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에도시대 고급유녀 오이란
花魁おいらん 오이란
일본 에도시대의 고급 매춘직업.
유곽에서 일하는 유녀들 중
최상위 계급 유녀를 지칭하는 말이다.
서양으로 치자면 유럽에서
상류층 손님들 위주로 상대한
고급 창녀인 코르티잔(courtesan)이나 고대 그리스 헤타이라(Hetaira),
한국으로 치자면 일패기생과 같이
'예능, 지식'을 두루 갖추고
상류층의 후원을 받으며 모든 형태의 유흥을 제공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오이란은 마케팅이 중요했으며
이런 마케팅 행위를 법으로 허락하였기에 그만큼 화려하게 치장했고
비록 유곽 거리로 한정하였지만 평민,
그것도 유흥업 여자가 거리를 행차를 할 수 있는
타 문화권에서 보기 드문 권위를 행사했다.
또한 공식적으로는 매춘을 금지한 기생과 달리
유녀는 막부에게 공식적으로 매춘업을 인정 받았고,
국가의 강제 동원이 명문화된 공공재인 기생과 달리 자유 직업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자유주의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막부의 권력자로 인해
본인의 의사나 유곽 내의 규칙을 무시하고 우선 콜을 받는 일도 있었다.
다만 외모가 가장 중요한 코르티잔과 달리
아시아 문화권의 매춘업 최상위 종사자들은 인문을 중시한
상류층 손님들의 취향을 따라 인문잡기가 외모만큼이나 중요했으며,
이는 오이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유직이라 하더라도
오이란으로 오른 자들은 일단 출생이 가난하여 팔려온 경우가 대부분인데다
오이란으로 오르기까지 엄청난 돈을 투자했으므로
빚을 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자금의 출처는 많은 경우 유곽이나 전문 대출업자이므로
자신의 몸값과 투자빚을 모두 갚기 전까진
유곽 주인이나 물주에 의해 신변이 통제 당했다.
신분제 사회였으므로 현대인이 생각하는 자유직, 자유민 신분이 아니었다.
'오이란'이라는 말의 어원은
18세기 중엽 유명한 공창 구역이었던 요시와라(吉原) 유곽에서
동생뻘 유녀들이 '우리 집 언니(おいらの所のお姉さん,
오이라노 도코로노 오네상)'라고 부르던 말에서 변한 것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오이란 이전까지 최상급 유녀를 가리키던 '타유(太夫)'라는 말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안 쓰는 말이 되었다.
게이샤, 마이코와 비슷해 보이는 화장이나 머리 모양 때문인지 자주 헷갈리지만
게이샤나 마이코는 전문 예능인을 말하는 것이고,
정말로 유곽에서 매춘을 하던 이들은 오이란이다.
한 유곽의 유녀 자리에서 알파격 자리에 있는 고급 유녀라 할 수 있으며,
오이란 외에 '타유'라는 명칭으로도 불렀다.
이들은 가발이 크고 화려하며
일반인들이 오비를 뒤로 매던 것과 달리 앞으로 오비를 맸다.
오비를 앞으로 매면 활동에 제약이 생기기 때문에
노동을 하지 않는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을 탔던 방식이나,
오이란이 이 방식을 흉내내면서 오이란의 상징이 되자
앞으로 오비를 매는 일이 줄어 들었다고 한다.
유곽에서도 화대가 몹시 비싼 고급 유녀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면대면이 가능하긴 힘들었다.
보통 유곽의 격자창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호객 행위를 하는 가게인
하리미세(張見世)에 오이란은 가지 않았다.
격자창 뒷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유녀들은
주로 오이란보다 아래 계급인 코우시.
가게 밖을 지나다니는 손님 유인용 유녀들이 주로 이들이었다.
오이란은 찻집(茶屋, 차야)을 매개로 삼아 연락을 주고받았다.
유곽들이 몰려있는 곳에 있는 찻집은
체면을 중시하는 무사 계급 특징상 직접적으로 찾지 않고
유녀에게 기별을 보내 자신을 모시러 올 때까지 기다리던 곳이어서
말 그대로 찻집 역할도 하면서 간단한 밀회 장소
(물론 밀회 이상의 것들(...)도 할 수 있는 자리도 2층에 마련)로도 활용하였다.
그런 탓에 찻집에서도 호기를 부려 유흥비를 떨어뜨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손님보다도 오이란이 상석에 앉았고, 오이란과 초기에 관계를 가질 손님은
무려 3차까지의 대면 절차가 존재했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급 낮은 유녀들에 비해
몸 치장, 옷 치장, 머리 모양 등이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해당 직책에 걸맞게 섭렵해야 하는 것들도 많았다.
