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기 탄금대 전투는 신립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8천명과 왜군 고니시가 이끄는 1만 8천명이 격돌한 대규모 야전 전투였다.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군하자 조정에서는 북방에서 이름을 떨치던 신립장군을 보내 저지하려고 하였다. 당시 신립장군은 북방의 여진족들에게는 두려움의 맹장이었다.
선조는 신립에게 조선 최고의 명검이자 임금의 권한을 상징하는 보검을 하사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충주에 도착한 신립장군에게 부장 중 한 사람인 김여물은 수가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과 싸우려면 지형이 험한 조령을 지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조선군은 말을 타는 기병이 주력이니 좁은 계곡에서는 불리하므로 넓은 평야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하며 김여물의 조언을 듣지 않는다. 실제로 신립은 기병술에 뛰어난 장수였다. 그러자 상주에서 왜군과 싸운바 있는 경상도순변사 이일(李鎰)은 왜적의 기세가 북방의 여진족과는 다르기 때문에 넓은 들판에서 교전하면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재차 말하지만 이마저도 묵살되고 만다.
그즈음 신립장군은 척후병을 보내 왜군의 진영을 탐색했는데, 군관이 보고하기를 왜군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신립은 군관이 허위보고를 했다는 죄명으로 군관의 목을 베어버린다. 적군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부하들을 신임하지 못하는 치명적 실수를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무공을 과신했던 것이다.
신립의 조선군이 왜군과 최초로 교전한 곳은 탄금대 남쪽 달천평야였다. 달천과 충주천 사이에 있는 들판이었으나 논이 많은 습지인 탓에 기병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더욱이 전투가 벌어진 날은 비까지 와서 질척한 상태였다고 한다. 기병이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왜군이 좌우에서 협공하자 조선군은 탄금대로 후퇴하여 배수진을 치게 된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회복하지 못해 김여물은 전사하고 신립장군은 고군분투하다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만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 8천명이 궤멸했으며, 그로 인해 조선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후일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립의 전술적 실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왜적은 조령에 우리 병사들이 매복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척후병을 보내 여러 차례에 걸쳐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곳을 지키고 있는 우리 군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쾌재를 부르며 통과했다고 한다.
훗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령을 지나가다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천혜의 요새를 두고도 지킬 줄 몰랐다니, 신립은 진실로 부족한 인물이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본래 신립은 용감한 장수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옛말에 장수가 군사를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만 후손들에게 경계가 될 듯싶어 자세하게 기록해 둔다.”
조령은 새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으며, 현재는 문경새재라 불린다.
탄금대 지형은 달천과 남한강이 합수되어 6km 직수로 빠져나가는 곳이다. 풍수에서 가장 흉하게 여기는 직거수(直去水)인데, 풍수에서 말하기를 터 앞으로 물이 곧게 달아나면 천만금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흩어진다고 하였다. 또, 터를 정할 때 가장 꺼리는 것이 물이 나가는 땅이니 즉시 집안이 망할 것이라 하였다.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직거수는 보통 500m 이상 되면 흉한 일이 많기 때문에 터를 정할 때는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립장군의 패전이 지형 탓이라 할 수는 없지만, 풍수적으로 흉한 것은 틀림이 없다.
강변에 자리한 탄금대는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기 때문에 우륵처럼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유흥을 즐기는 정자 터로는 적합한 곳이다. 하지만 강바람이 세기 때문에 장기간 머무는 것은 삼가야 한다. 옛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정자만 지었던 것이니 땅의 용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군대에는 풍수지리 전문가가 참모로 참전하여 군대의 병영과 진지 등을 정해주었으며, 실제 전투에도 조언했다고 한다. 명나라 군대에는 두사충, 시문용, 이문통, 섭정국 등 여러 풍수사가 있었는데, 높은 지위의 장수들은 모두 풍수사를 대동했었다. 그들 중 두사충과 시문용은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의 풍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결론적으로 군 지휘관도 풍수를 알아야 한다. 특히 군대의 특성상 깊은 산속에 부대가 위치하는 경우 부대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바람과 물길 등의 위험이 없는 곳을 정하는 것이 지휘관의 책임 중 하나이다.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풍수전문가를 활용하여 부대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