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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차가운 밤이면 (28).

작성자철수|작성시간15.07.28|조회수90 목록 댓글 2

 

 

28.

 

수업을 끝내고 소제 당번의 일까지 치르고 최순영과 이은수가 교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교실에서 나왔는데 그날따라 옥련의 모습이 우물 근처에 없었다.

아까 먼빛으로 옥련의 모습을 그곳에서 보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우물까지

가서 옥련을 기다리기로 했다. 활차에 달린 두레박으로 물을 떠 올려 한 모금 마시

고 맑게 개인 하늘과 들판을 보며 근처를 서성거렸다. 들엔 벼가 누렇게 익어 파도

를 이루고 있었다. 곧 벼베기가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정실습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는데 교장 관사의 부엌쪽 문

이 열리더니 거기서 옥련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숨이 멎을 것처럼 놀랐다. 학교

의 후문을 빠져 들길에 들어서며 옥련이 얘기를 시작했다.

 

우물가에 서 있노라니까 교장 선생님의 부인으로 보이는 일본 여자가 물 길러 나왔

다. 옥련이 인사할 방도도 몰랐고 그럴 겨를도 없어 얼른 활차의 줄을 당겨 두레박

에 물을 떠선 교장 부인이 들고 나온 '바께스'에 물을 채웠다. 교장 부인이 '아리가

또오' 라고 했다. 고맙다는 뜻이다.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옥련은 물이 담긴 바

께쓰를 들고 부엌까지 날라다 주었다. 그랬더니 교장 부인은 신기한 듯 옥련을 바라

보고 물었다. 옥련이 그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어디에 사는 누구냐는 것이었다. 옥련

은 우리말로 '산남동' 이라고 하며 산남동 쪽을 가리켜 놓고 다음 말은 일본어로 꾸

몄다.

 

"내 동생 박달세. 이 학교의 1학년."

마중하러 왔다는 것을 우리말로 하고

"같이 집으로 가려고 왔다."

는 말은 일본어로 얼버무렷다. 그러면서 보니까 씻지 않은 그릇이 포개져 있고 부엌

이 너절했다. 옥련은 묻지도 않고 그 그릇을 깨끗이 씻어 선반 위에 올려놓고, 우물

까지 몇 왕복을 하며 물을 길어다가 부엌을 말쑥이 소재했다는 것이다.

 

"요꾸 하타라쿠네, 가 뭐지?"

옥련이 물었다.

"하타라꾸는 일한다는 뜻이고, 요꾸는 잘한다는 뜻일 끼라."

내가 이렇게 풀이해 주었더니 옥련은 교장 부인이 그렇게 말하더라면서 손바닥을 펴

보였다. 50전짜리 은전銀錢이 햇빛에 반짝했다.

 

"안 받을라꼬 안했나. 그런데도 꼭 쥐여 주는 걸 어떻게 해."

하고 옥련이 환하게 웃었다.

옥련을 따라 걷기만 했다.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나서 옥련이 물었다.

"너 빨래한다는 일본말 아나?"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건 왜 묻노?"

"부엌 옆에 목욕탕이 있었는데 거게 빨랫감이 잔뜩 있더라."

나는 언젠가 우물가에서 소사의 아내가 빨래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빨래는 학교 소사의 아내가 해 주는 것 같더라."

"그럼 왜 그리 빨랫감을 쌓아 두었을까이?"

"소사 아내가 가끔 오니까 그랬겠지. 그러려면 빨래란 일본말을 알아야 할 낀디."

하고 몇 걸음 걷더니 옥련이

"좋은 생각이 났다."

"무슨 좋은 생각이고."

이엔 대답하지 않고 옥련이

"우리 면 사무소 있는 델 가자."

고 하며 징검다리를 도루 건네기 시작했다.

"거게 가서 뭣할 끼고."

하면서도 나는 옥련을 따라 징검다리를 도루 건넸다.

"이 돈 갖고 빨랫비누 살 끼라. 빨랫비누를 사면서 빨래를 일본말로 뭐라 하는가

를 물어볼 끼라."

 

옥련은 이처럼 악착같은 데가 있었다. 나는 무조건 옥련의 그 아이디어에 찬성했

다. 면사무소 있는 마을로 가려면 학교로 가는 길의 오른편을 두고 또 하나의 시

내를 건너야만 한다. 징검다리를 건넌 바로 왼쪽에 물레방아가 있다. 그 물레방아

의 주인은 최 진사 댁의 마름이다. 최 진사 댁의 곡식도 이 물레방아에서 찧는다.

지난, 지난해의 겨울밤 나는 아비를 따라 물레방앗간에 와서 아비가 일하는 것을

보며 감자를 구워 먹은 적이 있었다. 물레방아를 지나면서 그때 아비를 생각했다.

아비를 보고 싶은 마음이 뭉클했다.

 

나의 이런 감상엔 아랑곳없이 옥련은 바삐 다리를 옮겨 신작로에 나서선 곧바로

잡화점을 향해 걸었다.

"빨랫비누 하나 얼마요?"

하고 옥련이 묻고 있을 때 나는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한 개가 5전이다."

하는 가게 주인의 말이 있자

"그람 두 개 주이소."

하고 옥련이 50전짜리 은전을 쑥 내밀었다. 빨랫비누 두 개와 거스름돈을 주자

옥련이 물었다.

 

"아저씨 빨래한다는 말을 일본말로 뭐라 합니꺼?"

"빨래를 일본말로?"

하더니 가게 주인도 자신이 없었던지

"봉아."

하고 안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빨랫비누를 일본말로 뭐라 카노?"

"센타꾸섹껜 아닌기요?"

하는 말이 돌아왔다.

 

"그렇지. 그렇지. 센타꾸섹껜이지. 그런께 빨래한다는 일본말은 '센따꾸 시마스'

겠구나."

"달세야, 외워 둬. '센타꾸 시마스'."

하곤 옥련이 10전짜리를 한 장 가게 주인에게 내밀며

"박하사탕과 눈깔사탕 오 전어치씩 주시오."

했다.

 

가게 주인이 박하사탕 열 개, 눈깔사탕 열 개를 세어 종이 봉지에 담는 것을 보곤

옥련이 쏘듯 말했다.

"아저씨 그러기 있기요? 덤도 안 주구."

가게 주인은 겸연쩍한 얼굴이 되더니 박하사탕 하나, 눈깔사탕 하나를 덤으로 넣

었다. 그러자 또 옥련의 말이 있었다.

"먹을 입은 두 갠디 하나씩이면 어찌 되는 겁니까예?"

"야묵기가 차돌 같은 가시내로군."

하고 웃으며 가게 주인이 박하사탕과 눈깔사탕 하나씩을 더 보태 쌌다. 가게에서

나와 옥련이

"비누는 내가 가질 낀깨 사탕은 네가 가져라."

하고 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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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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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보연 | 작성시간 15.07.28 옥련이가 빨래도 할 모양이네요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솔빛 | 작성시간 15.07.29 착하고 이쁜맘의 옥련에게 좋은일이 생길것같습니다.
    좋은인연이 다가올것같은...
    매회마다 재미있게 읽고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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