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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하여-08]

작성자제이서|작성시간24.03.10|조회수106 목록 댓글 0

 

 

 

 

 

 

사랑을 위하여-08

그동안 그녀는 남편이라는 도덕적 구속의 벽에 갇혀 눈도 귀도 막혀버린 생활을 하였음을 알자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했던 삶의 자아가 용틀임하며 솟구쳐 올라왔다. 그러나 함부로 그 자아를 시험하기에는 그녀의 내면에 쌓아 온 내공이 쉽게 모른척하지 않았다. 누구도 쉽게 그녀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녀 또한 자아 발현의 신중함에 대한 주의는 그녀도 모르는 사이 내공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운명같이 체이스를 만나고, 그 후 그로부터 자신에게 덮어 씌웠던 보호의 껍질을 하나씩 벗었다. 그에 의하여 스스로의 자긍심과 자신이 스스로 사회를 다시 평가하게 하였다. 그제서야 그녀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느끼게 되었고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깊이 간직했던 순수함과 맑은 심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세상은 달라 보였다. 세상은 그녀를 다르게 대하였다. 그건 사실이다. 그녀의 미모와 아름다움은 묻은 흙을 하나씩 닦아내면서 진정한 가치를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녀도 그러한 것들을 알고 나서는 그녀의 현재도 함께 알게 되었다. 그녀는 중년이다. 무엇이든 혼자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자신을 묶어 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예. 알았어요. 당신 하라는 대로 하겠어요.”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죄스러움이나 아쉬움 미련 등은 전혀 없었다. 삶은 두 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무 귀하다. 나도 내 삶을 살아야 할 고유한 내 인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제는 그것을 실현할 것이다. 내 앞날이 평탄하지 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헤쳐 나갈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이므로.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변화에 대한 충격을…

처절한 아픔일수록 새로운 것에 대한 절실함과 가치는 더욱 소중할 것이다. 그녀는 제임스를 만나지 않기로 하였다. 운명이 정말 그들을 연결 지어주려 한다면, 다시 기회는 올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믿었다. 운명은 숱한 형태와 이름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녀가 모를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아 잡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운명이라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로 오고 갈 것이다. 다만, 바른 운명을 잡기 위하여 준비를 하여야 함을 그녀는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받을 운명. 그 운명을 위한 준비가 무엇인지 알고 꾸준히 심신을 닦아 두는 것이다 라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토론토까지로 한 사람 예약하려 합니다. 내일 출발할 수 있을까요?”

“목요일은 특별기만 운항하며 자리는 다 예약되었습니다. 손님. 꼭 가시려면 오늘 밤 비행기에는 자리가 있네요. 어떡하시겠어요?"

다행히도 수요일 밤늦게 출발하는 비행기는 여유가 있어 예약이 되었다. 지금 출발하면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서울 도착 KTX를 탔다.

 

이것도 운명의 하나라고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 이러한 만남에 대한 준비는 없었다. 그러기에 어쩌면 이것이 운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준비하지 않았기에 받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관계로 사 그러 질 것이므로. 딸과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은지 이제 4년이다. 그 후 목적 없이 혼자서 잘 살아왔다. 무엇 때문에 준비를 한단 말인가.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준비라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 각성시키고 계획하게 하고 단련하게 한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만, 미정의 난처한 상황이 걱정되었지만, 그로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도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돕는 것이리라 생각하였다.

 

바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독히도 일이 안 풀렸다

생각지도 않은 기쁨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파산이었다

운명이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지독히도 안 풀렸다

그래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안녕

우리의 관계여

 

 

 

*****

“체이스님 부탁합니다.”

그가 저녁을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동안에 벨이 울렸다. 젖은 손으로 전화를 들자 한국말로 체이스를 찾았다. 동생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접니다.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서울의 파랑새 출판사 김이현입니다. 주무시는 건 아니시죠?”

“잠잔다고 전화 끊을 겁니까? 아직 자지는 않지만 설거지하는 중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선생님!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25일 작가 사인회에 참석해 주셔야겠는데요. ‘그들의 전쟁’의 예비 독자들이 작가님을 찾는데요. 판매 서점들에게서도 요청이 쇄도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 회사가 우선 스케줄을 먼저 의논 없이 잡았습니다. 날짜 변경이 꼭 필요하시다면 다시 조정하겠지만, 선생님! 꼭 참석해 주십시오. 그날은 토요일입니다.”

 

 

 

 

*****

미정은 이혼 후 혼자 살며 꾸준히 그동안 써둔 시들을 정리하여 제2시집을 냈다. 그녀가 쓴 시들은 모두가 사랑 시였다. 미정은 체이스를 잊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메일도 전화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 외는 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오직 그리움과 보고픔의 긴 세월 속에 절실하고 애절한 시를 썼다. 그녀의 진솔한 가슴속의 사랑은 한 줄 한 줄 처절하고 순정한 아름다운 사랑 시로 표현되어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제목은 ‘바람 같은 사랑’ 이었다. 그 책에 실려진 시들은 의외로 반응이 좋아 출판사로부터 독자와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출판사의 계획에 따라 25일 아침 일찍 서울 강남구의 무역센타 지하에 있는 대형 서점인 대한서점으로 가서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어젯밤에 약속해 둔 딸 은희에게 전화를 했다.

 

“은희야. 엄마다. 어디니?”

“응. 엄마. 나 엄마네 집 앞에 다 왔어. 문 열어줘.”

