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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요절 혹은 짧은 생애의 화가들

작성자미션|작성시간19.09.27|조회수560 목록 댓글 0
<한국의 요절 혹은 짧은 생애의 화가들>

비단 천재화가들의 요절은 결코 외국화가들에게만 닥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예술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찍이 표현주의 화풍을 개척한 화가로 평가받는 구본웅(1906∼1953),2살 무렵 입은 척추 장애로 평생을 단신으로 살았다. 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미술에 입문, 고려미술원에서 김복진(金復鎭)에게 조소를 배운 뒤,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 1928년 일본 가와바다[川端]화학교를 거쳐, 1929년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미학과에서 수학하고, 1933년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천재화가 이인성(1912∼1950), 그리고 국민화가로 꼽히는 박수근(1914∼1965)화백도 그리 오래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화가 이중섭(1916∼1956), 한국적 조각가 권진규(1922∼1973), 추상화가 함대정(1920∼1959), 현대판화의 개척자 정규(1923∼1971), 향토성을 불붙인 김종태(1906∼1935), 민중목판화의 진수를 열어보인 오윤(1949∼1986), 신체적 불구의 애틋한 화가 손상기(1949∼1988), 인간 실존의 리얼리스트 류인(1956∼1999) 등. 이외에도 김경(1922∼1965), 송영수(1930∼1970), 여류화가 최욱경(1940∼1985), 추상의 박길웅(1941∼1977), 파이프 작가 이승조(1941∼1990), 설치•전위미술의 전국광(1946∼1990) 작가들은 너무나 짧은 생애를 보냈다.

마른 체구에 목판화에만 열중했던 오윤(1946-1986년)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하며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을 담은 그는 민중 미술의 선구적인 작가였다. 작품속에서는 어우러져 추는 춤사위의 모습을 목판에 새겨 슬픔과 한을 묘사했다. 탈춤, 민속놀이, 판소리로  <칼 노래> <남녘 땅 뱃노래> <도깨비> 등 대표작이 그것이다.
목판예술의 진수와 혼을 불태웠던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그림을 그려 간경화로 마흔 한 살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여류화가 최욱경 또한 예술에의 열정과 헌신으로 불꽃 같은 삶과 예술 혼을 불사르다 45세 나이로 요절한 화가이다.
그녀는 두 차례 미국에 체류하면서 추상 표현주의적인 미술을 뜨겁고 격정적인 색채로 보여주었다. 거친 속도감과 화려한 색채로 폭발적인 내면의 세계를 드러낸 강렬한 색채는 자신의 독백처럼 뜨겁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겨울바람에 씻어 버리려고  여섯자 눈 아래 파묻어 버리려고  잃어버린 호수에 가두어 버리려고 하지만 차마 못 잊겠어요.
사랑한다는 것은 영생이기에 영원한 연인이 되려고 금지된 꿈을 꿈속에서 꿈꾸었습니다.
<열애 >1985년. 「애멸된 독백」에서, '철저하게 외부 입김이 배제된 캔버스와의 싸움, 어떤 편견이나 압력도 내 성을 허물지 못하리라.' 그녀는 오로지 결연한 의지로 그림에 목숨을 건 용감한 여류작가 였다.

우리는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이라 불리는 손상기 또한 잊을 수 없다. 1949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척추를 다쳐 성장이 멈추는 불구가 되어 '꼽추화가'로 불린 그는 1988년 39의 나이로 생애를 달리했다.
1981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주목을 받은 그는 '자라지 않는 나무', '시들지 않는 꽃' 등 자연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였고 《공작도시》연작에 이르러서 사회와 역사 문제로 작품세계를 확산 시켰다. 
나혜석은 수원에서 출생 일본 동경 여자 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여권 운동에 앞장섰다. 친목회를 조직하고 「여자계」를 발간 . 김동인, 염상섭보다 1년 앞선 여성소설 1호이다. 그녀의 서간체 소설과 단편소설은 문학사에 있어 그림 못지않은 위치를 인정받고 있다.
21세 때 남편이 결핵으로 사망하자 충격으로 신경쇠약에 빠져 일생을 두고 자신을 사랑할 것과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해 둘만이 살 것 등을 조건으로 결혼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21년 유화 70점으로 서울 최초의 개인전으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41세에  방랑 생활을 시작 안양 양로원을 거쳐 48세에 폐인이 되어 1946년 행려병자로 서울 자혜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한국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의 불운한 마지막 생애였다.

또한 한국 테라코타 조각의 권진규의 자살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다.
1922년 함흥에서 태어나 25세 때 도일하여 일본 무사시노 미술학교에서 조각 수업을 받고,   28세에 "이과전"에서 최고상을 수상 하면서 일본화단에 주목을 받은 그는 서울로 돌아와 자신의 고독한 삶을 살며 우리나라 테라코타 기법의 선구자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무서운 냉대를 겪으며 그는 자신의 분신 같은 고독한 인간의 초상들을 불교적 색채로 제작했다.
특히 목이 긴 조각상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작업실에서 1973년 성북구 동선동 작업실에서 “인생은 공, 파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이렇게 눈길을 끄는 만큼 요절과 예술가들의 생애는 비극적이다. 그러나 천재 화가들의 요절에 지나치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 '요절의 화장(化粧)'에 눈이 멀어 정작 우리가 정확하게 재평가해야 할 작가들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작품을 보는' 일이지 그 작품 뒤 작가의 삶만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평가를 받기 위해 예술가들은 그림으로 이야기 하여야 한다,
판사가 판결문으로 말하듯이 , 작가는 오로지 그림으로 말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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