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에는 회암사지가 있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때 인 1300년 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인도의 고승 지공선사가 머물면서 이름을 떨쳤고 고려 말 나옹화상이 중창하면서 전국 사찰의 총 본산이 된다. 이성계의 왕사가 된 무학대사 또한 회암사에 머물면서 조선왕실을 도왔으며, 이성계도 왕위를 물려주고는 이곳에 거처하기도 했다. 이렇듯 당시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
그러다 명종(1534-1567) 때 유생들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왕실의 비호가 끝나자 숭유억불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회암사지에서 아쉬운 점은 정전이 있는 곳에서 천보산이 살짝 넘겨다보는 규봉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규봉은 도적봉으로 불리는데, 터의 기운을 빼앗아 가고 구설수가 많다 해서 풍수에서 크게 흉하게 여긴다. 회암사지 정전이 좀 더 뒤편으로 가던가 아니면 앞쪽으로 나오면 규봉이 되지 않는데, 중요한 건물에서는 규봉이 보이지 않게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회암사지 맨 위쪽에는 높이가 6m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부도가 있다. 탑의 크기와 형식을 보면 어느 고승의 부도 탑으로 짐작되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학계에서는 세조 때 효령대군의 불교 중흥 책에 힘입어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정교한 무늬와 조형미는 국보급이지만, 임자를 알 수 없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부도가 위치한 곳은 계곡 옆이다. 그곳은 비가 오면 급류가 쏟아지기 때문에 전각을 보호하는 비보의 목적으로 그 지점에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1828년 새로 지은 회암사와 지공, 나옹, 무학의 부도 탑이 있다. 무학대사는 1405년 금강산 진불암에서 입적하니 78세였다. 대사는 입적하기 전인 70세 때(1397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회암사 뒤쪽 능선 지공선사 부도 아래 자신의 부도를 만들어 둔다. 아마도 이때 나옹화상 부도를 같이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세 고승 중 지공선사 부도가 가장 먼저 자리한 것이다. 지공선사는 1361년 중국에서 입적했으며, 그 후 공민왕의 명으로 유골을 고려에 가져와 1372년 회암사에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지공(1300~1361), 나옹(1320~1376), 무학(1327~1405)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부분의 부도가 자신이 수행하던 사찰의 한편 평지에 집단으로 있으나 이곳은 산 능선에 자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용맥을 탔다는 점에서 다른 부도와 차별화된다.
산줄기 용맥은 임산부의 탯줄과 같고 인체의 혈관 같은 역할로 주산의 기운을 전달해주는 통로와 같은 것이다. 혈관이 튼튼해야 혈류의 순환이 원활해 건강하듯이 용맥의 상태가 좋아야 기맥의 공급이 순조로워 명당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곳과 비슷한 곳이 신륵사에 있는 나옹선사의 또 다른 부도 탑이다. 그곳 역시 능선 위에 자리하면서 안정적인 포스를 보이고 있다. 풍수에 조예가 깊었던 두 스님은 용맥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보산(423m)에서 이어진 산줄기는 크게 S자 형태를 반복하면서 부도 탑까지 이어진다. 이를 굴곡변화라 하는데, 천보산의 거친 기운이 점차 순화되는 과정이다. 이를 풍수용어로 탈살 또는 박환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천보산 줄기에는 험한 바위가 많았으나 부도 탑에 이르면 고운 흙으로 바뀌는 것이다.
부도는 위에서부터 나옹, 지공, 무학 순으로 배치되었다. 나이순으로 하면 지공선사가 가장 연장자지만, 맨 위에는 나옹화상 부도가 자리했다. 고려 말 공민왕에 의해 지공선사 부도가 가장 먼저 자리했기 때문이다.
맨 위에 있는 나옹화상 부도는 언덕 위에 자리해 당당한 편이고 조망도 뛰어나다. 다만 산줄기가 아래로 이어지면서 기운을 뭉치지 못했으니 진혈을 이루지는 못했다.
