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정암 가는 길
설악산 봉정암(1244m)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신라 선덕여왕 때(644)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구한 부처님 진신사리(뇌사리)를 어디에 모실 것인지 전국을 순례하던 중 자장율사 앞에 성스런 봉황이 나타난다. 봉황을 몇날며칠을 따라가니 높이 솟은 바위 곁에서 머물다 사라졌다. 괴이하게 여긴 자장율사가 지형을 자세히 살피니 바위가 부처님 이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달리 보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에 자장율사는 부처님 이마에 해당하는 바위에 오층석탑을 세우고 부처님 뇌사리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인근에 암자를 세우니 곧 봉정암이다.
5대 적멸보궁은 설악산 봉정암,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영월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이다. 그 중에서도 봉정암은 지대가 가장 높은 곳일 뿐 아니라 불자들에게 영험한 기도처로 소문난 곳이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백 명이 방문한다. 주말에는 대청봉에 오르려는 등산객까지 몰려 천명 넘는 사람이 모여든다. 봉정암에서는 이들 모두에게 삼시 세끼에 미역국과 밥을 제공하고 숙박까지 베푼다. 물론 늘 방이 부족하기 때문에 비좁은 방에서의 쪽잠은 감내해야 한다.
봉정암에 도달하는 길은 크게 2가지 코스가 있다. 외설악 신흥사에 출발하여 대청봉에 오른 뒤 소청봉을 거쳐 내려오는 코스, 내설악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오르는 코스가 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 가는 길은 다시 2개의 코스가 있다. 영시암에서 쌍룡폭포와 해탈고개를 오르는 코스와 영시암에서 오세암을 거치는 산길이다. 백담사부터 봉정암까지는 보통 5시간 내외가 소요된다. 산행을 잘하는 사람은 4시간에 도달하지만, 산행이 서툰 사람은 6시간 정도 걸린다. 설악산의 밤은 빠르게 시작되기 때문에 평상시 시간개념은 금물이다.
▣ 1코스(백담사-영시암-해탈고개-봉정암)
백담사부터 영시암까지는 동네 뒷산 나온 듯 완만한 산행이다. 백담천변에는 맑은 물이 흐르며 수많은 기도탑이 세워져 있어 지루함을 모르고 오를 수 있다. 가끔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여유롭게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영시암에 도착하면 작약꽃 마당 아래 시원한 쉼터가 있어 물 한 모금 마시며 본격적인 산행을 준비한다. 그리고 곧 이어서 갈림길이 나온다. 하나는 쌍룡폭포길(7.1km)이고 다른 하나는 오세암길(6.5km)이다. 두 길의 거리는 큰 차이 없지만 오히려 먼 길인 쌍룡폭포길을 오르는 사람이 10명 중 9명이다.
영시암에서 쌍룡폭포까지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면서 산의 고저가 심해진다. 하지만 힘든 만큼 산의 비경도 자주 볼 수 있다. 바위를 타고 내리는 계곡물은 푸르디 푸른 소를 만들고, 기암절벽과 계곡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는 청량한 설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해탈고개를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봉정암까지는 500m에 불과하지만,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이기 때문에 네발로 기어오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봉정암에 도달하기 위해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코스로 해탈고개를 지나면 피안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마지막 힘을 재촉하는 곳이다.
이윽고 봉정암에 도달하면 진신사리탑을 가장 먼저 오른다. 부처님의 영험한 기운을 받기 위함인데, 그곳에서는 봉정암 뿐 아니라 공룡능선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이제까지의 시름은 눈녹듯 사라지게 된다. 이 기분 때문에 봉정암을 오른다는 말이 누구 할 것 없이 절로 나온다. 여기까지의 코스를 보면 서서히 시작하여 단계별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교향곡 같은 산행이다.
▣ 2코스(백담사-영시암-오세암-봉정암)
1코스에 비해 600m 짧은 거리다. 산행에 익숙한 사람들은 갈림길 안내판에 표시된 난이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서툰 등산객은 짧은 코스를 선택하다가 호된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영시암에서 오세암까지는 2.5km에 불과하지만 크고 작은 고개를 넘으면서 산행하는 사람의 의지를 시험하는 듯하다.
“이제 시작인데, 갈 수 있겠니?”
그리고 힘들게 오세암에 도달하면 범상치 않은 기운에 압도당한다.
이곳 역시 자장율사가 봉정암과 같은 시기에 관음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곳이다. 오세암(五歲庵)이라는 이름은 조선중기 설정대사의 조카에서 비롯된다. 설정대사는 형님이 죽고 남겨진 5살 조카를 돌보고 있었다. 어느 초겨울 대사가 양식을 준비하러 양양 장터로 떠날 때 며칠분의 밥을 지어 놓고 가면서 어린 조카에게는 법당 안의 관음보살님이 도와줄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때마침 폭설이 내려 다음해 3월이 되어서야 설정대사는 암자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어린 조카에 대한 죄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하지만 슬픔과 달리 법당안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난겨울 눈 속에 홀로 남겨져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은 줄 알았던 조카가 의젓하게 목탁을 치며 관세음보살을 낭송하고 있는 것이다. 5살 조카가 말하기를 “저기 계신 관세음보살님께서 밥을 주시고 함께 긴 겨울을 놀아주셨어요.”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이곳은 오세암으로 불리게 되었다. 법당에는 오세동자가 성불한 곳이라는 글귀가 있다.
