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 74세) 능이다.
야사에 의하면 이곳은 무학대사가 정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숙종실록, 숙종 9년 3월 25일
태조대왕께서 신승인 무학대사와 더불어 친히 壽藏(살아 있을 때 미리 만드는 무덤)을 가려잡으니 곧 건원릉이 이것이다. 태조께서는 무학대사가 정해준 산에는 후손들이 장사지낼 곳이 무려 20곳에 이르니, 내가 이로부터 근심을 잊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의 서쪽 한 가닥 봉우리를 망우리(忘憂里)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성계는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고향 땅 함흥에 묻히기를 원했다. 함흥에는 부친 이자춘 등 선대 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종은 함흥은 한양에서 거리가 멀어 관리가 어렵기 때문에 궁궐에서 가까운 곳에 능을 쓰고자 한다. 그리하여 영의정 하륜에게 능역을 찾는 것을 지시한다.
태종8년(1408) 6월 28일
“산릉을 양주의 검암(儉巖)에 정했다. 처음에 영의정부사 하륜 등이 유한우·이양달·이양 등을 거느리고 양주의 능자리를 보는데, 검교참찬 의정부사 김인귀가 하륜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는 검암에 길지가 있다’하였다. 하륜 등이 가서 보니 과연 좋았다. 그리하여 능역의 공사를 시작하였다.”
하륜은 도읍을 신도안으로 옮기는 공사를 할 때 경기도관찰사 신분으로 상소를 올려 신도안 터가 풍수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하면서 신도안 천도를 무산시킨다. 그리고 한양에서는 북악산 아래보다는 모악산 밑 지금의 연세대학교 터를 궁궐터로 주장하기도 했다.
태종은 부친의 유언을 따르지는 못했지만,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와 능을 만들어 고향의 정취를 대신했다.
그런 관계로 건원릉 봉분에는 억새풀이 무성한 것이다.
이성계는 젊어서부터 풍수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풍수매니어라고 할 수 있다. 야사에 의하면 이성계 부친의 상을 치를 때 명당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옹선사를 만나 왕이 될 자리를 얻어 그곳에 장사를 치루었다고 한다. 이때가 이성계 나이 25세였고, 32년 후에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르니 나옹선사 예언대로 되었다. 그곳이 함흥에 있는 정릉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도읍을 개경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했다. 이때 권중화가 계룡산 아래가 길지임을 추천하니 풍수인 이양달, 무학대사 등을 대동해 지세를 살핀다. 또 북악산 아래 터를 정할 때는 풍수인 윤신달과 무학대사의 의견을 듣고 도읍으로 결정한다.
이렇듯 이성계는 풍수에 심취했는데, 권력자에게 풍수는 정권을 연장하는 수단이었으며, 때로는 민심을 휘어잡는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건원릉은 일반인 뿐 아니라 풍수인들 사이에서도 대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불세출의 영웅 이성계와 무학대사, 하륜까지 더해지면서 등장 인물의 스펙이 화려하기 때문이다.
특히 풍수인들에게 건원릉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 영역인데, 누군가 건원릉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면 감히 건원릉을 모욕했다고 벌떼같이 공격할 정도다.
건원릉을 처음 접하면 높다란 구릉에 앉은 위풍당당한 모습에 누구라도 압도당하게 된다. 실제로 중국사신 기보(祁保)가 회암사에서 돌아오다 건원릉을 보고는 "어찌 이와 같은 천연적인 땅이 있는가? 반드시 인위적으로 만든 산일 것이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능에 오르면 좌우의 산들이 도열한 광경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과연 한 나라를 세운 제왕이 묻힐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앞서다 보면 누구라도 명당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웅장하고 화려한 이곳을 장군대좌(將軍大坐), 일원상포(日月相抱), 맹호출림(猛虎出林), 갈룡음수(渴龍飮水), 비룡승천(飛龍昇天)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풍수에서는 그 터가 명당인지 아닌지는 지리적 조건을 살피면 되지만, 좀 더 확실한 것은 후손들의 삶을 보면 된다. 명당이라면 화목하고 편안하며, 안정적일 것이고 명당이 아니라면 사건 사고가 많고 우여곡절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원릉 이후의 조선왕실을 조사하면 명당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제왕이라도 풍수의 동기감응은 비켜 가지 않기 때문이다.
