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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원짜리 조선백자 "달항아리"

작성자청솔|작성시간24.08.12|조회수216 목록 댓글 2

60억원짜리 조선백자 "달항아리"

 

白磁 壺. 조선 후기,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중반(숙종 ~ 영조)에 만들어진 조선백자 양식.

조선 후기 한국의 도자문화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 형성된 커다란 백자 항아리 양식으로, 조선 시대 백자의 특징인 온화한 백색과 유려한 곡선,

넉넉하고 꾸밈없는 형태를 고루 갖추어진 항아리로 인정받는다. 매력적인 볼륨감과 질감, 형태,

공간감을 가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왔으며, 국외에서도 달항아리를 찾는 도예가들이 있다.

 

국내외 여러 박물관과 개인 수집가들의 컬랙션으로 소장되어 있으며, 그중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항아리도 있다.

현재 국보 제262호는 용인대학교 박물관, 국보 제309호는 삼성미술관 리움, 국보 제310호는 국립고궁박물관,

보물 제1437호는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438호는 서울 종로구의 김영무(개인 소장), 보물 제1439호는

서울 영등포구의 최상순(개인 소장), 보물 제1441호는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백자는 태토가 그닥 견고하지 않아서 한번에 달항아리 형태를 크게 차내면 기울어지거나 무너지기 쉽다.

때문에 두개의 반원을 차낸 후, 건조시켰다가 이 둘을 흙물로 접합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달항아리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정확히 입증된 것은 아직 없다.

기름이나 꿀과 같은 액체 혹은 곡식을 담는 저장용이나 꽃을 꽂아 장식하는 용도,

궁중에서 공용 간이 화장실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 등이 제기되었지만 불분명하다.

 

뉴욕 경매에 나온 명품 백자 달항아리 직접 보니

 

2023.02.22 

 

KBS 뉴스

 

백자 달항아리, 조선 18세기, 높이 45.1cm


여기, 잘 생긴 달항아리가 있습니다. 높이가 자그마치 45.1cm.

현재 남아 전하는 달항아리 중에서도 꽤 큰 편에 속하죠.

물건의 가치가 꼭 크기에 비례하는 건 아닙니다만, 항아리는 크면 클수록 더 높게 칩니다.

가마에서 구워내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대 자를 붙여 대호(大壺)라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달항아리'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더 친숙하죠.

이제는 영어로도 고유한 이름이 자리 잡아 'Moon Jar'로 통합니다.

달항아리는 조선 후기에 국가가 운영한 가마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귀합니다.

현재까지 남아 전하는 수량이 아주 적습니다. 국내외를 통틀어도 20여 점에 불과하죠. 그래서 더 귀합니다.

워낙에 보기가 힘들다 보니 경매에 물건이 나오면 그것 자체로 화제가 될 수밖에 없죠.

그러니 달항아리가 나왔다고 하면 달려가 직접 봐야 합니다.

출품작을 설명하는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


3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된 달항아리는

한눈에 딱 봐도 크기며 모양새며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는 명품이더군요.

이 달항아리는 일본의 한 개인이 소장해오던 것이라 합니다.

 

예쁘게 보이려고 일부러 항아리 표면에 묵은 때를 벗겨내거나 한 적 없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게다가 어디 한 군데 깨진 상처도 없어 보존 상태도 매우 좋습니다.

달항아리는 본래 비대칭입니다.

매끈한 균형과 비례를 갖춘 것이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습이 죄다 다르죠.

장인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게 아닙니다.

 

항아리를 빚은 뒤 가마에 넣고 구우면 어떤 항아리가 나올지는 장인도 모릅니다.

불이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모양이 바뀌기 때문이죠.

됐다 싶으면 살아남지만, 실패작은 가차 없이 산산조각 납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살아남은 달항아리는 장인의 그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합격품입니다.


다시, 항아리를 찬찬히 살핍니다. 이쪽에서 본 모습 다르고, 저쪽에서 본 모습이 또 다릅니다.

어디서 보면 주둥이가 반듯하게 지면과 평행을 이루는데, 조금 돌아가서 보면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죠.

달항아리는 워낙 커서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든 다음에 가운데를 붙여서 완성합니다.

그래서 불룩한 몸통 부분이 완벽하게 매끈하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도 달항아리의 또 다른 매력이죠.

그 남다른 매력을 정말 설득력 있게 설명해준 책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달항아리는 지극히 평범하게 생겼다.
우리는 이 사실을 솔직하게 시인해야 한다.
선이든 때깔이든 평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평범함'의 가치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달항아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달항아리는 도공이 '하나의 마음'을 표현한 형상이다.
분별심 없는 세계, 집착심 없는 세계가 평범한 세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새삼 우리 자신들의 삶을 재확인하게 된다.


