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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언제인가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예고편이라는 말 외에 트레일러라는 영단어도 함께 쓰고 있었습니다. 양복 또는 신사 정장이라는 해묵고도 정겨운 표현을 어느덧 '수트'라는 외래어가 대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한국에서 예고편을 트레일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짧은 동영상 정도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무리 없이 볼 수 있게 된 2000년대 이후부터였습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트레일러라고 하면 그것은 1종 특수면허가 필요한 운송기관의 이름이었지요. 어르신들은 '추레라'라고 발음하십니다만, 어쨌든 이 '추레라'와 영화 예고편을 가리키는 '트레일러'는 같은 단어이며(trailer)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끌려가는 것, 혹은 추적자라는 의미죠. 그러니까 콘테이너 박스 같은 걸 싣고서 트럭 뒤에 끌려 다니는 게 추레라, 즉 트레일러이듯 영화 본편 뒤에 붙어서 따라 나오는 예고편도 트레일러인 것입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셨다면 바로 보신 겁니다. '아니, 영화 예고편은 본편 앞에 나오잖아?' 맞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화 예고편의 역사와 어원이 나옵니다. 초창기의 영화 예고편은 본편이 끝난 후 나왔다는 것. 그래서 트레일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
예고편의 역사도 영화의 역사만큼이나 깁니다. 영화가 대중들을 대상으로 상영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리한 장사꾼들은 여기에 광고를 끼워 넣을 수 있겠다며 머리를 굴렸습니다. 그리하여 1913년, 최초의 트레일러 필름이 미국의 극장가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이 최초의 예고편은 영화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뮤지컬 공연을 필름으로 소개하는 짧은 필름이었다고 해요. 바로 그 자리에, 개봉될 영화의 예고편 필름이 들어서는 데는 딱 1년의 시간이 더 걸립니다. 1914년에 상영된 최초의 영화 예고편은 찰리 채플린의 신작들 소개였다고 합니다.
초창기의 트레일러들은 스토리를 자세히 소개하는 문구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고, 유성영화가 발명된 1920년대 이후에도 설명적인 내레이션이 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오늘날의 형태로 예고편이 완성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1964년에 개봉된 존 휴스턴 감독의 영화 [이구아나의 밤] 트레일러가 처음으로 스피디하고도 감각적인 화면 편집에 후까시 충만한 내레이션을 써서 높은 호응을 얻었고 이후 이 포맷은 영화 예고편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구아나의 밤] 예고편에서 내레이션을 맡았던 이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다스 베이더 목소리로 유명한 배우 제임스 얼 존스였습니다.
어쨌든 영화 본편 뒤에 붙어 나왔다는 이유로 트레일러라는 이름이 붙었던 영화 예고편은 1930년대에 본편 앞으로 위치를 이동했습니다. 이것 역시 장삿속과 관련된 이유 때문이었는데요. 본편이 끝나고 나면 아무래도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생기는 반면, 영화 시작 전에 예고편을 붙여놓으면 다들 꼼짝없이 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그렇다면 '트레일러를 트레일러라 부르지 못하고…'가 되어야 맞지 않냐? 그건 또 아닙니다. 왜냐하면 트레일러라는 단어에는 '끌려 가는 것'이라는 의미 외에 '끌고 가는 것'이라는 반대의 뜻도 함께 들어 있거든요. 엎어치나 메치나인 거죠. 다만 트레일러만큼이나 프리뷰(preview)라는 단어도 예고편을 뜻하는 말로 많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많이들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예고편 시작 전에 "The following PREVIEW has been approved for…"라고 뜨는 초록색 바탕화면에서 말이죠.

이쯤에서 이 바탕화면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적절할 것 같군요. 할리우드 영화 예고편 앞에 짧게 붙는(말하자면 트레일러의 트레일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바탕화면과 글자들은 심의를 거친 예고편의 등급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영화 본편처럼 예고편도 심의를 받는다는 얘긴데요. 그 심의 등급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로 여러분들께서 가장 많이 보셨을 초록색 화면, 이것은 All Audience, 즉 '전체 상영가'로 모든 연령이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빨간색 바탕 화면도 있습니다. 이것은 Restrcted Audience, 우리나라로 치면 19금쯤 되겠죠. 세 번째로 노란색 바탕 화면인데요. 이것은 인터넷에 공개되는 트레일러에 붙는 19금 딱지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예고편도 심의를 거친 후, 그 등급과 일치하는 등급의 본편 영화 앞에 붙여서만 상영할 수 있게 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미국의 예고편 심의는 우리나라와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고편을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영상물'로서 다루고 있으니까요.