동기감응은 대체로 묘를 쓴 이후 태어난 사람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대체로 아들, 손자, 증손, 고손까지인데, 유교에서 기제사를 고조까지 지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이상이 되면 조상과의 유전인자가 약해지기 때문에 동기감응의 영향도 미미하다고 본다.
물론 혈의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00년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408년 건원릉을 쓰고 10년 후 느닷없이 이성계의 장손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된다. 당시 이일은 엄청난 정치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왕실 불행의 서곡에 불과할 따름이다.
▶세종의 장자 문종(1414~1452) : 즉위 2년 만에 39세로 서거
▶수양대군, 세조(1417~1468) : 계유정란으로 조카의 왕위를 찬탈
▶안평대군(1418~1453) : 36세 때 계유정란으로 친형 수양대군에게 사사
▶임영대군(1419~1469) : 51세 卒, 대군들 중 가장 평탄한 삶
▶광평대군(1425~1444) : 20세 요절
▶금성대군(1426~1457) : 32세에 친형 수양대군에게 반역죄로 처형
▶평원대군(1427~1445) : 19세 요절
▶영응대군(1434~1467) : 34세 요절
▶문종의 장자 단종(1441~1457) : 17세에 삼촌 수양대군에게 죽음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1438~1457) : 20세에 요절
▶세조의 차자 예종(1450~1469) : 20세에 요절
▶예종의 장자 인성대군 : 幼年에 요절
이성계의 손자 세종은 조선의 임금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군주로 추앙받지만, 그 자식들은 피를 나눈 형제간에 권력 다툼으로 죽고 죽이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특히 장손들이 요절하는 일이 많았다.
건원릉 이후 약 70년간 벌어진 일인데, 과연 이것을 명당의 응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건원릉의 지리적 문제점을 몇가지 지적해 보겠다.
첫째, 능 뒤편에는 작은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을 입수라 하는데, 기맥을 저장하는 창고의 역할이다. 건원릉은 고갯마루에서 치고 올라와 봉우리를 만들었다. 이때 봉우리 정점에서 좌우로 날개를 펼치듯 가지를 뻗어주어야 하는데, 정상적인 용맥이라면 이는 절대 불변이다.
하지만 이곳 봉우리 좌측에는 가지가 없다. 마치 새의 한쪽 날개가 없는 것과 같은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모습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건원릉까지 이어지는 용맥의 상태가 문제가 많다는 것인데, 病龍 또는 偏龍이라 한다. 이것은 건원릉의 치명적인 결함이 된다.
한편 풍수에서 좌측은 장남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실제로 건원릉 이후의 왕실은 유독 장자에게 불행이 그치지 않는데, 우연이라 보기에는 예사롭지가 않다.
둘째,
건원릉 우측에 있는 산줄기가 느닷없이 90도로 방향을 바꾸어 건원릉의 산줄기 가장 약한 부분을 치는 형태다.(그림 E) 이는 백호가 건원릉을 위협하고 겁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청룡 백호의 소임은 혈처를 보호하는 것인데,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모습은 마치 크고 힘 있는 신하가 힘없는 주군의 옆구리를 치는 것과 같다. 이곳에서 계유정란의 하극상이 연상된다면 지나치다 할 것인가?
건원릉은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한 곳이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건원릉은 틀림없는 명당이라는 전제를 갖고 시작하면서, 발복은 고사하고 흉사만 계속되니까 풍수를 부정하고 불신하는 것이다. 건원릉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에 풍수 전체가 미신이라 매도당하는 것이다.
풍수인들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며, 건원릉을 반면교사로 삼아 더 이상의 실패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부단히 경계하고 노력해야 한다.
https://youtu.be/ztJCrZZLyn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