오세암 뒤편에는 뾰족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관음봉이 있고, 우측에는 만경대, 좌측에는 장군봉이 있으며, 앞쪽으론 멀리 설악의 군봉을 바라보면서 남향으로 자리하였다. 주변 산이 온통 강렬한 기운을 품고 있어서 설악산 내에서도 최고의 기도도량으로 불린다. 그러한 기운 때문이지 매월당 김시습, 보우선사, 만해 한용운 등이 머물던 곳이다.
현재 오세암에서 수도하는 스님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기도한 후 관세음보살의 영험한 기운을 얻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오세암에서도 모든 방문객에게 친절하게 숙식을 제공하지만, 방문객이 공양시간을 맞춰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세암 공양간 옆에서 설악산의 청정한 계곡물을 마신 뒤 산행을 시작하면 또 다시 수많은 고개를 오르내리는 것이 반복된다. 저 힘든 고개를 넘으면 곧 다다를 것이란 생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처음 오세암까지가 시험구간이었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한다. 앞에서 말한 1코스 같으면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쉴 수도 있지만, 이곳 계곡은 물조차 거의 흐르지 않는다. 산행길도 투박한 돌에 발뿌리를 채이기 일쑤고 의지할 것 없는 좁은 산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지독한 정적 속에 들리는 것은 바람소리 뿐이고 수백년 고목이 쓰러진 모습에서는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적인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거의 탈진하여 포기할 무렵 이제는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1.6km에 달하는 마의 구간이다. 1코스에서의 해탈고개는 500m였지만, 2코스 깔딱고개는 그보다 3배가 넘는다. 깔딱고개라는 단어처럼 숨이 곧 넘어갈 정도로 가파르고 위험하다. 깔딱고개라는 어감에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왜 이 길을 선택했는지 후회에 후회, 또 후회가 밀려든다.
그 순간 나는 그곳을 오르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절박함과 비장함을 보았다. 이 어려운 코스를 선택한 사람은 거의 대부분 중노년 나이의 지긋한 여인들이다. 젊은 사람과 남자들은 10명에 하나뿐이다. 무엇 때문에 이 고통을 자처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사연 없는 사람 누가 있으랴.
힘든 산행 탓에 말 한마디 없이 암벽을 기어오르는 모습에서 어머니의 간절함을 보았다. 자식과 가족을 위해 오체투지를 하듯 자신의 몸을 학대함으로서 악업을 씻고 가족의 무사안녕을 바라는 심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을 보자 참새 마냥 투덜대며 오른 나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저 어머니들은 마지막 깔딱고개를 최후의 심판을 대하듯 수직등벽의 밧줄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데, 내 한 몸 바쳐 무언가를 갈구하는 위대한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포기하지”하는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며 이를 악물고 오르는 순간 불현 듯, 그야말로 불현듯 부처님 진신사리탑이 발아래 펼쳐져 보인다.
수많은 시험과 고난을 헤쳐 나오자 비로소 해탈의 순간이며, 피안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비록 순간의 해탈이며 피안이라 할지라도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의 극치를 실감하게 된다. 순간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듯 형용할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1코스 해탈고개로 오르는 길을 선택한 사람은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기분이다. 부처님의 시험을 통과했으니 나의 바램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은 덤이다.
이 길을 오를 때는 여러 사람보다는 두셋이 좋다. 여럿이 오르면 산만하기 때문에 숲길이 주는 교훈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혼자 오르기에는 너무 험난한 여정이다. 오세암에서 봉정암 오르는 길은 처연한 구도자의 길이며 득도의 길이다.
두 코스를 비교해 보았다.
1코스는 명랑한 물소리가 들리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마치 쉬다 가라고 유혹하는 여인네 같다.
2코스는 물도 없고 바람도 없다. 오로지 적막한 고요만 있을 뿐이니 묵언 수행자의 모습이다.
1코스는 연인과 함께 걷는 여유로운 힐링 길이라면 2코스는 고독한 구도자의 길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건 당신의 몫이다.
그러나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원한다면 오세암길을 오르시라.
영시암부터 오세암까지 6.5km는 자신을 한 없이 낮추면서 겸손을 배우게 된다. 수백 년 고목의 원시림을 지나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배우게 된다면 그것이 곧 도를 깨우친 것이 아닐 것인가.
봉정암 가는 길은 오세암을 거쳐 오르고 내려올 때는 쌍룡폭포 길이 좋다. 절박한 구도자의 심정으로 득도한 후에 인간세계로 내려와 희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