지공선사 부도는 고갯마루 지점으로 기운이 쇠잔한 곳으로 자칫 바람을 맞기 쉬운 곳이다. 그래서 그곳 지형은 오목하여 야윈 상태다.
무학대사 부도는 가장 아래 있는데, 천보산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차분히 멈추면서 기운이 뭉친 곳이다. 그런 까닭에 능선 전체에서 가장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기운이 뭉친 곳은 호박 줄기에 호박이 맺힌 것 같은 모습을 하는데, 이곳이 그러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의 무학대사 부도보다 약간 아래 지점이 10점 만점의 정중앙이 된다. 그 이유는 참된 혈은 한 평 남짓한 당판 중에도 좌우로 가장 넓은 지점이 노른자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무학대사 부도 아래 축대 부분이 파워스폿이 된다. 그 지점은 토색이 밝을 뿐 아니라 겨울에도 눈이 일찍 녹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 부도 탑을 답사하는 사람들은 그 지점에 앉아 땅 기운을 오롯이 받으면 된다.
이쯤에서 좌우를 살펴보면 좌청룡 우백호가 잘 둘러주었는데, 특히 우백호가 가까이서 감싸주었다. 그로 인해 바람이 치지 않는 아늑한 터가 되었고 좌향도 남향이어서 따뜻한 것이다.
한편 이곳의 부도는 예로부터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기 때문에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순조 21년(1821) 이응준이라는 유생이 이곳에 있는 부도 탑을 모두 없애고 지공선사 부도가 있는 곳에 자신의 선친 묘를 쓰는 일이 벌어진다. 그 장소가 크게 길하다는 지관 조대진의 말을 듣고 명당을 탐내서 무모한 짓을 했던 것이다. 당시 이응준은 세 개의 부도를 없애고 안에 있던 사리함까지 도적질했다고 한다.
이 소식은 조정까지 알려져 영의정은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순조임금 역시 크게 분노한다.
순조 21년 7월 27일(1821년)
이 일은 변괴 중에서도 가장 큰 변괴다. 이 비문이 매우 소중한 것인데도 부수었으니 그의 안중에는 나라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이응준은 엄형을 가한 다음 외딴섬에 유배하라.
지사(地師)란 자도 엄벌에 처하여 섬에 유배하고 절대 사면하지 못하도록 하라. 파괴된 비석은 건국 초기에 만든 것인데 오늘에 와서 보존하지 못했으니, 매우 송구스럽다. 경기 감영에 분부하여 다시 세우도록 하라.
그리고 지방의 관리가 몰라도 잘못인데 알고도 금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어떠하겠는가?
그 지방관을 의금부로 잡아들여 심문토록 하라.
그 후 1828년 순조는 부도를 다시 복원하고 부도 탑 옆에 회암사를 새로 짓는다.
한편 이응준은 대길하다는 지관의 말을 믿고 지공선사 부도가 있는 곳에 선친 묘를 쓰지만, 결과적으로 장형을 맞고 유배를 갔으니 대길이 아니라 대패하고 말았다. 위에서 말했듯이 지공선사 부도는 고갯마루 지점으로 기운이 없는 곳이고 바람을 맞아 풍파가 많은 곳이라 했다.
이응준은 어리석은 지관의 말을 믿고 남의 묘를 파헤치는 패륜을 저지른 것이다.
옛말에 선을 쌓은 집에는 경사가 있을 것이고, 선을 베풀지 못한 집은 반드시 재앙이 있다고 하였다.
(積善之家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殃)
또 도덕적으로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명당을 하늘에서 주지도 않고 땅에서 받아주지도 않는다고 했다.(天不貽 地不受)
당시 돌팔이 지관의 수준과 이응준의 그릇된 탐욕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나옹선사가 지은 청산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내려놓고 미움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https://youtu.be/e6Janj7Nnm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