또한 출신지를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
이쪽 업계에서나 쓰는 언어와 말투(쿠루와코토바(郭詞))를 따로 배우며,
기본 출신지가 말투 등에서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이건 다른 유녀들도 마찬가지여서
만약 스스로 들어온 게 아니라 부모나 보호자 동의 없이
강제로 팔려온 여아가 이 말투가 입에 배어버리면
출신으로 아이를 추려내서 찾기가 어려워지기도 했었다.
여하튼 이런 연유 때문에
오이란들은 용모가 아름다운 건 기본이고
지성과 품격, 잠자리 스킬, 다도, 꽃꽂이, 향도, 악기 연주,
노래, 장기, 시, 춤 전반으로 매우 능해야 했으며,
미모·지성·교양 모두를 다 갖춘 이상적인 여인상으로써
상품화하여 팔리는 존재들인 만큼 패션 측면에서도 자신들을 갈고닦아
당대 패션 리더라 불릴 정도로 패션 유행을 주도하기까지 했었다.
이런 오이란들로 인해 발생한 직종이 바로
유녀들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여성 미용사인 카미유이(髪結)였다.
이리 까다로운 조건들을 갖춘 만큼
각 유곽이 보유한 오이란의 수는 당연히 적었다.
이쯤 보면 매춘부임에도
가히 귀족 아가씨들과 맞먹는 스펙의 보유자라 할 수 있으나,
그래도 결국 유곽에 붙잡힌 인생인 데다
직장에서 뛸 수 있는 기간도 길어야 30세 안팎이었다.
유녀들의 평균 은퇴 시기가 27세였다.
그래서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직접 몸값을 치르고 중간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었다.
유녀가 유곽으로 팔려왔을 때 몸값의 경우
보통 유녀를 판 사람들이 받아 챙긴 지 오래이며,
급이 높은 유녀가 밑에 두고 부리는 카무로와 신조의
부양 비용을 상급 유녀들이 모두 내야 해서
기껏 번 돈이 얘네들 챙기느라 빠져나가기도 했다.
개인실을 가질 수 있는 중급 이상 유녀들의 경우
여기에 더해 방세도 따로 내야 했으며(...)
옷, 머리, 화장품, 장신구 등
손님 받기용 치장비도 유녀 자신이 다 내는 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오이란들의 경우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빠져나가는 돈도 그만큼 많았기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다가
급이 올라갈수록 기본 낙적료도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유녀 일을 하던 중간에 자기를 빼낼 수준의 돈을
유녀 스스로 마련하는 일이 어려웠다.
결국 나이가 다 차서 나간 20대 후반 유녀들은
이제 한물 간 퇴역이었기에 일을 받기도 힘들고
잘 나가는 손님 잡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유녀들에겐 잘 나가던 시절 몸값 다 치르고 나가거나
후술할 미우케(身請け)를 받는 게 이상적이었지만
그것도 어려웠던 게 현실이다.
그래서 은퇴한 뒤에도 반토신조 등의 형식으로
유곽에 남아 후임 유녀 양성을 하거나
돈 있는 손님들에게 미우케(身請け),
즉 특정 유녀를 선택한 손님이 돈을 치르고
그 유녀를 낙적시켜 밖으로 빼내는 방식으로 받아
첩으로 들어가는 것 정도만 노릴 수 있었다.
그나마 오이란에게 이상적인 결말이 미우케였다.
제 아무리 학식과 교양이 높고 용모가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결국 매춘만 하던 인생이었던 만큼 맨몸으로 유곽에서 나가면
그 뒤로 살아남기가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우케를 받는다면 최소한 돈줄과
보호자(남편)가 될 남자의 첩 자리라도 얻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도 미우케를 받을 확률은 그닥 높지 않았다.
오이란을 빼내려면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가는데
유곽 주인(보우하치)들이 마음대로 값을 불러대서
천정부지로 높게 제시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담을 감수하여
오이란을 빼가 첩이나 아내로 삼는 사례도 있었다.
오이란과 게이샤는 어떻게 다른가?
오이란 : 고급 매춘부, 사회적 계급이 높았다. 5급 사무라이 급이었다.
게이샤 : 행사를 위한 단순 예능인, 상대적 계급이 낮았다.
마이코 : 게이샤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는 견습생. 오비를 길게 늘어뜨렸다.
