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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칼럼

任那日本府와 광개토대왕비

작성자지종학|작성시간13.09.11|조회수708 목록 댓글 0

任那日本府와 광개토대왕비

 

1. 광개토대왕비

 

 

                                                    (6.4m 7.41775글자)


광개토대왕비는
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이다. 이 비가 일본학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만주에 파견되었던 한 일본군장교가 1884년에 비의 탁본(拓本)을 일본에 갖고 들어가면서 부터였다.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5년간의 비문해독작업 끝에 발표하였는데, 비문에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왜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다가 고구려에 패한 기록이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이는 당시에 왜군이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른바 신묘년기사는 그 확고부동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 부분의 해석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어 아직도 종결되지 않은 상태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제와 신라는 오래전부터 (고구려) 속민이었으므로 계속 조공을 해왔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00新羅以爲臣民

(..................................................................)

以六年丙申, 王躬率, 討伐殘國.

영락6(396) 丙申(광개토)왕이 몸소 군을 이끌고 잔국(백제)를 토벌하였다.’

 

일본 측 해석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00新羅以爲臣民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본다면 왜의 한반도 남부지방에 대한 지배가 기정사실이 되며, 임나일본부설이 성립된다.

하지만 이는 다음 문장 광개토대왕이 396년 백제를 토벌하고 경자년(400)에는 임나가라에서 倭寇大潰(왜구를 크게 무너뜨린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임나일본부를 두어 200년간 지배했다는 것은 허구이며 논리적 모순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진희교수의 비문변조설(재일사학자, 201282)

 

                                                             이진희교수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00新羅以爲臣民

해석은 옳으나 일본군 참모부가 비문의 渡海破 등의 단어를 석회를 이용 변조하여 일본에 유리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그 지역의 날씨와 습기에 약한 석회의 특성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반론도 있다.

 

정인보 해석(1955)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00新羅以爲臣民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왜에 대한 구체적 대응이 없으며, 해석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중국학자 왕지엔췬 兩非論(1984)

비문변조설과 임나일본부설 모두를 부정하는데, 이는 임나일본부가 존재하지 않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한다.

 

서영수교수 해석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00新羅以爲臣民

왜가 신묘년에 넘어오니 왕이 격파하고 백제00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다른 글자에 비해 자가 좌측으로 많이 치우친 것으로 보아 삼수변을 덧붙여 로 변조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 김진명 해석(소설 몽유도원도 중에서)

앞 문장에서도 고구려라는 주어가 빠졌지만 해석에 무리가 없었듯이 다음 문장도 고구려란 주어가 있음을 고려해서 해석한다. 또 뒤 문장은 앞글의 구체적 서술이어야 문맥이 맞는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제와 신라는 오래전부터 고구려 속민으로 계속 조공을 해왔다.

而倭以辛卯年來 / 渡海破 /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내침하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를 격파하였다.

百殘00新羅 以爲臣民 /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으니, 영락6(396)丙申에 왕이 몸소 水軍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즉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권위에 도전한 백제 신라를 굴복시킨 것을 찬양하는 내용이 되어야 비문의 성격에 맞는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견해들은 모두 일리가 있으며, 또한 각자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문의 해석에 대한 논의는 계속 진행 중이다.

 

몽유도원도

 

1447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을 듣고 그린 것으로, 어느 시기에 일본으로 밀반출되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림에는 안평대군,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서거정, 김종서 등 당대 최고 학자들의 친필 찬문이 적혀 있다. 따라서 몽유도원도는 그림과 서예의 가치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매우 소중한 우리의 빼앗긴 문화유산이다. 이러한 뼈아픈 과거가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국력을 키워야 하는데, 풍수는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부분이 분명 있다.

 

2. 分國說

1963越北 사학자 김석형이 발표한 것으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학설이다.

 

 

 

당시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가야인이 일본 내에 자신들의 본국 이름을 딴 임나국을 세워 통치 지배하였다는 주장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을 입증하려면 일본에 임나라는 지명이 존재했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모호하다는 것이 논리의 한계이다.

 

 

3. 일본측 견해

마쓰마에 다케시

신공황후는 실존인물이 아니며, 삼국을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스즈키 야스다미(國學院대학 교수)

일본이라는 명칭은 7세기에 등장하므로 임나일본부는 존재할 수 없으며, 외교기관 倭府를 일본서기에서 가공한 것이다. 또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는 학자는 일본 내에서도 극소수일 뿐이다.

 

4. 맺음말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보아 임나일본부는 을 확보하기 위해 가야에 파견한 사신이거나 단순한 교역기관에 불과하며, 일본서기의 한반도 남부 200년 지배설은 과장이라는 주장이 한일 양국 간에 대두되고 있다. 또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200년 동안을 가 한반도 남부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추고 있었다면 그에 따른 유적과 유물 등이 있어야 하지만, 극히 드물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야마토(大和)정권의 묘제 前方後圓墳와 분포도

 

그러나 지금도 일본은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그들의 역사교과서에는 임나일본부가 正史로 교육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국내 학자들은 가야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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