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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문학상 전체대상 수상작/단편소설 <하 루>

작성자삿가스.|작성시간23.10.24|조회수454 목록 댓글 7

제4회남명문학상 전체대상 수상작
단편소설 <하 루> 삿가스(이 정 근) 작
 
땅거미가 짧아졌다. 이제 열흘후면 가장 길었던 밤의 저점을 찍고 해가 한 뼘씩 길어진다.
동지는 새로움의 시작이다. 뇌룡사(雷龍舍) 앞뜰을 거기는 스승의 뒤를 따르던 오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승님! 평소에 차고 계시던 경의검이 안 보이는데 어찌된 일이옵니까?”
오건의 뒤를 따르던 정인홍이 스승의 괴춤을 살폈다. 역시 없었다. 정인홍은 오건의 예리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칼은 내려놨지만 더 무거운 것을 차고 있느니라.”
“네에?”
오건이 스승의 허리춤을 살폈으나 더 무거운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정인홍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소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차고 있던 경의검을 내려놓는 순간, 조식은 마음에 도끼를 찼다. 날이 선 도끼다.
 
“인홍아! 감영을 다녀온 지가 얼마나 되었느냐?”
“오늘이 아흐레째입니다.”
“그런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까요?”
최영경이 끼어들었다.
 
“흉한 소식은 빨리 오지만 좋은 소식은 늦게 오는 법이다.”
“답답합니다.”
오건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상소를 들고 대궐로 직접 찾아가자고 하였지 않았습니까요?”
성정이 괄괄한 정인홍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네가 보았듯이 감사가 자리에 바로 앉을 수도 없을 만큼 병고에 시달리고 있지를 않았느냐?”
“네, 그랬습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감사가 병고를 핑계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니 체직하라고 삼사(三司)에서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 그런 마당에 내가 상소를 들고 한양에 올라가 광화문 앞에 거적을 깔고 상소를 올리면 감사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 조정에 출사한 사람은 모름지기 물러날 때를 알고 스스로 물러나야지 해임되면 수치다.”
“그런 깊은 뜻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세 사람이 스승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벌(罰)은 빨리 오지만 상(賞)은 늦게 오는 법이다.”
“상이 내려 올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런 확신 없이 상소를 올렸겠느냐? 오늘 성성자 소리가 그 어느 날 보다도 청아한 걸 보니 좋은 소식이 오려나보다.”
 
열흘 전, 상소문 작성을 마친 조식은 고민에 빠졌다. ‘대궐 앞에 나아가 직접 상소를 올리느냐?’
‘감영을 찾아가 상소 전달을 부탁하느냐?’ 불면의 밤을 보낸 조식은 순리를 따르기로 했다.
 
                              *      *      *
 
합천에서 상주까지 짧은 거리가 아니다. 정인홍을 앞세우고 감영에 도착한 조식은 관찰사에게 상소를 내밀었다.
상소를 읽어본 감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이걸 궐에 넣어달란 말입니까?”
경상감사 안현이 조식을 내려다보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은 것이 좋다는 뜻이 묻어났다.
 
“아니면 제가 궐 앞에 나아가 거적을 깔고 석고대죄 해야 옳겠습니까?”
조식의 되물음은 단호했다.
 
“사부님! 문경새재 넘어 닷새면 올라가니까 나서시죠.”
정인홍이 바람을 잡았다.
 
“네 이놈! 네 놈이 뭣이라고 나서느냐?”
경상감사 안현이 노한 얼굴로 정인홍을 질책했다.
 
“두고 가시오. 청에 따라 궐에 올려 보내긴 합니다만 뒷감당에 대한 책임은 홀로 지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영을 나서는 조식의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로부터 9일째다.
“지금쯤 백악산에 뇌성이 울리고 경복궁에 벽력이 칠거다”
조식의 만면에 결기에 찬 미소가 흘렀다.
 

사정전

그 시각, 경복궁 사정전. 수양대군에서 세조로 등극한 임금이 성삼문을 직접 친국하며 피가 튀고 살점이 타는 살벌한 공간이었지만 태평성대에는 국정을 살피는 임금의 집무공간이다.
 
