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릉의 悲哀
백제의 의자왕은 의롭고 자비롭다는 의미이다. 성씨는 부여(扶餘)이고 이름은 의자(義慈)이니 합쳐서 부여의자(扶餘義慈)가 백제 31대 왕의 이름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서 시호를 줄 후대 왕이 없기 때문에 본명을 따서 부르는 것이다. 의자왕은 태자시절에는 해동증자라 불리었고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받고는 집권초기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영토를 넓게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 성충 등의 간언을 물리치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면서 국력이 피폐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의자왕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전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
당시 의자왕은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황산벌 전투에서 패하자 수비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들어가 당나라의 식량보급을 끊으면서 장기전을 계획했던 것으로 사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그러나 의자왕의 장기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데, 그 이유는 백제의 좌평이며 웅진성 최고책임자였던 예식이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당나라 역사를 적은 구당서 소정방열전에는 웅진성에서 대치 중 “장군 예식(禰植)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예식은 당나라에서 대장군 벼슬을 지내다 58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로 인해 예식은 이민족으로는 당나라에 최고의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사실은 예식의 묘비가 발견되면서 밝혀진 사실이다.(당나라 묘비에는 예식진으로 되어 있으나 예식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근거는 백제 웅진 사람이 당나라에서 '좌위위대장군'에 올랐다고 적혀있기 때문인데, 전후 사정과 일치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웅진의 수성대장이 왕을 잡아 항복하려하니 의자왕이 동맥을 끊고 자결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포로가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결국 의자왕은 믿었던 신하의 배신으로 망국의 왕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의자왕과 태자 융은 660년 9월 나당연합군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소정방의 포로가 되어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가는데, 이때 장수와 백성 등 1만 3천명이 함께 포로로 잡혀간다. 의자왕은 도착한 직후인 11월, 망국의 회한 속에 머나먼 이국 땅에서 60대 중반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그리고 함께 끌려간 망국의 신민들에 의해 북망산에 묻히게 된다.
의자왕은 서거 후 1,300년이 지나서야 백제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여군에서는 중국 낙양시와 함께 1995년부터 북망산에 묻힌 의자왕의 무덤을 찾아 유해를 수습해 오고자 했다. 그러나 북망산 일대가 오랜 세월동안 도굴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흙을 퍼와 2000년 이곳에 가묘를 세운 것이다.
그 후 부여군의 꾸준한 추적 끝에 2017년 의자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낙양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이 또한 실체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백제의 후손들이 의자왕릉을 머나먼 이국땅에서 이곳으로 이장했을 때는 의자왕의 공과를 따지기 이전에 넋을 위로하고자 함일 것이다. 그 뜻은 숭고하지만 의자왕릉을 보면서 화가 치미는 것은 어인 일인가.
의자왕릉을 이곳에 조성할 때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누군가의 풍수조언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대해 필자는 주산이 어떻고 용맥의 상태가 어떻고 등등 전문적이고 미시적인 부분을 시시콜콜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능 앞쪽 지하에 능산리고분군전시관을 조성한 것은 어떠한 연유인지 모를 일이다. 이와 같은 전시관을 하필이면 의자왕릉 용맥을 훼손하면서 조성할 필요가 있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같으면 왕릉 10리 이내에는 나무도 함부로 벨 수 없을 정도로 엄격했다는 것을 새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망국의 왕이기 때문에 고국 땅에 와서도 설움을 받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하 능산리고분 전시관
그 뿐 아니라 의자왕의 능침은 이웃한 선왕들의 능침에 비해 지나치게 초라한 규모다. 신하인 계백장군 묘도 성역화 해서 향화가 그치지 않건만 이곳은 평범한 일반인 묘로 착각할 정도다. 비록 낙양의 흙만을 옮겨와 조성한 것이지만, 이는 초혼장의 성격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묘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최소한 인근의 선왕릉에 준하는 규모와 품격을 갖추었어야 한다. 그것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처연하게 죽음을 맞은 의자왕과 태자 륭의 넋을 위로하는 길일 것이다.
계백장군 묘
의자왕릉 참도는 중앙에 신도가 있고 좌우에 어도가 있는 3道 형식인데, 이러한 구조는 백제왕릉 형식이 아니다. 고증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의자왕에 대한 예우인지 모르지만, 백제왕릉인지, 조선왕릉인지, 아니면 당나라 형식인지 모를 국적불명이 되고 말았다. 판석의 재질 또한 매끈하게 가공한 석재를 사용함으로서 비가 오면 미끄런 상태가 되어 자칫 사고의 위험도 따른다.
조선왕릉 어도는 투박한 돌을 깔아 발걸음조차 엄숙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꾸밈보다는 가식없는 모습으로 조성하는 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의 단면일 것이다.
의자왕을 1300년 만에 부여로 모셔와 왕릉을 조성한 것은 백제의 후예로서 지극히 당연한바이지만, 스스로가 의자왕을 홀대하면서 자국의 역사를 폄훼하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백제의 새로운 부흥을 위해 백제의 자존심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자왕릉부터 격식에 맞게 조성해야 한다.
이에 필자는 부여군민들이 앞장서 “의자왕릉 바르게 세우기 운동”을 펼칠 것을 제안한다. 예산이 부족하다면 모금을 해서라도 부여군민 뿐 아니라 온 백제의 후예가 힘을 합쳐야 한다.
의자왕릉 조성 사적기
700년의 유구한 백제 종묘사직이 무너지고 백제 의자왕과 태자융, 그리고 문무백관을 비롯 백성 12.895명이 당나라에 끌려간 치욕적 사실을 어찌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영어의 몸으로 이역만리 당나라 북망산에 깊이 묻히셨으니 그 누가 유택을 찾아 향화를 올렸으리요.
그로부터 백제의 후예들이 백제 의자왕墓 찾기 사업을 펴 1995년 2월에 현지조사를 통하여 중국 하남성 낙양시 맹진현 봉황대촌 부근에서 의자왕 묘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1996년 8월 부여군과 당나라 수도였던 낙양시 兩 도시간에 문화교류사업을 위한 자매결연을 맺고 1999년 4월 부여융 묘지석 복제품을 기증받았습니다.
2000년 4월에 낙양시 북망산에서 의자왕 靈土 返魂祭를 올리고 靈土를 모시고 부여 고란사에 봉안하였다가 同年 9월 30일에 이곳 부여 능산리 先王의 능원에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의자왕 및 부여융의 영혼을 위로하고 깊이 추념코자 단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의자왕과 부여융을 上.下로 모셔 의자왕의 단에는 주실과 전실로 구성된 석실을 마련하고 목관에 영토를 봉안했으며 의자왕의 출신과 품성. 생애 등을 기록한 지석. 설단의 의의와 장지 구입을 기록한 매지권을 매납하여 후세에 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부여융의 단은 의자왕을 따랐으며 내부에 낙양시에서 기증받은 묘지석 복각품을 매설하였습니다.
우리들 백제 후예의 간절한 소망과 정성을 모아 의자왕이 서거하신지 1340 여년 만에 소부리땅 선왕의 능원에 모셔 영혼을 천추만세까지 추모하고자 합니다.
2000년 9월 30일 부여군수 유병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