- 전기열 『조선 예술에 미치다』(아트북스, 2017)

 


그 가치를 이제는 세계가 인정합니다.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관(The 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

오사카 시립 동양 도자 미술관(The Museum of Oriental Ceramics, Osaka)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박물관에 우리 백자 달항아리가 소장돼 있으니까요.


3월 21일 뉴욕 경매에서 이 명품 백자 달항아리는 과연 누구의 선택을 받게 될까요?

마침 이 귀한 달항아리가 뉴욕으로 가기 전에 잠시 고국에 왔습니다.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크리스티 코리아 전시장에서 24일(금)까지 딱 사흘 동안 직접 볼 기회가 있죠.

달항아리뿐 아니라 함께 경매에 나온 겸재 정선의 <금강산팔경도> 병풍, 박수근의 <앉아있는 세 여인> 등

출품작 10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단, 사전 예약 필수!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611014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근간으로 왕실의 품위와 선비의 격조가 미술품에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문기(文氣)가 흐르는 품위와 격조는 조선 백자의 미적 특성이기도 합니다.

17~18세기 영·정조 연간에 제작된 조선 백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은 왜란(1592~1598)과 호란(1636~1637)의 피해를 극복하여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회복하였으며,

문화적으로는 조선의 제 2의 황금기를 이루었습니다.

 

조선의 관요에서는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동화백자 등 다양한 종류의 백자가 제작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백자 큰 항아리[백자대호(白磁大壺)]가 바로 ‘백자달항아리’입니다.

17세기 후반에 나타나 18세기 중엽까지 유행한 이 백자는 보름달처럼 크고 둥글게 생겼다 해서,

1950년대에 백자달항아리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백자달항아리, 조선 18세기 전반, 높이 41cm 입지름 20.0cm 밑지름 16cm 접수 702, 보물, 국립중앙박물관

 

 

달항아리를 조선 백자의 정수로 꼽는 이유는 절제와 담박함으로 빚어낸 순백의 빛깔과 둥근 조형미에 있습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조선 달항아리만의 특징입니다.

 

조선의 이상과 세계관을 담은 백자

 

조선은 ‘예(禮)’를 중시하는 유교 사회였습니다. ‘예’란 유교 문화 전통에서

인간 도덕성에 근거하는 사회질서의 규범과 행동이자 유교 의례의 구성과 절차였습니다.

『논어(論語)』안연편(顔淵篇)에 따르면, 공자는 예는 인(仁)의 실천방법으로서

‘자신의 사욕(私慾)을 극복하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를 실천하기 위해 선비들이 사욕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절제였습니다.

절제란 사람이 욕망이나 감정 표현 따위가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거나 제어하는 것입니다.

선비들은 자신의 내적인 청결함을 중시하고 담박한 생활을 지향하였으며,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삶을 추구하였습니다.

 

담박함이란 사람의 성품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고 순박한 것을 뜻합니다.

백자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추구하는 절제와 청결, 담박함,

그리고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백자는 청자보다 기술적으로 한층 진보된 자기입니다. 먼저 철의 함량이 전혀 없이

깨끗하게 정선된 태토로 성형된 후 청자보다 높은 온도인 1250도 이상에서 번조됩니다.

이때 가마 내 불의 온도를 높이려면 많은 땔감이 필요하였습니다.

조선 왕실은 조선 초에 백자를 왕실의 자기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백토와 땔감이 많아서 백자 생산에 적합한 경기도 광주에 국영 공장인 관요(官窯)를 설치하고

백자를 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땔감을 찾아 10년 정도 단위로 광주 내에서 가마를 이전하다가

영조 28년(1752) 현재의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에 관요의 위치를 고정하고 안정적인 생산을 도모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전란에 따라 백자 생산에 차질이 생기자,

유교 사회로서 국가의례를 중요시했던 조선에서는 이 일을 매우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백자의 빛깔이 회백색을 띠게 되었고, 청화의 수입이 차단되어 철화가 대신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숙종(재위1674~1720) 조에 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회백색은 다시 백색을 띠게 되었습니다.

 

특히 18세기 전반에는 경기도 광주군 금사리(金沙里) 관요에서

순백색의 질 좋은 달항아리를 제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왕실뿐만 아니라

선비들의 취향을 반영한 백자가 제작되면서 다시 조선백자 문화가 활짝 꽃피었습니다.