​‘단성현감에 제수된 조식은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 전하께 소(疏)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왕께서는 신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모르시고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이으신 뒤에, 주부로 제수하신 것이 두 번이었는데, 지금 또 현감으로 제수하시니 떨리고 두렵기가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임금이 상소를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도승지 백인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승지가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우승지 윤옥과 동부승지 오산도 어떠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올 것이 왔다. 폭탄이 터진 것이다. 임금의 어머니를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직격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아비 중종이 세상을 떠난 지 11년. 누가 뭐래도 틀림없는 과부다. 하지만 지금 비록 뒷방에 물러나 있는 대비지만 수렴청정의 여세를 몰아 천하를 호령하고 있는 임금의 어머니다.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아드님이실 뿐입니다.’
 
이건 또 무슨 망발인가? 선왕의 외로운 아드님일 뿐이라면 국가는 누구의 것이고 권력은 누가 행사해야 한단 말인가? 망발을 넘어 역적 죄명을 씌워도 부족함이 없는 도발이다.
 
임금의 용안을 살피던 도승지 백인영은 다리가 후덜덜 떨렸다. 우부승지와 동부승지도 어떠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입이 타들어갔다.
 
“조식이란 자가 어떠한 자이기에 이토록 방자하단 말이냐?”
 
노성(怒聲)이 사정전을 울렸다. 여파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상감마마 옥음(玉音)이다. 그것도 성난 목소리다. 선왕 때이긴 하지만 조광조가 임금에게 진언하다 노여움을 사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 받은 게 불과 35년 전 일이다. 청년 조식 19세 때다. 하지만 진노의 목소리가 아니라 무엇인가는 진심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조식을 치면 자전의 기를 살려 줄 것이고 조식을 안고 가면 어머니의 기를 꺾을 수 있다. 내 스스로 정사를 살핀 지 1년차다. 아직도 어머님의 간섭이 심하지만 성년이 되가지고 엄마의 치마폭으로 또 다시 들어갈 수 없잖은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 그래, 과인에게 하늘에서 준 절호의 기회다.’
 
임금은 조식의 상소를 지렛대 삼아 문정왕후의 치마폭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조식의 상소를 보니, ‘자전께서 생각이 깊으시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비록 간절하고 강직한 듯 하기는 하나 자전에 대해 공손하지 못한 말이 있으니 매우 불경스럽다.”
“신들이 조식의 상소를 보고 불경스러운 언사가 있는 것을 알았지만 경상감사가 접수하여 올려 보냈기에 정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상차하였습니다.”
“정원에서는 이와 같은 소를 보았으면 신하의 마음에 통분하여 처벌을 주청했어야 할 것인데 한 마디 말이 없으니 한심스럽다”
 
사정전에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사정전은 난방이 미약하다. 창호지 한 장이 보온의 전부다. 동지섣달 찬바람에 문풍지가 파르르 떨고 있다.
 
“지금 하교의 말씀을 들으니 황공함을 새삼스럽게 느껴 대죄(待罪)합니다.”
도승지 백인영을 비롯하여 승지 신희복, 윤옥, 박영준, 심수경, 오상이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렸다.
 
“대죄하지 말라. 감사가 조식의 소를 보았을 때 책망하여 물리쳤어야 옳을 것이고, 민심을 전달하기 위해 부득이 치계 했다면 정원에서 살펴보고 치죄하자는 뜻을 갖추어 올렸어야 할 것이다.”
 
경복궁에 떨어진 폭탄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승정원에는 윤원형이 꽂아둔 승지도 있었고, 문정왕후 끄나풀도 있었다. 조식의 상소 필사본을 손에 쥔 승지가 윤원형의 집으로 뛰었고, 세작으로부터 자신을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한 문정왕후는 사람을 놓아 정난정을 들라 일렀다.
 

인왕산

인왕산 자락 윤원형의 집 외삼문 밖에는 미관말직이라도 한 자리 얻으려는 자들의 뇌물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었다. 대윤의 영수 윤임과 쌍벽을 이룰 때도 문전성시를 이루었지만 인종 승하 후, 윤임 몰락과 함께 윤원형의 세상이 되었다. 윤임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윤원형은 권력과 명예와 재물을 손에 쥐었고 천하일색 정난정을 품에 안았다.
 