일본의 전형적인 게이샤
일본의 전형적인 오이란
게이샤는 오비가 뒷쪽에 있고...
오이란은 오비가 앞쪽에 있다.
게이샤의 가발장식은 단순하고 가볍다
오이란의 가발장식은 복잡하고 무겁다 (10키로), 화려한 금색 장식을 꽂는다
게이샤는 보통의 게다를 신고 버선을 신는다
오이란은 버선을 신지않고 맨발을 노출시킨다
오이란은 굽이 높은 게다를 신는다 (최소한 20센치 이상)
주위사람보다 키가 크게 보이게 하고 구경꾼 들에게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오이란을 만나기까지
오이란은 해당 유곽의 상급 유녀, 최상급 유녀인 만큼
만나기까지 절차가 복잡하기 그지없었는데,
첫 손님과 오이란의 대면만 해도 3차례로 나뉘어졌다.
게다가 그런 과정에서 드는 비용도
기본 화대비+중개료+연회 비용+종업원에게 주는
웃돈으로 붙는 추가 요금이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오이란을 만날 수 있는 이들은
돈 많은 상류층 사람들로 자연스레 한정되었으며,
이들은 오이란을 비롯한 상급 유녀를 사는 행위를
'머리 올리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이란을 만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절차들이라고 알려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손님이 히키테챠야(引手茶屋)에서
자신의 신분, 재력, 성향과 맞는 오이란을 소개받는다.
이 때 손님은 호기를 부리며 재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오이란에게 전갈이 가는 동안 손님은 토로(登楼) 2층에 위치한
히키츠케베야(引付部屋)라는 연회장 내지 객실로 이동하여 연회를 준비한다.
연회 비용은 손님이 냈으며
첫 만남 때 오이란이 손님보다 상석(上席, 카미자)에 앉고
손님은 말석/하석(下席, 시모자)에 앉는다.
당연히 요시와라 밖에선 오이란보다 손님 지위가 더 높지만
요시와라 유곽 안에선 오이란 지위가 한정적으로나마
손님보다 위라는 취급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명 받은 오이란이 몸단장을 하고 연회장으로 간다.
하급 유녀들과 경호원들을 데리고 이동하는데,
이 때의 행렬을 '오이란 행렬(花魁道中, 오이란도츄)'이라 하여
요시와라의 주요 볼거리가 되었다.
첫 대면 때는 손님이 품평 받는 시기이며,
손님과 오이란이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술만 한 잔 나눌 수 있었다.
이 때 손님은 많은 악사들과 게이샤들을 불러 자신의 재력과 교양을 뽐냈다.
손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오이란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릴 수도 있었다.
두 번째 대면 때는 위의 절차를 반복하며,
손님은 오이란에게 조금 더 가까이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진 동침은 할 수 없다.
세 번째 대면 때는 위의 절차를 반복하며, 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손님은
연회에서 자기 이름이 적힌 상을 받아 오이란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세 번째 대면 때 손님이 '단골금'이라는 축의금을 가게에 지불한다.
이 때부터 손님은 '나지미(馴染み)'라는 단골이 되어 오이란과 동침할 수 있었다.
손님은 젓가락 주머니(하시부쿠로)를 받게 되는데
이는 오이란에게 손님으로서 인정 받은 징표라 한다.
하지만 정작 이런 절차들은 실제로 있었는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며,
만약 정말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에도 시대 호황기였던 겐로쿠 시대 때
높은 계급 손님들에게만 한정적으로 행했으리라는 추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게다가 요시와라 구역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유녀들의 손님이 무사 계급에서 평민 계급으로 옮겨갔으니
이를 따라 점점 유녀 접대도 대중화, 간략화 되어
최소한 요시와라 후기엔 이런 절차들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볼 수 있다.
오이란의 단골, 나지미(馴染み)
위에서도 나와있듯이
오이란에게 3번의 화대를 성공하여 단골로 인정 받은 손님을 말한다.
이들은 겸사겸사 나지미킨(馴染み金)이라는 단골비도 내야 했으므로,
나지미가 되는데 들어가는 돈이 못해도 현재 가치로 200만엔을 넘어가니
당연하게도 신분 높고 돈 많은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 대신 나지미가 된 손님은
오이란에게 자기 이름이 적힌 젓가락 주머니(하시부쿠로)를 받고
이름을 불러주며 부부처럼 대하는 것도 가능하고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것 또한 가능해지는 등 확실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지미에게도 따라야 할 규칙이 있었다.