미정은 얼른 전화기를 두고 아파트 대문을 조금 열어두고 안방의 거울 앞으로 갔다. 사실, 그녀는 이런 외출은 처음이어서 어떤 옷이 어울릴지 감을 잡지 못하고 마음만 급해지고 있었다.

 

“엄마! 나 놀랐어. 엄마가 이렇게 이쁜 줄 오늘 또 알았네. 내 엄마가 맞아?”

은희가 열어 둔 방 문 앞에서 놀라는 말에 돌아보는 미정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금방 붉게 물들었다 사라졌다.

 

“은희야. 엄마 이런 차림으로 가면 괜찮을까 모르겠다.

네 생각은 어떻니? 솔직하게 말해주려무나.”

“응. 엄마. 사실 조금은 걱정이 돼.”

“그래.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은희의 걱정된다는 말에 미정은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엄마. 이 딸이 걱정하는 것은… 나하고 같이 가면 사람들이 자매가 온 걸로 오해할까 그게 걱정이야. 엄마는 아직 젊어 보이고 딸이 봐도 아름다워. 지금 그 옷이 아주 잘 어울리는데…”

그 말은 전혀 기분 좋으라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실은 옷차림에 생각을 많이 가졌다. 한복은 이미 관계없었고, 정장 차림으로 하기에는 불편했다. 그래서 결국은 늘 입는 옷 그대로에서 가기로 하였다. 청바지에 회색 실크 와이셔츠 그리고 그 위에 짙은 청색 덕 다운 점퍼를 입었다. 마음도 몸도 편했다. 문뜩 체이스의 말이 떠올랐다.

 

“미정아~ 당신은 원래 이쁘고 아름다워.”

지금에서야 이 말이 떠오르는 것은 무어람. 미정은 피식 헛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거울을 보았다.

 

이미 그곳 조미정 시인의 사인회 장에는 젊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중년에서 노년까지의 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며 조미정 시인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조미정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층이 넓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그들 독자 중에는 시집 표지로 한 그녀의 절묘하도록 균형 잡힌 아름다운 얼굴에 현혹되어 찾아와 기다리는 중년층도 많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책에 수록된 사랑시와 표지의 표현하기 쉽지 않은 청순한 중년의 아름다운 모습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지금까지 그런 시와 시집을 발견하기 어려웠던 메니아들을 유혹하였음 이리라.

 

그녀의 좌석은 서점 입구의 밖앗쪽 우측 편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4개의 접이식 알미늄 다리가 받치고 있는 긴 아이보리색 테이블 위에는 ‘사랑시와 여류시인 조미정’이라는 투명한 아크릴 명패에 청록색 글자로 인쇄된 이름표가 수십 자루의 사인펜과 함께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인쇄 잉크의 냄새가 날 것 같은 자기의 시집을 펼치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체이스. 그와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녀의 사랑시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리운 그였다. 그를 생각하면 금세라도 눈물이 거렁 거렁 맺힐 것 같았다. 이 싸인회가 끝나면 마음을 추슬러 그를 찾으리라 이미 다짐한 터였다. 미정은 집 가까운 절에 올라서 부처님께 많이도 빌었다. 운명! 그것. 있다면, 제발 그 사람 나에게 보내 주세요. 그 기도는 그 사이 미정의 불송(佛誦)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들어 천정에서 화려하게 반짝이는 조명을 보며 나직이 속으로 외었다. ‘제발, 그 사람 나에게 보내주세요.’

 

그녀의 맞은 편에는 그것과 같은 테이블에 역시 수십 자루의 싸인펜이 올려져 있어서 어떤 작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테이블에는 오직 싸인펜만 있었다. 향기 짙은 장미와 투율립이 탐스럽게 담긴 화분이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여있는 비교적 화려한 그녀의 테이블에 비하면, 그쪽은 초라하기까지 하였다. 같은 작가로서 오히려 미안함마저 가진 그녀였다.

 

오전 11시. 그녀가 테이블의 정리를 마치고 서점 직원이 독자들이 돈을 지불하고 가져온 책의 빈 공간을 찾아 사인하도록 펼쳐 그녀에게 넘겨주기 위하여 그녀의 옆자리에 앉자 기다렸듯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독자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그녀의 시집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 시간조차 없었다. 연이어 싸인을 기다리는 독자들 속에 그녀와 그녀가 앉은 테이블은 묻혀버렸다.

 

오전 11시 30분에 체이스는 이제는 변해버린 무역센터 역에 내려 겨우 서점을 찾아 입구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출판사 직원이 인사하며 자리를 권했다. 체이스는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자리에 주인공으로 있는 그런 상황 말이다. 16년간 수출 사업을 해오며 쌓은 내공으로 추리소설을 소비자의 취향에 맞게 써서 팔자는 생각만 하였지 사실 그는 문학이나 소설에 대하여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고 신문 등의 뉴스 매체에 의한 검증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의 영혼을 휘어잡고 있는 그 아지 못할 운명에 내 맞긴 채 그동안의 국내외에서 쌓은 내공으로 상상하고 추리하여 글을 썼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은 소비자 즉 독자가 자기 돈을 내고 사서 읽도록 하는 상품이므로 돈 값어치 이상은 하도록 하자는 생산 본능적 의지는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프로페셔널이어야 했다. 전에는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 생산 작업도 그랬어야 했다. 그래서 완성 후 자기 돈을 투자하여 완성품을 만든 후 독자에게 영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출판사는 그를 대신하여 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영업은 그들 독자에게 책의 내용으로 하여야 한다고 각오하였다. 그리고 오늘 그 결과 중 하나로 독자와 만나는 싸인 회의 주인공이 되어 캐나다에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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