“대감! 이 아침에 왜 이리 서두르십니까?”
“경상도 두메산골에 관직도 없는 놈이 있는데, 아 글쎄 우리 누이를 뒷방의 늙은이라고 능멸한 놈이 있다 합니다. 이런 고이한 놈이 있습니까? 그리고 전하를 ‘선왕의 한 외로운 아드님이실 뿐입니다.’라고 했다는데 이런 방자한 놈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이 나라는 누구 것이라 말입니까? 이런 발칙한 놈은 당장에 잡아들여 물고를 내야 합니다. 서둘러 입궁하여 전하를 알현해야 하니 말 시키지 말아요.”
의관을 정제하던 윤원형이 정난정을 뿌리쳤다.
 
“저도 궁에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뭣이라구요?”
섬돌을 내려서던 윤원형이 걸음을 멈추었다.
 
“마마께서 들어 오라십니다.”
“우리 누이가요?”
“네에”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입을 닫지 못했다.
 
“궁에서 무슨 변괴가 발생한 게 분명합니다. 서둘러 갑시다.”
 
두 사람을 태운 가마꾼들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그렇지만 가마는 광화문 밖까지다. 대소인을 불문하고 궁에 들어가려면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 한다.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이유다. 영추문 앞에서 내린 윤원형은 사정전으로 향했고 정난정은 대비전으로 잰 걸음을 놓았다.

통명전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 있는 통명전. 세종의 증손자 성종이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 숙모 예종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지은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전각이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인수대비 등 왕실의 어른들이 세상을 떠난 후, 문정왕후 차지다.
 
“마마! 정경부인 마님 대령입니다.”
대비전 상궁이 고했다.
 
“들라 이르라”
합문이 열리며 정난정이 안으로 들어갔다.
 
“마마! 강녕하시었습니까?”
“그래, 어여 앉거라.”
“무슨 일로 이렇게 급하게 찾으셨습니까?”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아서 너를 불렀느니라.”
“마마님의 좋은 일이라면 저의 좋은 일입니다. 어서 하교의 말씀을 내려주시옵소서”
“난정아!”
“네, 마마!”
문정왕후가 정난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너를 난정이라고 부를 때는 마마라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네, 마마!”
“또 마마란다.”
“네, 언니!”
 
정난정의 아버지는 부총관 정윤겸이다. 정윤겸이 관비를 성폭행하여 낳은 아이가 정난정이다. 그러니까 서녀도 아니고 얼녀(孽女)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천한 신분이다. 하지만 잘 생긴 아버지를 닮아서일까?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를 가졌다. 천하일색 미인이었다.
 
여자의 미모는 자산이라 했던가? 남자가 권력을 쥐고 명예를 얻고 재물을 가지면 더 갖고 싶은 게 있다. 미인이다. 윤원형이 정난정을 탐했고 정난정이 윤원형을 후렸다. 서로의 이익이 맞아떨어졌다.
 
윤원형이 난정을 품에 안았고 난정은 첩실이 되었다. 하지만 난정의 눈에 가시 같은 것이 있었다. 본처다. 5년 전, 계략을 놓아 본처를 독살한 정난정은 본부인을 꿰찼다. 드디어 정경부인이 된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알고 있는 문정왕후다. 약점을 쥐고 있는 문정왕후는 정난정을 수족처럼 부렸고 난정은 견마(犬馬)처럼 충성했다.
 
“난정아!”
“네, 마마”
“네 눈에 이 올케가 시집가도 되겠느냐?”
“왕가에 뼈를 묻어야 할 언니가 갑자기 시집 예기는 꺼내시고, 차암 나.”
“지아비 보낸 지 11년차지만 갑자기 사내가 그리워진다.”
이 때 문정왕후 나이 51세. 아직은 여자이고 싶어 하는 나이다.
 
“언니두 차암!”
“진심이다.”
“정말이십니까? 마마!”
“그렇다니까.”
“잘생긴 우리 동생을 네가 후렷기에 너에게 비법을 전수받고 싶다.”
눈 높은 동생을 후리고 본부인을 밀어냈으니 대단한 수완임에는 틀림없다.
 