다른 유녀와 관계를 맺는 것은 오이란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취급하여
들킬 경우 요시와라 문 앞에서 붙잡혀
위자료를 물어내고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다 다른 유녀들에게 조롱을 받거나
여장을 당하게 되는 등 망신을 당할 일들도 감안해야만 했다.
만약 여러 손님이 오이란 한 명을 동시에 지정할 경우
오이란은 그 중 한 명만 상대하고
나머지는 오이란의 시중을 드는 하급 유녀들이 상대했다.
그래도 화대는 받아낸다고 한다(...) 물론 통상 가격의 화대 수준이다.
오이란의 헤어스타일과 패션
대표적인 헤어스타일로 비녀 여러 개를 좌우대칭으로 꽂는 다테효고(伊達兵庫),
카츠야마라는 유명한 유녀가 유행시킨 헤어스타일은 카츠야마 마게(勝山髷),
그 외에 겐로쿠 시마다 마게(元禄島田髷), 에도 시대 중기에 유행한 등롱빈(燈籠鬢),
시마다 마게(島田髷) 등의 헤어스타일이 있다.
이 중에서 시마다 마게는 일본 전통 결혼식 신부 머리 모양이 되었으며
오이란 헤어스타일이 당대의 유행을 타고 일반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그 외에 일반 비녀 말고도 꽃비녀로 머리칼을 장식하기도 했다.
신발은 산마이바 게타(三枚歯下駄)라고 해서
정말 높은 건 20cm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굽이 상당히 높다.
통굽이 아닌 3개로 갈라진 굽인 나막신(게타)을 신고 다녔으며,
걸을 때 발을 안쪽으로 모아 걷는 특별한 팔자걸음
걸음걸이인 하치몬지(八文字)를 시전하며 걸어다녀야 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데 요시와라는 '외팔문자'(발걸음을 밖으로 돌림),
교토 시마바라(京嶋原)와 오사카 신쵸(大坂新町)는 '내팔문자'(발걸음을 안으로 돌림)였다.
이 걸음걸이가 익숙해지기까지 대체로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오이란은 최고급 유녀답게 의상도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다.
기본 기모노 위에 화려한 무늬와 색상이 있는 겉옷인 우치카케(打掛)를 입고
오비를 앞으로 걸쳐 풍성하게 천을 늘어뜨리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의상의 무게도 엄청나게 무거워 30kg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이동할 때 굉장히 힘들었을 확률이 높은데
상당한 무게의 장신구가 있는 가발+굽 높은 신발+8자 걸음+30kg이나 되는
의상(...)을 몸에 매달고 움직여야 했으니
쌀가마니 30kg 이상의 무게를 지고 힘든 내색 없이
우아한 자태로 요상한 걸음걸이까지 써서 다녀야 했던 것.
생각보다 여성의 몸은 저렇게 무거운 걸 잘 드네 싶을 정도의
근력 수준까지 가더라도 근육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남성은 어느 정도 무거운 걸 들면
바로 근육과 혈관이 튀어나와 쉽게 눈에 띄는 것과 다르다.
유녀들의 다양한 계급/등급과 오이란
1. 유녀들의 계급
처음부터 바로 오이란이 되는 유녀는 없다.
보통 유곽의 유녀들의 맨 초기 계급은 카무로(禿)에서 시작한다.
오이란이 되기까지의 정식 유녀의 순위라던가 자세한 계급 구성도는 다음과 같다.
1) 구 요시와라 초기: 타유(太夫) > 코우시(格子) > 하시타(端)
2) 구 요시와라 말기: 타유 > 코우시 > 츠보네(局) > 하시타 > 키리미세(切見世)
3) 신 요시와라 초기: 타유 > 코우시 > 산챠(散茶) > 츠보네 > 키리미세
4) 신 요시와라 중기: 타유 > 코우시 > 산챠 > 우메챠(梅茶) > 키리미세
5) 중기 이후: 요비다시(呼出し) > 츄산(昼三) > 츠키마와시(附廻し) >
자시키모치(座敷持ち) > 헤야모치(部屋持ち) > 키리미세
카무로(禿)
유곽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10세 전후의 견습 유녀들을 가리키는 계급으로,
유녀 계급의 맨 밑바닥이자 시작점이라 볼 수 있다.
카무로들은 언니/선배격 유녀들의 시중을 들며 유곽의 일을 배웠고
오이란의 시녀 역을 하기도 했는데,
오이란들은 최소 2명 이상의 카무로를 부렸다고 한다.