 

청화백자에는 선비의 품격과 덕을 표현하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의 사군자(四君子)와

중국의 ‘동정추월(洞庭秋月)’, ‘장한귀강동(張翰歸江東)’ 등의 장면이 한국화되어 그려졌습니다.

 

난초무늬항아리, 조선 18세기, 높이 26.4cm,
1981년 이홍근 기증, 동원353

 

산수 매화 새 대나무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높이 38.1cm, 1975년 박병래 기증, 수정285

 

 

달항아리의 한결같이 따뜻한 순백색

 

백자의 가장 중요한 특색은 흰색입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순백자든

청화나 철화로 그려진 그림이 있는 백자든, 바탕을 이루는 백색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집니다.

조선 백자의 흰색은 똑같은 경우가 없이 매우 다양합니다.

 

우윳빛이 나는 것은 유백(乳白), 눈의 흰색과 같은 것은 설백(雪白),

회색빛이 도는 것은 회백(灰白), 푸른 기를 띠는 것은 청백(靑白) 등으로 부릅니다.

 

달항아리의 흰색은 조선전기의 순백색도, 중기의 회백색도, 분원의 청백색도 아닙니다.

유백색을 기본으로 하지만 모든 달항아리가 유백색인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의 항아리조차 완벽하게 동일한 흰색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불완전하게 연소된 부분이 있거나 산화되어 황색을 띤 흰색 부분도 있습니다.

 

백자달항아리, 조선 18세기, 높이 49cm 입지름 20.1cm 밑지름 15.7cm, 국보, 우학문화재단

 

백자달항아리, 조선 18세기, 높이 44cm 입지름 21.5cm 몸지름 42.0cm 밑지름 16.5cm, 국보, 삼성미술관

 

 

어떤 달항아리에는 항아리 안에 넣어두었던 액체가 스며 나와서 물든 부분도 있습니다.

그 물든 부분 또한 항아리 전체의 흰색과 어우러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나의 달항아리에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여러 흰색이 존재합니다. 흰색이지만 똑같은 흰색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것이 싸늘한 자기임에도 한결같이 따사로운 온기가 느껴지게 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달항아리처럼 높이가 40cm가 넘는 큰항아리에 아무런 문양 장식도 하지 않은 것은 유례없이 독특한 일입니다.

달항아리의 흰 표면은 마치 빈 공간과 같아서 무엇인가 채워 넣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양과 장식을 없애고, 결국 표면을 흰색만으로 장식한 것입니다.

 

이는 무엇인가를 채우고 싶은 욕망에 대한 절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달항아리의 미묘하고 진중한 흰색 표면은 사람들에게 다른 생각과 마음의 감흥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조선만의 독특한 미감이며 욕심 없는 흰색의 공백이 가져온 아름다움입니다.

 

달항아리의 너그러운 형태와 담박한 선

 

달항아리의 오묘함은 너그러운 형태와 담박한 선에서도 나타납니다.

달항아리는 높이와 몸체의 최대 지름이 거의 같아서 마치 보름달처럼 둥근 몸체를 이루며,

보통 높이가 40cm를 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선으로 벌어졌던 짧은 목은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곧게 선 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큰 항아리를 한 번에 굽에서 몸체, 어깨, 구연까지 물레로 성형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상반부와 하반부를 따로 만들어 접합하였습니다.

 

백자달항아리, 조선 18세기, 높이 46cm 입지름 20.3cm 밑지름15cm, 신수3658

 

백자달항아리, 조선 17~18세기, 높이 43.8cm 입지름 21.4cm
몸지름 44.0cm 밑지름 16.6cm, 국보, 국립고궁박물관

 

 

몸체를 연결하는 접합기법은 중국 명대 초기의 항아리 성형법을 도입한 것으로

큰 항아리를 만들 경우 매우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중국의 큰 항아리는

모두 접합부의 외관을 매끈하게 다듬기 때문에 이어 붙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달항아리는 접합한 부분이 번조과정에서 갈라지거나 틀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완전한 원형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살짝 이지러진 원형의 달항아리는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형이라고 모두 같은 대칭의 원형이 아닙니다.

이러한 형태는 고요하기만 한 듯한 달항아리에 미세한 움직임과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마치 실제 달과 같이 둥글고 자연스럽고 또 넉넉한 느낌을 줍니다.

 

분명 담박한 선으로 표현된 부정형의 정형을 보여주는 달항아리의 형태는 어디에도 없는 조선만의 형태입니다.