“남자들은 다 도둑놈들이더라. 나 이전에 장경왕후와 단경왕후는 거론하지 않겠다. 남자들은 씨뿌리기 위해 태어난 짐승인지 나 말고도 경빈신씨, 희빈홍씨, 창빈안씨, 귀인한씨, 숙의홍씨, 숙의이씨, 숙의나씨가 있잖느냐? 그밖에 후궁들은 손가락을 셀 수가 없다. 징그럽다. 징그러워. 너처럼 독점하고 살 수 있는 비결을 말해주란 말이다.”
정난정은 어이없다는 듯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머리 깎고 있는 중들을 후려 볼까?”
“스님들을 파계 시킨 다구요?”
“못 할 거도 없잖느냐”
“네 눈에는 보우가 좋더냐? 서산대사가 낫더냐? 사명당이 쓸만하더냐?”
 
보우는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아 봉은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승과를 설치하고 병조판서를 넘보고 있다. 서산대사는 묘향산에서 수행중이고 사명당은 나라를 걱정하며 정진 중에 있었다.
 
“보우는 야심이 많고 서산대사는 언니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을 것 같으며 사명당은 너무 어리옵니다.”
“어린 게 흠이라면 키워서 써먹으면 되지 않겠느냐?”
“왜 그렇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나를 ‘구중궁궐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 고 조롱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다. 그러니 빨리 시집가고 싶지 않겠느냐?”
“언니를 능멸한 사람이 있다 구요?”
“그렇단다.”
“그런 놈은 찢어 죽여도 분이 안 풀리지요.”
“난정아!”
“네.”
“가까이 오너라.”
문정왕후가 정난정을 보료 가까이 불렀다.
 
“네가 청해서 전옥서에 꽂아둔 녀석이 있지?”
“네, 형방승지를 겸하고 있습니다.”
“그 자를 불러서 감쪽같이 없애버리도록 하여라.”
“네, 언니! 언니의 심기를 그르친 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하겠습니다.”

문정왕후

 
집으로 돌아온 정난정은 전옥서 제조 김기택을 불러들였다.
“전옥서에 임꺽정 졸개가 갇혀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번 토벌작전에서 생포해온 놈입니다.”
“앞으로 그자를 어떻게 처리할 예정입니까?”
“구월산에서 우리 관군을 죽였기 때문에 사형입니다.”
사형에는 교형, 참형, 육시형, 거열형이 있었다.
 
“그 자를 데려 오시오”
“그자는 산에서 도적질만 하던 흉포한 놈이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 십니까요?”
“제조는 알바 없어요. 그자를 냉큼 데려오시오.”
 
정난정의 명을 받은 김기택이 전옥서에 수감되어있던 임꺽정 졸개를 데려왔다. 힘이 장사인데 어떤 난동을 부릴 줄 모른다. 포승줄에 단단히 묶여 정난정 앞에 꿇렸다.
 
“죽이려면 빨리 죽일 일이지 왜 이런데는 끌고 와서 이러십니까요?”
동지섣달 추운 겨울 날, 난방도 안 되는 맨땅에 거적을 깔고 잠을 자던 그에게는 으리으리한 집 분위기가 낯설었다.
 
“포승을 풀어 주어라”
“힘이 장사인데 어떤 행패를 부릴 줄 모릅니다요.”
죄인을 끌고 온 옥사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정난정을 바라보았다.
 
“괜찮다. 내가 책임질테니 풀어주어라.”
죄인의 팔과 손목에 감겨 있던 포승줄이 풀렸다.
 
“네 이름이 무어냐?”
“산에서 날뛰는 화적놈 이름을 알아서 무에 쓰려고 그러십니까?”
“그래도 이름이 있을 것 아니냐?”
“화전 붙여먹고 살 때는 우리 어머니가 나를 길에서 낳았다고 길산이라 불렀는데 산에 들어간 이후에는 떡산이라고 합니다.”
“떡산이라? 거 이름 한번 좋구나. 왜 떡산이라 하느냐?”
“떡대가 좋아서 동지들이 그렇게 불러주었습니다.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던 문정왕후가 다시 물었다.
 
“구월산에서 관군을 많이 죽인 네가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사람을 죽였으니까 나도 죽어야지요.”
 
사화(史禍)를 거치는 동안 정치가 혼란에 빠지고 고을사또의 부패와 착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전국에 도적이 들끓었다. 그들은 스스로 산적(山賊)이라 일컫는가 하면 화적(火賊)이라하기도 하고 의적(義賊)이라 내세우기도 했다. 그 중에서 황해도 구월산을 근거지로 하는 임꺽정 일파의 세가 막강했다.
 
