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은 단순히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의 자조 섞인 푸념만은 아니었다. 실제 여러 조사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겪어온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이 상당했음이 확인되었다.
2004년 경향신문과 민족문제연구소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독립유공자 후손 10명 가운데 약 6명이 낮은 학력과 불안정한 직업 등 취약한 생활 여건에 놓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실은 경제적 곤궁으로 이어졌고 상당수 후손이 자신의 생활과 경제 수준을 사회의 ‘하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경향신문, 2004년 2월 19일 기사)
이러한 현실은 이후 조사에서도 계속되었다. 2015년 광복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경제력 관련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1,115명 가운데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하층’이라고 인식한 비율이 73.7%에 달했다. 이는 독립유공자 본인 세대보다 자녀와 손자 세대에서 오히려 높게 나타나 경제적 어려움이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은 희생의 대가가 오히려 후손들의 가난과 고난으로 대물림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아픈 이면인데, 우리 사회가 깊이 되돌아보아야 할 대목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안중근, 이상룡, 이회영 가문을 들 수 있다.
안중근 가문
안중근(1879-1910) 의사는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체포되어 이듬해인 1910년 중국 뤼순 감옥에서 3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할 당시 가족으로는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 순국 이후 가족들은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탄압을 피해 러시아와 중국 등지를 떠돌며 고단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장남 안분도는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남은 자녀인 딸 안현생과 차남 안준생은 광복 이후 귀국했으나 안준생마저 1952년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안중근 집안은 의거 이전 황해도에서 수천 석을 거두던 대지주이자 지역의 유력 가문이었다. 그러나 하얼빈 의거 이후 경제적·사회적 기반은 크게 무너졌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오랜 세월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부유했던 명문가가 독립운동으로 삶의 기반을 잃고 그 고통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다.
안중근 가문의 이러한 비극은 이른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생겨난 시대적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상룡 가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은 안동의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으로 99칸 대저택으로 알려진 임청각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기자 1911년 전답을 비롯한 가산을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는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신흥강습소는 이후 수많은 독립군 간부를 길러낸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상룡은 이후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힘썼으며,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1932년 중국 길림성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가산을 바친 대가는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대대로 부와 명망을 누리던 명문가였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경제적 기반을 크게 잃었고 후손들은 오랫동안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1970년대 무렵에는 후손들이 극심한 생활고로 임청각을 제대로 관리하기 어려워 국가에 헌납하는 방안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수 대에 걸쳐 부와 명예를 누렸던 명문가가 나라를 위해 재산과 삶의 터전을 내놓았으나 그 희생의 여파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 집안이 겪은 고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회영 가문
우당 이회영(1867-1932)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부친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이다. 이회영은 여섯 형제 가운데 넷째였으며, 동생이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이회영을 비롯한 여섯 형제는 국내에서 누리던 부와 지위를 모두 버리고 가족들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만석에 이르는 막대한 가산을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으며, 이상룡·이동녕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수많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그러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대가는 혹독했다. 한때 조선에서도 손꼽히는 부와 명망을 누렸던 이들 일가는 망명지에서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형제와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회영은 1932년 일제에 체포되어 뤼순감옥에서 순국했고, 이석영은 상하이에서 극심한 생활고 속에 생을 마쳤다. 이호영은 가족과 함께 만주에서 행방이 끊기는 등 일부 형제는 최후의 행적이나 묘소조차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여섯 형제 가운데 다섯째 이시영만 광복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작고 후 수유동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한때 막대한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누렸던 그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았지만, 그 결과 가족과 후손들까지 오랜 세월 고난을 감내해야 했다는 점에서 우당 6형제의 삶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희생의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회영과 이상룡은 자신들이 누리던 부와 지위는 물론 가문의 재산과 삶의 터전까지 독립운동에 바쳤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진 자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 세 가문에서 주목할 점은 독립운동가들이 죽은 뒤 고향의 선영에 안장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뒤 감옥 인근 공동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확한 매장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11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 자신의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고 묘소조차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 역시 1932년 중국에서 생을 마친 뒤 머나먼 이국땅에 묻혔다. 그로부터 61년이 지난 1993년에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어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우당 이회영 형제들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부는 해외에서 생을 마쳐 묘소나 최후의 행적조차 확인하기 어렵고 광복을 맞아 귀국한 성재 이시영 선생만 강북구 수유동에 묘를 쓸 수 있었다.
음택의 동기감응(同氣感應)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필자는 이 대목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동기감응이란 조상과 후손은 같은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어 조상의 유골이 편안한 곳에 자리하면 그 좋은 기운이 후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전통적인 풍수 관념이다. 반대로 묘지가 좋지 못한 곳에 자리하면 불리하고 불편한 영향이 후손에게까지 미친다고 보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경제력과 건강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좋은 묫자리를 쓸 만한 경제적 여유도 고향에 돌아와 선영에 묻힐 자유도 없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해외를 떠돌다가 이국땅에서 생을 마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대대로 지켜온 선영이 있었고 조상들이 묻힌 고향 산천이 있었지만, 끝내 그곳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머나먼 타국 땅에 묻혀야 했다.
조선 시대 특히 사대부가들은 선영을 중시하고 묘지 선정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이 느꼈을 상실감은 매우 컸을 것이다.
한편 이상룡 선생의 묘가 있는 동작동 국립묘지는 한강 물이 크게 등지고 빠지는 곳으로 묘역으로는 적절치 못한 곳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유공자들의 묘지가 이러한 곳에 조성되었다는 것은 풍수인의 입장에서 아쉬움이 크다.
국립유공자 묘역이 명당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풍수적으로 큰 흠이 없는 무해무득(無害無得)한 자리 정도는 마련하는 것이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한 국가의 예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일부 친일 인사들은 넉넉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좋은 묫자리를 찾아 묘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민영휘(1852~1935)다. 춘천에 있는 그의 묘는 많은 사람이 답사할 정도로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가 남긴 상당한 재산은 후손들에게 이어졌으며, 그들 역시 오랫동안 경제적 기반을 유지해 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사오적 이완용(1858-1926)은 자신의 묘를 지키는데, 일본 순사들까지 동원할 정도로 각별한 관리를 했다고 하는데, 이는 후에 영화 ‘파묘’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완용 가문의 선영은 고양시 향동동 야산에 있었는데, 남향의 양지바른 곳이었다. 이완용이 선영을 마다하고 익산까지 같을 때는 터의 이해득실을 따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씁쓸한 속설을 풍수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단순히 묘지가 모든 결과를 결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 가문과 묘지의 형편을 비교해 보면 한 가지 의미 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땅은 사람을 가려서 품지 않는다. 애국자이건 친일파이건 산천의 형세와 기운은 한결같이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풍수의 기본 원리다. 그런 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은 변변한 묘지조차 쓰지 못했지만, 친일파 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좋은 땅을 가려서 쓸 수 있었다. 이러한 상반된 묘지 조건은 3대가 지나도록 후손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음택의 동기감응은 3대가 지나면 거의 소멸하고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면에서 명문가의 부활은 이제부터 추동력을 받게 된다. 그들의 고귀한 DNA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국가를 위해 고귀한 헌신과 희생을 한 분들의 묘역은 최선의 예우를 갖추어 양지바르고 편안한 곳에 마련해야 한다. 망자가 편히 영면할 수 있는 터를 마련하는 것은 국가가 그 희생을 끝까지 기억하고 보답하는 일이다. 이는 후손들에게 조상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줄 뿐 아니라 나라에 대한 신뢰와 긍지를 갖게 하는 뜻깊은 예우가 될 것이다.
https://youtu.be/RFgRm1pJj9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