카무로들 중 유독 일을 잘해 유녀로써의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을
'힛코미카무로(引込禿)'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이들이 카무로들 중에서도 특별 취급되어 오이란으로 길러지기 위해
따로 관리를 받아 성장한 후 오이란이 된다는 절차를 밟았다.
역으로 아래 나오는 신조 중 토메소데신조처럼
유곽에 좀 더 늦게 팔려와 이 시기를 건너뛰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차후 고급 유녀가 못 된다는 취급을 받기도 했다.
신조(新造)
카무로 바로 다음 단계의 유녀들을 가리키는 계급을 말하며, 10~15세 무렵이 주 연령대.
아직 나이가 어려서인지 손님과 동침까진 하지 않았으나,
카무로 시절처럼 언니/선배 유녀들의 시중을 들고 일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손님의 말상대나 술자리 상대가 되어주며
좀 더 유녀의 일에 가까워지는 계급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이란은 신조 1~2명의 부양을 받고, 신조들은 오이란이 몸치장을 하는 사이
손님의 말상대(시간벌이)를 하며 접대하는 역할도 맡았고,
동침만 안 하지 오이란에게 몰려든 손님들 중 일부를 상대해주기도 했다.
주로 오이란에게 손님이 너무 많이 몰렸을 경우다.
신조는 또 여러 가지로 구분되는데 다음과 같다.
힛코미신조(引込新造):
특별히 기량이 좋고 외모가 아름다운 신조로 일반 신조에 비해 높게 쳐주는 신조.
후리소데신조(振袖新造) :
줄여서 후리신이라 하는 신조로, 어원은 후리소데. 일반적인 신조들이 여기에 속한다.
타이코신조(太鼓新造) :
유녀로써의 인기는 없으나 기예에 뛰어나 연회에 동원되는 신조로,
게이샤의 역할을 대신해 악기연주나 노래 등을 하며 흥을 돋우는 역할을 맡는 신조들이다.
토메소데신조(留袖新造) :
어원은 토메소데. 후리소데신조와 동년배이지만 고급 유녀가 될 수 없다는
취급을 받는 유녀로써 보통 10대쯤에 팔려와서 카무로 시기를 건너뛴 케이스이다.
오이란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맡는 것은 후리소데신조와 동일하나,
손님까지는 안 받는 후리소데신조들과 달리 토메소데신조는 손님을 받았다.
반토신조(番頭新造) :
줄여서 반신이라 불리는 신조로, 타 신조들과 달리 나이가 많아 30세 전후였다.
이들이 나이가 많은 이유는 유녀 일을 은퇴하고
신조 이상 계급의 유녀들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2. 중급유녀
자시키모치(座敷持ち)
손님과 동침할 용도의 개인 침실과 개인 응접실을 지닌 중급 유녀.
화대는 오늘날의 돈으로 약 2만 엔 정도로 중급 유녀들 중에선 그나마 화대가 제일 비쌌다.
자시키모치까지 상급 유녀로 분류하거나
자시키모치를 오이란의 한 종류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일단 중급 유녀로 분류한다.
헤야모치(部屋持ち)
개인 침실을 지닌 중급 유녀. 화대는 오늘날의 돈으로 약 1~2만 엔 정도였다.
우메챠(梅茶)
우메챠죠로(梅茶女郎)라고도 한다.
츠보네(局)
츠보네죠로(局女郎)라고도 한다. 간혹 하시타죠로와 혼동되기도 했으며,
화대는 오늘날의 돈으로 약 5천 엔 정도로 중급 유녀들 화대 중에선 뒤에서 두 번째.
하시타(端)
하시타죠로(端女郎)라고도 한다. 본디 중~하급의 유녀의 통칭이었으나
키리미세의 등장 이후 중급 유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다만 키리미세를 그대로 하시타죠로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위의 츠보네와 더불어 하시타는 하급 유녀로 보는 견해도 있다.
3. 상급유녀
타유(太夫)
최상급의 유녀.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요시와라에서 타유라 불리는 이들은 사라졌고,
그 호칭은 오이란이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요시와라 사이켄(吉原細見)>에 따르면
요시와라에 타유는 1744년에 5명, 1751년에 1명이 존재했다.
타유에 대해서는 '오이란의 이전 명칭이다',
'타유가 최고 등급이고 오이란이 그 다음이었으나
타유가 사라지면서 오이란이 최고 등급이 되었다',
'요시와라의 최고 유녀는 오이란,
교토 시마바라의 최고 유녀는 타유' 등 여러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다.
전국시대와 무로마치 시대 기준으로 일반 유녀가 타유까지 되는 과정은
카무로(禿) > 후리소데신조(振袖新造) > 카코이(鹿恋/囲) > 텐진(天神) > 타유(太夫)였다고 한다.