구월산에 마련한 산채를 근거지로 고을 관아를 습격하고 재물을 약탈하여 배고픈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가 하면 도성 가까운 양주까지 출몰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토벌대를 조직하여 산채를 포위했으나 백성들이 내응해줘 토벌작전은 실패하고 포도관 이억근이 살해되는 치욕을 당했다.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두령이 구하러 온다고 했습니다.”
“두령이 누구냐?”
“임꺽정입니다.”
“그놈이 그렇게 힘이 쎄냐?”
“맨손으로 황소를 때려잡는 것은 기본이고 산을 날아다닙니다.”
“축지법이라도 쓴단 말이냐?”
“축지법이 뭔진 모르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합니다.”
“그 놈이 파옥 한다구?”
“두령이 맘만 먹으면 이까이꺼 옥 깨트리는 것 문제도 아닙니다.”
“두령의 말을 믿느냐?”
“지도 처음에는 산적놈이라고 믿지 않았지만 산에 들어가서 탐관오리들 봉물짐을 빼앗아 배고픈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걸 보구서 믿었습니다.”
“꿈 깨라.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너희들이 옥을 깨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난정의 얘기를 듣던 떡산이가 풀이 죽었다.
“내가 너의 목숨을 살려 줄 터이니 내 말을 듣겠느냐?”
“무슨 말인데요?”
“내가 지목한 사람의 목을 따오면 너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누군뎁쇼?”
“확답을 먼저 하거라.”
“아무리 산적놈 이지만 누구인지 알아야 죽이든 살리든 할 거 아닙니까?”
“힘없는 선비다.”
“그니까 누구냐구요?”
떡산이가 고개를 흔들며 짜증을 냈다.
 
“조식이다.”
“조식이라굽쇼?”
“네가 조식을 아느냐?”
“아무리 산적놈이지만 조식을 모르면 산사람이 아니지요.”
“어떻게 아느냐?”
“경상도 합천 땅에 사는 그 선비는 나라에서 내려준 벼슬을 헌신짝처럼 차버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벼슬이 무엇입니까? 관직에 나아가 나라에 봉사하라는 직책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개나 소나 뇌물을 바치면 나라에서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라는 감투를 내려주지 않습니까. 그 선비는 그러한 벼슬을 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선비가 경의검을 차고 초야에 묻혀 나라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물건을 빼앗지만 불의(不義)한 놈들의 물건을 빼앗기 때문에 의적(義賊)이라 생각합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의(義)가 통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을 왜 내가 죽여야 합니까? 내가 살기 위해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깨끗하게 제가 죽겠습니다. 그런 소리 하실라거들랑 나를 묶어서 가막소로 보내 주십시오.”
떡산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두 손을 내밀었다.
 
“생명은 하나밖에 없다.”
“알고 있습니다.”
“죽으면 끝이다.”
“저승사자에게 끌려가 심판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나쁜 놈은 잡아다 지옥이 보낸다.”
“그럼 왜 형조판서 윤임과 이조판서 유인숙, 좌의정 유관을 모략하여 죽이고 계림군과 봉성군을 반역음모죄로 죽인 윤원형이 애첩 정난정을 끼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습니까?”
“뭣이라고?”
정난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승사자가 길을 잃고 헤매거나 염라대왕이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저놈을 당장 끌어내어 처단하여라.”
그날 밤, 전옥서를 깨트린 임꺽정은 떡산이를 데리고 오간수문을 통하여 유유히 사라졌다.
 
                             *      *      *
 
양반은 소나기가 퍼부어도 뛰지 않는다 했던가? 도포자락 휘날리며 입궁한 윤원형과 임금이 마주했다.
 
“전하! 조식이란 놈을 당장 잡아들여 위엄을 보이셔야 합니다.”
“위엄은 자신이 세우는 것보다 남이 세워줬을 때 빛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경영함에 있어 상벌의 준엄함을 보이셔야 합니다.”
“과인이 이판에게 좌상자리를 주었을 때 그릇이 작으면 넘쳐서 못 받을 것이고 그릇이 크면 마음에 들지 않아 안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상벌로 다스린다는 것은 벌의 남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원형은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겸하고 있었다. 자신이 제언하는 데로 따라올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어린아이로 생각했는데 임금 노릇을 하고 있다. 벽에 부딪혔다. 상대는 나이 어린 조카이지만 임금이다. 벽을 실감한 윤원형이 어전을 물러나와 대비전으로 갔다.
 