이것은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예고편은 야하든 말든 폭력적이든 말든 남녀노소 누구나 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야하고 폭력적인 영화라도 예고편은 애들이 봐도 되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영화와 함께 예고편을 심의하고 있는 한국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 보기 민망하거나 끔찍한 예고편의 경우 반려를 시킵니다. 새로 만들어 오라는 거죠. 여기에는 한국 영화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외국영화도 짤 없습니다. 최근에는 영화사들이 '우리 영화 예고편, 심의에서 빠꾸 먹었어요.'라는 걸 거의 사전 마케팅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네이버 뉴스 란에서 ‘예고편, 반려’라고 쳐 보시면 최근 화제작들이 거의 빠짐없이 검색될 겁니다) 어쨌든 이런 절차를 통해 우리는 [과속스캔들]을 보러갔다가 [쌍화점]의 예고편도 볼 수 있는 거지요.
영화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통해 다채로운 모습으로 발전해 온 트레일러는 이제 영화 광고를 넘어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까지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골든 트레일러 어워드'라는 영화 예고편 시상식까지 생겼으니까요. 1999년에 시작되었으니 올해로 벌써 11년째입니다. 참고로 2008년도 골든 트레일러 어워드를 휩쓴 예고편은 영화 [다크 나이트]로, 대상인 ‘올해의 트레일러’를 비롯, 3개 부문을 석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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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영화 예고편에 등장하는 멋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taking0600
수십 년 동안 할리우드 영화 예고편의 목소리를 전세 냈던 바로 그 허스키 보이스의 주인공 이름은 돈 라폰테인(Don LaFontaine)입니다. '전세 냈던'이라고 과거형을 쓴 이유는 불과 몇 개월 전인 2008년 9월 1일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입니다. 사인은 폐 기흉에 따른 합병증이었다고 해요. 1963년에 처음으로 예고편을 맡은 후 사망할 때까지 그가 녹음했던 영화 예고편은 5,000편 이상(본편 출연 포함)이고 TV 및 기타 매체의 광고 내레이션은 자그마치 70만 건에 달합니다.
애초 장래희망이 성우가 아니었던 라폰테인은 군복무 시절 녹음 기술을 배웠고 제대 후 뉴욕에서 레코딩 엔지니어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63년에 처음으로 녹음한 영화 [카사 그란데의 총잡이들(Gunfighters of Casa Grande)] 예고편 내레이션도 성우가 펑크 낸 것을 메꾸기 위해 대신 작업했던 거라고 하죠. 그런데 납품받은 영화사였던 MGM에서는 의외로 대만족. 이후 그에게 성우의 길이 열리게 된 겁니다.
그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 때는 명함에 '성우'라고 직함을 박고 LA로 이주한 1981년부터였습니다. 이전까지 라폰테인은 공식적으로 성우가 아니라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예고편 담당 책임자'로 활동하며 틈틈이 트레일러 내레이션 녹음을 하고 있었죠. 프리랜서로 독립한 이후 그는 기사 딸린 리무진을 타고 다니면서 많을 경우 하루에 60건씩 녹음한 날도 있다고 해요. 그런 날에 리무진의 기사는 시동도 끄지 않은 채로 라폰테인이 녹음하고 나오길 기다렸다 다음 스케줄로 이동하곤 했다고 합니다.
'라폰테인의 목소리가 아니면 무효'인 몇몇 영단어 및 숙어가 있습니다. 'this summer'라든가 'coming soon' 그리고 'in a world...'로 시작하는 문장들인데요. 특히 'in a world...' 시리즈는 대부분 그가 직접 쓴 카피들입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영화 속 세계를 가장 빨리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예고편 내레이션으로서는 그의 유작이 된 다큐멘터리 영화 [콜 & 리스펀스(Call+Response, 2008)] 트레일러에서도 그의 마지막 'in a world...'를 들을 수 있습니다.

편수가 좀 많은 게 아니다보니 그의 '대표작'을 꼽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다만 본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예고편은 데이빗 린치의 영화 [엘리펀트 맨(1980)]의 트레일러라고 합니다. 또 '영화 예고편'이라고 하면 라폰테인의 목소리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지명도가 높고 숙련된 이를 기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라폰테인 효과'라는 신조어도 있습니다. 일반 상식 책에도 수록되어 있는 용어이니 취업 시험을 앞둔 분들은 이 기회에 외워 두시길. 이제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게 무척 아쉬운 일이긴 합니다만, 사실 그의 사망과는 별개로 최근의 할리우드 영화들은 점차 예고편에 내레이션을 쓰지 않는 추세입니다. 2000년대 이후 블록버스터들의 예고편을 떠올리면 수긍이 갈 텐데요. 확실히 라폰테인 스타일로 내레이션의 포스가 작렬하는 트레일러는 철지난 유행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라폰테인이라는 성우의 위대함이 더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요. 내레이션이 지배했던 할리우드 영화 예고편의 황금시대는 그가 열었고 또 그가 닫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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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영화 / 무비QnA / 지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