즉 타유라는 계급은 의외로 역사가 깊은 계급이었다.
역사가 깊은 최상위 계급인 만큼
타유는 받는 손님의 급도 일반 유녀들과 달라서
대상인, 귀족, 황족, 관리, 문인 등을 상대해야 했고,
그 때문에 용모는 물론 가무(歌舞)를 비롯해 온갖 것들과
높은 계급 사람들에 맞먹는 교양과 학식까지 쌓아올려서
엄청난 교양과 품성을 갖췄다고 한다.
이 특징들은 오이란에게서도 반영되는 특징이다.
오이란(花魁)
상급 유녀. 타유 다음 등급이었다고도,
타유를 포함하여 최상급~상급의 유녀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었다고도 한다.
타유라는 말이 사라지고 나서 오이란이 그 유곽의 우두머리 유녀이자
고급~최고급 유녀의 대명사가 된 걸로 봐서
타유의 의미와 계급적 특징을 오이란이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오이란 자체가 (타유라는 말이 사라진 이후)
단순 최상급 유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상급 유녀에 포함되는 계급 전반을 다 포괄해서 불렀다는 말도 있다.
소규모 가게에서는 오쇼쿠(お職)가 이 위치를 대처하기도 했다.
오이란의 화대는 오늘날의 화폐로 1회 4~10만엔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코우시(格子)
오이란 다음 가는 상급 유녀.
격자창(=코우시) 너머에 앉아 있었다 하여 이렇게 불렸다.
코우시죠로(格子女郎)라고도 한다. 18세기 이후
오이란, 요비다시, 츄산, 츠키마와시 등으로 흡수되거나 분화되어 사라졌다.
산챠(散茶)
코우시 다음 등급의 중상급 유녀.
산챠죠로(散茶女郎)라고도 하며 상급 중에선 가장 낮은 계급에 위치한 유녀이다.
요비다시(呼出し)
본래는 유녀 전체를 통칭하는 단어였으나
이후 찻집에서 손님을 맞는 상급 유녀로 뜻이 바뀌었다.
츄산/히루산(昼三):
요비다시 다음 등급의 유녀. 후대로 갈수록 사라졌다.
츠키마와시(附廻し):
츄산 다음 등급의 유녀.
오이란의 품평 기록과 현존 여부
품평 기록의 존재
오이란(花魁)의 품평은 에도 시대 요시와라 유곽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되었으며,
특히 "요시와라 사이켄(吉原細見)"이라는 간행물에
유녀들의 등급, 화대(料金), 인기도 등이 상세히 기재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유녀의 지위(타유, 오이란, 산챠 등)와 각 등급별 요금을 명시했으며,
인기 오이란은 별도로 이름이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기록된 내용
등급별 화대: 타유 > 오이란 > 산챠 순으로 가격이 책정되었으며,
오이란의 경우 동침 1회에 현대 기준 약 4~10만 엔이 소요되었습니다.
교양 평가: 오이란은 다도·서예·샤미센 등 예술적 소양을 점검받았으며,
우키요에에 그려질 정도로 미모와 품격이 중요시되었습니다.
문학 작품 반영: "유죠호반키(遊女評判記)"와 같은 품평집에는
오이란의 특기나 매력이 시나리오 형태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실물 기록의 현존 여부
요시와라 사이켄: 1658년(만지 원년)과 1775년(안에이 4년) 판본의 일부가
도쿄 국립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나, 완전한 형태는 드뭅니다.
우키요에: 오이란의 모습을 담은 우키요에(예: 스즈키 하루노부 작품)는 다수 전해지며,
과장된 비녀와 화려한 의상 등 당시 미적 기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약: 품평 기록은 공식 문서와 문학 작품을 통해 존재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원본은 제한적입니다.
다만 우키요에와 간행물 일부가 당시 오이란의 위상을 증명합니다.
오이란 품평 기록의 차별성
1. 등급 체계의 엄격성
오이란 품평은 타유(太夫) 등 최상급 유녀의 평가 기준을 계승하면서도,
18세기 중엽 이후 독자적인 체계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요시와라 사이켄에는 오이란의 등급을
▲다카오타유(高尾太夫)급 ▲아게마키타유(揚巻太夫)급 등으로 구체화해
타 유녀 기록보다 계층화가 뚜렷했습니다.