“마마! 문후 여쭈옵니다.”
“그렇잖아도 부르려 했다. 어서 들라.”
“합천에서 올라온 상소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마다요. 주상은 뭐라 하던가요?”
구중궁궐 깊은 곳에 있지만 임금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벌을 함부로 쓸 수 없다 하옵니다.”
“뭐라구요?”
“그런 고얀 놈은 대명률을 따질 것도 없이 당장 목을 쳐야 합니다.”
“치다 뿐입니까. 육시를 내야 합니다.”
윤원형을 돌려보낸 문정왕후가 색전 상궁을 불렀다.
 
“대전에 나아가 전하를 들라 이르라.”
아직도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아니다. 내가 대전으로 갈 것이다. 차비를 놓아라.”
부리나케 채비를 갖춘 대비마마의 가교가 대전 앞에 멈췄다.
 
“대비마마 납시었습니다.”
“뭣이라고?”
임금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어마마마! 어인일 이시옵니까? 문안인사 드리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모후가 살아있으면 매일 문후 여쭈는 것이 법도다.
 
“들어갑시다.”
왕대비가 앞서고 왕이 뒤따랐다. 방으로 들어간 대비가 왕의 자리에 앉고 왕이 방석을 깔고 마주 앉았다.
 
“주상! 조식을 어찌할 겁니까?”
격식을 생략한 칼날 같은 하문이었다.
 
“어마마마!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진정하십시요.”
“조식을 어찌할 거냐고 묻지를 않습니까?”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렸고 말투에는 날이 서있었다.
“어마마마께서는 소자가 실패한 임금보다도 성공한 임금이 되기를 바라시겠지요?”
“당연하지요.”
“부왕 역시 성공한 군주로 기록되기를 원하시겠지요?”
“그렇고 말고요.”
“연산 임금이 왜 쫓겨났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야, 정치를 잘못해서 그렇지요.”
“맞습니다. 연산임금은 세자시절에 성종 할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세자 교육을 받아 성군이 될 재목으로 성장했으며 촉망받는 임금으로 등극했습니다. 하지만 언로를 차단하여 망했습니다.”
“선왕으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어마마마의 하나밖에 없는 이 아들이 언로를 막아 실패한 임금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닙니다. 아니고 말고요.”
왕대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소자가 성공해야 부왕도 존경받는 군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고 어마마마 역시 존숭 받는 왕비로 남을 수 있고 외갓집 역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 실패하여 연산 할아버지처럼 끌려 내려온다면 모두가 허황된 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호흡을 가다듬은 문정왕후가 밖을 향하여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어서 대비전으로 가자.”
왕대비가 서둘러 대비전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를 배웅한 임금이 승지를 불러들였다.
 
“나의 부덕(不德)을 헤아리지 못하고 대현(大賢)을 조그마한 고을에다 두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내가 불민(不敏)한 탓이다. 더 이상 논하지 말라.”
 
도승지 백인영과 승지 신희복, 윤옥, 박영준, 오상, 심수경은 불호령이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했는데 움츠렸던 마음을 펴고 웃음을 되찾았다.
 
그 시각, 합천에서는 조식이 뇌룡사 앞뜰을 거닐고 있었다.
“의롭지 못한 것에 침묵하는 것은 불의보다 나쁘다.”
따르던 제자들은 머리를 조아렸고 윗고름에 매달려있던 두 개의 작은 쇠방울(惺惺子)이 청아하게 울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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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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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작주 | 작성시간 23.10.25 명작을 만들고 올리시고 옮기시느라 애쓰심에 감사한 맘입니다
    긴 글 두고 두고 읽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삿가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25 감사한 마음으로 읽어주신게 고맙지요^^
  • 작성자감바 | 작성시간 23.10.25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 답댓글 작성자삿가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25 감사합니다.
  • 작성자작주 | 작성시간 23.11.04
    통쾌한 하루가 기다려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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