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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스크랩] 2024년 6월 9일 연중 제10주일

작성자용각산|작성시간24.06.09|조회수14 목록 댓글 1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3,9-15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4,13─5,1

 

형제 여러분,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17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18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5,1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3,20-3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봄은 오다가 멀찍이 피해 도망가고, 여름이 과속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오늘의 말씀 전례는 ‘믿음’이라는 주제 아래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대한 불신으로 숨습니다.

그들이 아마 하느님을 믿었다면, 알몸이 두려워 숨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청했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2코린 4,13)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믿고 따르는 제자 중에 열둘을 뽑아 사도로 세우신 뒤, 산을 내려오시어 집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군중들이 그분의 일행이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친척도 있었는데,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잡으러 왔습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이방인 신인 베엘 제불에 사로잡혔거나 마귀 우두머리(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모함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갈라진 나라와 집의 비유’를 통해서 반박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말을 통해, 당신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혹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대체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단 말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가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요?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 학자들이 바로 그런 죄에 걸려든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왜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는 걸까요? 
그것은 성령의 활동인 용서를 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이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하는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방문을 받고서, 새로운 ‘영적 가족’을 선포하십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34-35)

이는 당신의 영적 가족의 ‘두 가지’ 구체적인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마르 3,34)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소외당하고 가난하나 구원을 갈망하여 몰려와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이는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믿고 실행하는 이’입니다.

 

사실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곧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혹은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안에서 이루는 진정한 가족 관계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믿고 실행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 뜻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서 이루며 우리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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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해피 | 작성시간 24.06.10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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