실로 조형미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만인을 비추는 달처럼

 

이 경이로운 원형의 달항아리는 많은 화가와 작가에게 예술적 영감과 창작의 의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화가 김환기는 달항아리를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달과 항아리, 김환기, 1954년, 45×52cm, 캔버스 위에 유채
*김환기 25주기 추모전 ‘백자송’, 환기미술관, 1999. p27

 

그의 백자 그림을 실은 『백자송(白磁頌)』에서도 밝혔듯이,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의 모든 선은 백자의 선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그리는 그것이 여인이든 산이든 달이든 새든 간에 모두가 도자기에서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백자 달항아리에서 선(線)을 발견하였습니다.

 

사진작가 구본창은 백자에서 느끼는 은은함을 사진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합니다.

가장 백자답다고 느끼는 순간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 순간은 백자가 가장 은은하게 보일 때였다고 합니다.

그는 달항아리에서 새로운 색色과 기운을 창조해 내었습니다.

 

무제, 구본창, 2011년, 190.0×151.0cm

 

달은 만인을 비춥니다. 같은 달이지만,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달을 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신비로운 달항아리를 보면서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절제와 담백함으로 빚어낸 오묘한 순백의 세계가 담긴 달항아리는

조선시대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조선미의 정수입니다.

 

또한 달항아리는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새로운 영감과 창조의 세계로 이끄는 또 다른 문입니다.

 

 

 

달항아리, 이유있는 예찬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가 많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고려청자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근래 들어 대중적으로 사랑받으며 우리 곁에서 존재감이 부각되는 문화재가 있다.

바로 ‘달항아리[白瓷大壺]’다.

 

지난 2018 평창동계올림픽 성화대 역시 백자 달항아리 형상이었던 것을 보면

달항아리에 대한 전 국민의 사랑이 얼마나 넓게 자리 잡고 있는지가 짐작된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주해: 1. 대호: 큰 항아리. 높이가 40cm, 폭이 40cm 이상이어야 한다. 2. 백자를 白瓷 또는 白磁로 표기한다.

白磁는 일본식 표기이며, 도자기가 중국에서 유래된 점을 감안해 白瓷로 표기한다)

 

일본 소장자가 내놓은 백자 달항아리,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약 24억6000만 원에 낙찰(2018.5.) (수수료 제외)

최대 지름 46cm, 높이 45cm, 18세기 중반

 

공식 학명(學名)이라고 할 수 있는 백자대호(白瓷大壺)에 처음으로 ‘달항아리’라는 정겨운 이름을 붙인 분은

그 유명한 미술사학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이다. 달을 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달항아리를 글과 그림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친숙하게 끌어안은 대표적인 인물은

화가인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 선생이다. 수화 선생은 그 어렵던 1950년대 시절,

달항아리를 고미술상에서 구입하고 돌아오는 귀갓길에 흥겨워하던 모습을 글로 남겼다.

 

선생의 작품에 달항아리 모티브가 여러 차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달항아리를 무척 사랑한 것 같다.

그의 안목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최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약 24억6000만 원에 낙찰된 달항아리는

1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자태에서 푸근함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비대칭에 살짝 기울어진 모습에 광채가 없는, 즉 무광무색(無光無色)의 순수함이 느껴진다.

 

1964년, 우리의 백자 달항아리를 미술사학자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 1922~1993) 선생이

드라마틱하게 논한 시구(詩句)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백자대호(白磁大壺)_김원룡
조선백자(朝鮮白磁)의 미(美)는/ 이론(理論)을 초월(超越)한 백의(白衣)의 미(美)/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원(圓)은 둥글지 않고/ 면(面)은 고르지 않으나/ 물레 돌리다 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놓으면/ 넘어지지 않을 게 아니오/

 

조선백자(朝鮮白磁)에는 허식(虛飾)이 없고/ 산수(山水)와 같은 자연(自然)이 있기에/

보고 있으면 백운(白雲)이 날고/ 듣고 있으면 종달새 우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는 백의(白衣)의 민(民)의 생활(生活)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고금미유(古今未有)의 한국(韓國)의 미(美)/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理論)을 캐고/ 미(美)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달항아리를 보면 무심(無心)의 예찬이 저절로 나온다.

 

글 :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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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안단테 | 작성시간 24.08.13 그시절 도공들도 저
    달항아리 백자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값어치
    될줄은 상상이나 했겠어요
  • 답댓글 작성자청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13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 당시는 많이 만들었겠지요
    다 부서지고 망가지고 훔쳐가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겨우 20여점 남짓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나왔다 하면 수십억씩~~

    대단한 달항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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