2. 예술적 교양 평가
일반 유녀 기록이 주로 외모와 화대(料金)에 집중한 반면,
오이란 품평은 ▲다도·샤미센·시가(詩歌) 능력 ▲대화술
▲고객(다이묘/상인) 맞춤 접객 기술 등 종합적 소양을 평가했습니다.
유죠호반키에서는 "오이란의 노래 한 곡이 계약을 바꾼다"는 표현으로
예술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3. 시각적 과시의 차원
우키요에에 등장하는 오이란은 ▲3kg가량의 비녀 ▲20층 이상의 기모노 등
현실보다 과장된 화려함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는 대중적 인기를 위한 상징적 표현으로,
일반 유녀 기록에서는 찾기 어려운 특징입니다.
4. 고객 선별 절차의 공식화
요시와라 호소미에는 오이란의 "3회 면담 규칙"
(쇼카이→우라→나지미)이 명문화되어 있습니다.
반면 중하급 유녀는 단번에 동침이 가능했으며,
이 과정에서 오이란은 손님을 품평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5. 경제적 가치의 문서화
오이란의 화대는 일반 유녀의 5~10배에 달했으며,
요시와라 사이켄에는 "단골금(名代金)"이나 "사과금(詫び銭)" 같은
특수 항목이 별도로 기재되었습니다.
이는 계약 관계의 공식성을 보여줍니다.
요약:
오이란 기록은 예술성·계약 절차·상징적 과시 등에서
다른 유녀 기록과 차별화되며, 에도 문화의 계층적 미학을 반영했습니다.
다만 후대의 낭만화로 인해 실제와 기록 간 괴리가 있을 수 있음이 지적됩니다
오이란 품평 기록의 작성자
공식 기록:
요시와라 사이켄(吉原細見)
에도 시대 요시와라 유곽의 운영자나 관리 주체(유곽 경영자 또는 관련 관청)가
공식적으로 간행한 업무 문서로, 유녀의 등급·화대·인기 순위 등을 객관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는 유곽의 수익 구조와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문학적 품평집:
유죠호반키(遊女評判記)
당시 문인·예술가·유흥계 관계자들이
오이란의 매력과 특기를 문학적으로 묘사한 품평집입니다.
우키요에 작가나 문인들이 유녀의 예술적 재능과 미모를 평가하며,
대중적 인기를 반영하기도 했습니다.
우키요에 작가:
스즈키 하루노부·기타가와 우타마로 등 우키요에 화가들이
오이란의 초상과 품평을 시각적으로 남겼습니다.
이들은 유녀의 외모와 의상을 미화하여 기록했으며,
실제보다 화려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요약:
공식 기록은 유곽 관리 주체가, 문학적 품평은 예술계 인사들이 주도했으며,
우키요에를 통해 대중적 평가가 확산되었습니다.
Keisai Eisen이 그린 요시와라 8경 : 유곽내 옥호와 오이란의 이름이 적혀있다
Kitagawa Utamaro가 그린 미인화 :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옥호와 오이란의 이름이 적혀있다
吉原遊廓よしわらゆうかく
요시와라 유곽
도쿄의 명소인 신요시와라의 입구 : 유곽의 북쪽에 있었다
1. 개요
통칭 요시와라로 일본에서
에도 시대에 생겨난 거대한 유곽촌(집창촌)을 일컫는 말이다.
교토의 시마바라 유곽(島原遊郭), 오사카의 신마치 유곽(新町遊郭)과 함께
3대 유곽으로 꼽혔으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유곽촌이었다.
요시와라는 18세기에 약 1,750명의 여성이 살았던 곳으로
일본 전역에서 한 번에 약 3,000명의 여성이 살았다는 기록마저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였다. 심지어 1893년에는 요시와라에
무려 9,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있었다는 기록마저 있을 정도다.
원래는 니혼바시 근처였으나 에도 말기에는 니혼츠미로 옮겼으며
지금도 근처에는 고급 사창가가 존재한다.
가까운 전철역은 이리야역이다.
이 때문에 현 다이토구 센조쿠3쵸메(와 4쵸메 일부분)는
지명에는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그냥 '요시와라'라고 하면 여기를 가리키는 말로 통한다.
요시와라는 '갈대밭'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실제 요시와라 유곽 터가 설립된 장소가 갈대 천지였기에 붙여진 것이다.
요시와라를 다룬 작품에서 나이가 많거나
성병에 걸려 요시와라에서 쫓겨난 유녀들은
갈대밭이 우거진 강가의 나룻배에서 살며 몸을 판다는 묘사가 많이 나온다.
