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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24년 6월 25일 화요일 남북통일 기원 미사 (마태오 18,19ㄴ-22 ) <우리는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작성자용각산|작성시간24.06.25|조회수11 목록 댓글 0

2024년  6월 25일 화요일 남북통일 기원 미사 (마태오 18,19ㄴ-22)

 

복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우리는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오늘은 남북통일 기원 미사입니다. 남북통일은 우리가 하는 것일까요?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선물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그 선물을 주십니다.

동서독의 통일되는 과정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통일은 정말 선물과 같이 왔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귄터 샤보프스키 의원이 동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는 동독인들이 해외여행을 위해 비자를 더 쉽게 신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샤보프시키는 일설에 의하면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새로운 규정의 세부 사항과 시기에 대해 충분히 설명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자회견에서 한 언론인은 샤보프시키에게 새로운 규정이 언제 발효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 발표문을 여기저기 뒤적이다가 다소 불확실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가 아는 한, 지체 없이 즉시 발효됩니다. 이 발언은 틀렸으며 동독 정부를 포함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해당 규정은 즉각 시행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시행되도록 의도됐습니다.

샤보프스키의 성명은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수천 명의 동베를린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통과할 것을 요구하며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습니다.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인구 유입에 대비하지 못한 국경수비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명확한 명령도 없이 늘어나는 군중에 직면한 그들은 결국 문을 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었고 이 물결은 더는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후 몇 달 동안 협상과 외교적 노력이 강화되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선물처럼 통일의 물꼬가 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북한 주민들이 수없이 철책을 넘어온다면 우리는 기쁘게 맞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내가 왜 그 많은 통일비용을 내야 하느냐며 통일을 반대합니다. 앞으로의 치안과 전체적으로 나라가 가난해질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결혼도 안 하고 자녀를 낳지 않아 소멸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통일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면 새롭게 국민들의 마음도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통일비용이 많이 든다고 통일을 반대하는 이들은 장기적으로 북한과의 대립으로 우리가 소비해야 하는 군사비용이나 핵무기의 위협과 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관광적으로도 기대되는 이익도 엄청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북한을 이용하기 위한 것 아니냐, 우리가 북한이 불쌍해서 통일해주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쌍방의 고마움을 전제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비굴해지느니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로마에 끝까지 맞서다 나중에 집단으로 자살했던 마사다 항쟁을 생각해봅시다. 아니면 영화 ‘300’에서 자신은 관대하다는 페르시아 장군에게 목숨을 잃더라도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스파르타 군인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북한에게 다가갈 때는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선물로 통일의 물꼬가 트일 때 서독인들처럼 기쁘게 동독 사람들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나의 배우자가 “너 나 아니었으면 거지로 살았을 거야?”라고 한다면 그래도 그 사람과 살겠습니까?

통일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 통일이 우리에게 더 좋다는 전반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오면 내분이 없이 바로 통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이 더 좋다는 믿음이 먼저 있어야 그 선물도 받을 수 있습니다.

분명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독에서는 통일의 이점이 어려움보다 크다는 것이 전반적인 공감대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몰려올 때 우리가 기뻐 뛸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통일의 준비가 된 것이고 이때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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