규의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가 당선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지적된 단점들이 비교적 적게 살펴졌던 까닭이다. 암울한 세태를 바라보는 시선의 무거움을 수사적 절제로 감당해내려 한 그의 태도도 시적 상상력을 한결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작품들 간의 편차가 심하다는 것을 아울러 지적해 두어야겠다. 축하와 함께 분발을 당부한다.
유종호 문학평론가 / 김명인 시인·고려대 교수
< 가스통이 사는 동네 >
- 안성호
빈집의 풍경을 텔레비전이 우주로 송출한다. 텔레비전 위로 유리컵이 있고 그 속에서 감자가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나무가 되었다. 유리컵 속에서 감자는 죽고 감자만한 유리컵이 나무에 열렸다. 그 유리컵마다 바다가 출렁인다. 푸른 바다를 가르며 달력 속으로 노란 수상스키 한 대가 사라진다. 손을 흔들어대는 벌거벗은 남녀의 벗어 놓은 옷이 달력 곁, 행거에 걸려 있다. 여자의 빨간 치마를 남자의 양복 上衣가 껴안고 있다. 벗어 놓은 양말이 화장실로 걸어가고 화장실에 놓인 세탁기에선 양복 下衣가 길거리에서 묻혀온 노래를 쿨렁거린다 똑똑, 세일즈맨이 빈집에 노크를 하고 돌아선다. 똑똑, 물탱크에 물소리가 들린다. 수압은 낮고 지붕은 점점 무거워진다.
노란 물탱크와 가스통이
퇴락한 집 모퉁이를 돌아오는 빛을 베고 지붕에 누워 하늘을 본다.
오백 마리의 양
구백 마리의 흰 오리가
줄을 지어
하늘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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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당선작] 자신의 목소리 있는 작품 기대
본심에서 당선 가능한 작품으로 세 편의 시를 골라 놓고 우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두 심사자가 내민 작품들이 뜻밖에 서로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 작품 가운데 어느 시를 당선작으로 선뜻 내놓기에는 뭔가 머뭇거려지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민씨의 ‘생수를 사다’라는 시는 모든 응모자에게 공통된 현상으로 지적될 수 있을텐데 이미지의 과잉이나 어휘의 낭비로 인해 시가 딱 시로서 형성되어 있지 못하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고 여겨졌다. 이를테면 “어제 먹은 파리 바게트에 들어 있는 이스트가 주는 이분의 일 박자 부푼 템포가 레코드점의 철 지난 마돈나와 맞물리면서 갈비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구절처럼 내적 정합성을 갖지 못하는 이미지들의 자의적인 융합은 한낱 혼돈일 뿐이다. 요즘 시를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경향―쓸데없는 말들의 누적,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클리셰, 이어지지 않는 이미지들의 집적―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상상력에 작동하는 유질동상(類質同像)은 본디 ‘혼돈된 것’이지만 동시에 매우 ‘명석한 것’이라는 시의 초기 조건을 새삼 강조하고 싶어졌다.
신미나씨의 ‘호출’도 어느 정도 혼돈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이지만 너무 많이 동원된 은유나 생경한 환유가 시적 소통의 회로를 막아버린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는 이 모든 게 기실은 할말도 딱히 없는데 억지로 시를 쓰고자 하는, 혹은 시 쓴다는 착각을 즐기고 있는 허위의식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으며 이는 곧 향후 한국시의 불길한 경고음으로 들려왔다.
안성호씨의 ‘가스통이 사는 동네’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우리가 동의한 것은 이 작품이 앞서 말한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비교의 차원에서 안성호씨는 시를 형성할 줄 아는 능력과 선명한 환기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시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안성호씨가 자신의 목소리가 있는 시, 그래서 그것을 들으면 아, 안성호구나 금방 알 수 있는 그런 시를 들려주기를 기대한다. 동맥경화에 걸린 한국시를 벌떡 일어서게 할, 젊은 시의 쌩쌩한 육성을 듣고 싶다.
(김승희·황지우)
< 시월의 잠수함 >
- 김지훈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 어디쯤일까. 지닌 것 없이
숲만 가득 담아둔 나무 그늘에 앉아
기어이 가져온 새 책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작은 물줄기 속에서도 잘 돌아가는 스크루
사방 가득한 수억 燭의 소리가 큰 닻이 되어
산봉우리들이 신들의 전함으로 불리었던 그 바다 위에 박혀 있다
밤낮이 한꺼번에 몰아오는 내연기관의 큰 울림
그 안에는 칼 대신 나뭇잎 들고 싸우던 날도 있다
힘줄 선명한 잎 하나가 공기를 잘게 저미며 내려온다
신들은 어디에서 배를 만드는 중일까
베어낸 나무 밑동에 그려진 선명한 음파탐지기 자국
나는 녹슨 쇠를 털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뭇잎을 칼처럼 쥐고 싸우던 시절
앙상해진 주물기계들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바람이 떠미는 결이 물 속인 줄 알고
낙엽이 벗었다가 도로 신는 잠수화를 본다
아직도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신들의 칼을 나는 나뭇잎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배를 붙들며 한 자리에서 먼바다를 돌아오는 사계절
내 고함으로 한 방의 어뢰를 뭉쳐
사령관의 함교가 있는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갑판이 낙엽을 털 듯 몸을 털며 다시금 방향을 잡고 나아갈 때
수리공들이 큰배를 향해 떼지어 몰려가는 항로를 따라
푸른 위장을 한 잠수함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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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훈
1978년 울산 출생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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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심사평] 역동적 시어들 호방한 기운 넘쳐
지난 해와 비교해 볼 때 전체적인 응모작의 수준은 높은 것이 아니었다. 눈을 끄는 빼어난 작품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도 아쉬운 일이다. 물론 새로운 신인의 등장이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심사를 할 때는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신춘문예는 하나의 등용문(登龍門)이다. 용문을 오를 때에는 벼락이 치고 꼬리 그을린 큰 잉어가 용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걸출한 신인의 출현을 보고 싶다.
본심으로 넘어온 15명의 응모작 중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두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중에서 한 응모자의 작품이 중복 투고로 인해 결선에서 탈락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앞으로도 응모의 원칙은 엄격하게 지켜질 것이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김지훈의 ‘시월의 잠수함’은 스케일이 크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구름이 입술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으로 시작되는 이 시의 역동성은 현실과 상상, 내면과 외면, 하강과 상승 같은 쌍대(雙對)의 문법을 잘 활용하는 데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같은 시행에서 보듯이 호방한 기운도 느껴진다. 그러나 말의 느낌이 큰 시어들을 선택하고 장중한 이미지들을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계곡처럼 깊은 울림을 품은 한 편 시의 웅장함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은 듯했다. 남다른 정진으로 꾸준한 향상의 길을 가기를 바라면서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시인 황동규·최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