2. 상세
요시와라는 일반적으로 섹스만 하면 끝나는,
뒷골목에 위치한 음습한 이미지를 가진 일반적인 집창촌과 달리,
거대한 번화가로서 유곽 외에도
각종 찻집과 음식점(고급 소바와 초밥 가게 등)부터
우키요에 가게, 기모노 가게, 가부키 극장 등이 즐비했다.
전성기 때는 요시와라에서 만들어진 헤어스타일과 패션이
일반 아녀자들에게도 전해져 유행을 타거나
정계, 재계 등 상류층의 사교 장소로,
요시와라에 놀러가는 것이 일종의 흥이었고
그런 문화를 즐기는 것이 당시 상류층의 멋이요 기본 소양이었다.
이 때문에 오이란뿐만 아니라
일반 유녀들도 최소한의 교양은 배울 필요가 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싼 돈에 팔리는 싸구려 창부는
키리미세라는 하급 가게에 소속된 유녀(가시죠로)였고,
최하층은 요타카(夜鷹)라 불리는 가게 및 요시와라 거리에서조차 장사를 못하던
신조조차 못될 나이에 매춘에 뛰어들거나
성병 등으로 유곽에서 쫓겨난 길거리 창부였다.
도쿄의 거대한 매음굴인 신요시와라 전경 : 그러니 이곳에는 갖가지 연관된 사업들이 번창했다
도쿄의 거대한 매음굴인 신요시와라는 도쿄의 명소이자 전 세계의 명물이었다.
지금은 성인업소 거리인 소프랜드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공창제를 시행하고 있었기에
요시와라가 생겨나기 전에도 개인이 운영하는 윤락업소는 존재했었으며
교토의 시마바라 유곽은 성질부터해서 시스템까지 일본 최초의 유곽촌에 가까웠다.
요시와라는 구 요시와라(元吉原)와 신 요시와라(新吉原)로 나뉘어져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590년 8월 30일 에도로 입경하고
1603년에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에도 막부를 창설,
당시 촌구석에 불과했던 에도를 재건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때문에 공사를 하러 온 남성 인부를 상대로 한
윤락업소가 에도 근처에 설립되고 그 수가 증가하게 되었는데
허가를 받지 않고 영업하는 업소들이 늘어났고
이미지 관리 차원하에 유곽 이전을 종용하기도 했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막부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 때, 교토에서 유곽을 운영하던 쇼지 진에몬이
유곽 경영인의 대표로 나서서 유곽을 한 곳에 모아 운영해달라는 청원을 냈고
막부도 이를 받아들여(1617년) 니혼바시 근처에 터를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요시와라 유곽은 1618년 11월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규모가 커졌기에
막부는 요시와라를 에도 외곽으로 옮기라고 명령을 했고
1657년 3월 2일 메이레키 대화재가 일어나면서 구 요시와라는 전소,
결국 니혼츠제(현재의 센조쿠 4쵸메)로 장소를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신 요시와라였다. 흔히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요시와라는
신 요시와라로 에도 말기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메이지 이후에는
오이란의 인기가 시들고 게이샤가 인기를 끌면서
정계와 재계의 중심지도 요시와라 유곽이 아닌
게이샤의 마을인 하나마치(꽃마을)로 옮겨가면서
요시와라 유곽은 침체기를 맞이해 한 물 간 것으로 취급되었고
1872년에 유녀 해방령이 내려지면서 일반적인 사창가로 전락.
결정적으로 1956년 5월 31일 성매매 방지법이 통과되어
1957년 4월 1일에 법이 시행되면서 요시와라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요시와라의 터는 소프랜드 같은 변종 성매매 업소들이 즐비한 거리가 되었다.
격자창 안에 앉아서 선택을 기다리는 유녀들
선택이 끝나면 각자 방으로 안내 되었을 것이다
격이 높은 고급유녀인 오이란들이 찻집으로부터의 호출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한가한 모습
요시와라의 오이란 들은 우키요에 미인화의 주요 소재였다
19세기 요시와라 유곽과 오이란 들의 모습
높은 굽의 게다에 맨 발
오이란도츄 : 대단한 행렬이다.
무려 13명. 고급유녀인 오이란 한 명이 먹여살리는 식구가 아주 많았다.
고급찻집에서 손님이 오이란을 지명하면 그 곳으로 가서 손님을 만났다.
일종의 손님과의 선을 보기 위한 만남.
지금도 일본 도쿄에서는 오이란도츄를 관광상품화하여 매년 4월
수많은 관광객들이 전 세계로부터 이 행렬을 보기 위해 일본으로 모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